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댄싱 베토벤’ 포스터/사진제공=마노엔터테인먼트

교육방송에서 매년 개최하는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EIDF. EBS International Documentary Festival)가 올해로 15년째다. 영화제를 개최해 놓고 은근슬쩍 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EIDF는 나름 끈질긴 면이 있다. 올해 출품 다큐멘터리들 중에 ‘댄싱 베토벤’을 소개하겠다.

모리스 라벨(1875-1937)의 교향곡 ‘볼레로’는 묘하게 반복되는 주제가 절정을 향해 나아가면서 정통 클래식과는 무엇인가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오케스트레이션을 바탕으로 한 클래식이 분명한데 말이다. 춤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어서다. 이 곡을 받아 모리스 베자르(1927-2007)라는 불세출의 안무가가 춤으로 표현했고 세계적인 걸작 반열에 올려놓았다. 1961년의 일이다. 그런데 베자르가 1964년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으로 안무한 작품이 있다는 사실은 ‘볼레로’에 비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영화 ‘댄싱 베토벤'(감독 아란차 아기레)은 ‘합창’이 초연된 후 50주년 기념공연의 준비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 ‘댄싱 베토벤’ 스틸/사진제공=마노엔터테인먼트

베자르가 활동했던 스위스 로잔의 ‘베자르 발레단’은 러시아 안무가 표트리 나르델리의 연출로 이 작품을 공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작품의 규모에 비해 베자르 발레단 무용수들의 수가 적어 동경 발레단과 협연을 하고 ‘합창’ 연주는 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가 이끄는 이스라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맡았다. 공연 장소는 동경이다. 아기레 감독은 9개월 동안 로잔과 동경을 오가면서 영화를 찍었고 나레이터는 배우 말리야 로망이 담당했다. 영화를 보는 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말리야는 ‘베자르 발레단’의 예술 감독 질 로망의 딸이다.

아기레 감독은, 좀 거창하게 평가하면, ‘댄싱 베토벤’을 통해 역사를 이어가는 거대한 논리를 구축하려 한다. 베토벤은 ‘합창’을 작곡할 때 이미 귀가 멀어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오게 될 희망찬 미래를 노래하고 싶었기에 4악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환희의 송가’를 F. 실러(1759-1805)의 시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에서 따왔다. 베토벤의 ‘합창’이 초연된 게 1824년이니까 실러부터 시작해 무려 250년에 달하는 역사가 공연에 점철돼 있는 셈이다. 영화 중에 지난 두 세기 동안 인류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왔는지 심도 있게 알려주는 대목이 판화로 나오는데, 찍어낸 그림들은 하나같이 인간이 저지른 폭력을 담고 있다.
영화 ‘댄싱 베토벤’ 스틸/사진제공=마노엔터테인먼트

실러는 자신의 작품에서 형제애, 나아가 인류애를 이야기했다. “모든 인류는 형제다.” 과연 50주년 기념공연에서 실러의 이상과 베토벤의 9번 교향곡, 베자르의 안무를 한데 묶어 시대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또한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이 가치를 영상에 담아내야 하는 게 다큐멘터리 감독의 의무라는 점이다. 이를 위해 감독은 무용수들의 연습 과정도 자세히 그려내지만 그때그때 작품에 참여한 안무가들과 무용수들, 건축전문가와 문학평론가, 역사가, 음악평론가들, 지휘자, 심지어 첼로 연주자의 입에서까지 이야기를 끌어낸다. 그 중 한 사람, 안무가 표트리 나르델리의 말을 들어보자.

“베자르는 모든 인류가 선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이 공연을 만들었습니다. 그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이 공연을 최대한 잘 만들고 싶습니다.”완성도 높은 공연을 위해 실제로 다양한 국가와 인종이 참여한다. 인도, 일본, 스위스, 러시아, 아프리카 나라들, 남미 국가들에서 온 사람들 등등. 그 중에는 자기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이도 있지만 단지 엑스트라로 참여한 이도 있다. 아무튼 이렇게 전 세계인이 모여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다. 다양성 안에 통일성, 통일성 안에서 다양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예술 작품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의 목적은 사실을 얼마나 여과 없이 보여주는지가 아니라 작품에 담긴 철학을 얼마나 잘 파악해 화면으로 옮기는지에 있다. 인류는 스스로 창조를 하고 파괴도 한다. ‘아름다움’이 이런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수 없을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만일 아름다움이 없다면 인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재능과 헌신으로 만들어낸 예술 작품은 마치 대성당처럼 우뚝 솟아 인류에게 긍정적인 본보기가 된다. 베자르가 말한다. “희망은 언제나 승리합니다.”

로잔의 중심지에는 거대한 고딕 양식의 성당이 있다. 고딕 성당의 전면 위쪽에는 색유리로 만든 ‘장미창’이 있는데 이곳으로 들어오는 형형색색의 빛은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하느님의 시선을 인간도 공유하는 셈이다. 로잔 대성당의 아름다운 장미창에는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 있다. 50주년 기념 공연의 바닥에 이와 똑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서 춤 공연이 이루어진다. 독무, 2인무, 군무 등이 화려하게, 또한 질서를 갖춰 무대에서 표현된다. 마치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을 무시하듯이…

‘댄싱 베토벤’의 백미는 무용 연습 과정과 실제 공연의 모습을 선택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 그래야 작품에 담긴 철학을 적절하게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생동감 넘치는 무대를 언어로 표현하기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영화를 직접 보시기 바란다.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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