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작가]
뒤돌아보면, 1980년대의 서울은 지금의 시골과 닮기도 했다. 심지어는 지금의 시골에서도 누릴 수 없는,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 아래를 달리던 더없이 행복한 기억마저 있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놀아도 놀아도 놀 거리가 마구 생각이 났으니까. 같은 놀이에도 쉬이 물리지 않았다. 친한 아이와 노는 것이 아니라, 놀 수 있는 아이면 누구와도 친구가 됐다. 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누구와 무엇으로도 놀 수 있던 시절이었다.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잊고 지내던 놀이의 즐거움을 일깨웠다. 다큐멘터리가 덜 익숙한 사람에게도 충분하고 명쾌한 서사로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혼자서 품지 말고 나누어야 할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아직 극장에서 상영 중이니 충분히 나눌 수 있다.
애니메이션으로 공동 감독인 바르다와 제이알(JR)의 모습이 등장하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그들의 발걸음 아래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주르륵 뜬다. 마지막 이름까지 올라가면 ‘모두 고마워요!’라는 자막으로 마무리 된다. 보통 영화의 끝에 등장하는 고마운 이들의 이름이 첫 화면을 차지해서 의아했으나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완벽하게 이해가 됐다. 그들은 고마운 사람도 맞지만 사진벽화의 모델이고, 작품의 배우이기도 하니 앞자리가 그들의 자리였다.
영화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와 사진작가인 제이알은 포토트럭을 타고, 도시가 아니라 시골을 향해 즉흥적인 모험을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이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크게 출력하여 벽화로 완성하는 작업을 한다. 데스칼, 셰랑스, 피루 플라주 해변, 노르망디, 르 아브르 항구 등 프랑스 곳곳을 누비며 자신들의 생각과 장난을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한다.바르다의 말처럼 얼굴마다 사연이 있었다. 철거될 광산촌의 마지막 주민 자닌, 혁신적인 기계를 좋아하는 농부, 두 아이의 엄마지만 소녀처럼 수줍은 카페 여직원, 오래된 러브스토리의 고조부와 고조모, 외진 마을의 연결고리로 살아온 늙은 집배원, 소신 있는 농장주의 선택으로 뿔이 건재한 염소, 최소 생계 보장금으로 살지만 인생이라는 광활한 무대를 믿는 79세 노인 포니이, 항만 노동자인 남편 곁을 토템처럼 지키는 세 아내가 바로 그 서사의 주인공들이다.
염산공장의 통로 벽에는 서로를 향하는 것처럼 양 손을 올린 오전과 오후팀의 직원사진으로, 물탱크 외벽에는 시장의 매대에 있던 생선으로 벽화가 완성된다. 버려진 집들이 모여 있던 유령 마을은 사람들의 얼굴 사진으로 채워진다. 그렇게 사진벽화는 활력을 불어넣는다. 해변에 떨어진, 전쟁 때 독일군의 토치카로 사용된 벙커에는 가장 공을 들여 사진을 붙였건만 이튿날 밀물에 씻기는 일도 겪는다. 바르다와 제이알은 그 또한 흔쾌히 받아들인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포토트럭이 아니라 기차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집이다. 바르다의 영화에 출연했던 화면과 말로만 언급되던 그를 진짜 만나는지는 보는 이의 몫으로 남기겠다. 더불어 종종 장 뤽 고다르를 연상시켰던 제이알이 바르다의 핀잔에도 꿋꿋이 사수했던 선글라스를 포기하는 순간이 도래하는지도.나는 바르다가 좋다. 처음에는 털 비니인 줄로만 알았던 투톤 헤어스타일은 그녀만의 시그니처다. 자신의 주름진 눈, 손, 발을 사진 모델로 내어주는 순간에도 망설임이 없다. 르 아브르 항구로 가는 길에 제2차 세계대전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소녀와도 같다. 꽤 근사한 OST로 들렸다. 그녀의 말은 순수하고, 사려 깊고, 위트가 넘치며 무엇보다 여운이 있다.
나는 제이알이 좋다. 그는 어릴 적 할머니들은 자신을 키우고, 자신은 할머니들을 지켰다고 했다. 그의 카메라는 지금도 노인들 곁을 지킨다. 바르다의 눈과 손, 발을 찍은 사진을 기차에 붙이고 그녀가 가지 못한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했을 때 사진 너머 그의 시점에 새삼 탄복했다. 그의 사진은 순수하고, 사려 깊고, 위트가 넘치며 무엇보다 여운이 있다.
이 둘의 나이는 33과 88, 숫자로만 봐도 재미있는 조합이다. 숫자 33의 반쪽이 채워지면 88이 아니던가. 서로가 있어서 더 완벽했던 그들의 협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들이 사진으로 담은 사람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웃음이 번지기도 하고, 경이로움이나 자부심 이상의 것을 느끼기도 했다. 바르다와 제이알이 바랐던 것처럼 놀이와 추억으로 공감했다.어릴 적 절로 탄식이 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찔끔 눈물이 나기도 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금 놀고 싶어졌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끝났음에도 쉬이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광산촌의 마지막을 지키는 자닌은 광부였던 아버지가 탄광에 도시락으로 싸갔다가 남겨온 빵을 ‘알루에트’라고 불렀는데, 때가 탄 빵 조각에서 각별한 맛이 난다고 했다. 그 맛이 그려졌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사진벽화들도 공간과 어우러져 각별한 맛이 우러나기 때문이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작가 박미영은 영화 ‘하루’ ‘빙우’ ‘허브’의 시나리오,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의 극본,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의 동화를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입문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 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컷
흔치 않은 꽃이나 풀, 나무를 보고는 나에게 이름을 묻는 지인들이 종종 있다. 구성진 사투리를 쓰지도 않는데 적어도 서울이 고향은 아닌 사람으로 비치나 보다. 태어나서 30년 이상을 서울을 배경으로 살았음에도 말이다.뒤돌아보면, 1980년대의 서울은 지금의 시골과 닮기도 했다. 심지어는 지금의 시골에서도 누릴 수 없는,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 아래를 달리던 더없이 행복한 기억마저 있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놀아도 놀아도 놀 거리가 마구 생각이 났으니까. 같은 놀이에도 쉬이 물리지 않았다. 친한 아이와 노는 것이 아니라, 놀 수 있는 아이면 누구와도 친구가 됐다. 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누구와 무엇으로도 놀 수 있던 시절이었다.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잊고 지내던 놀이의 즐거움을 일깨웠다. 다큐멘터리가 덜 익숙한 사람에게도 충분하고 명쾌한 서사로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혼자서 품지 말고 나누어야 할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아직 극장에서 상영 중이니 충분히 나눌 수 있다.
애니메이션으로 공동 감독인 바르다와 제이알(JR)의 모습이 등장하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그들의 발걸음 아래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주르륵 뜬다. 마지막 이름까지 올라가면 ‘모두 고마워요!’라는 자막으로 마무리 된다. 보통 영화의 끝에 등장하는 고마운 이들의 이름이 첫 화면을 차지해서 의아했으나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완벽하게 이해가 됐다. 그들은 고마운 사람도 맞지만 사진벽화의 모델이고, 작품의 배우이기도 하니 앞자리가 그들의 자리였다.
영화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와 사진작가인 제이알은 포토트럭을 타고, 도시가 아니라 시골을 향해 즉흥적인 모험을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이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크게 출력하여 벽화로 완성하는 작업을 한다. 데스칼, 셰랑스, 피루 플라주 해변, 노르망디, 르 아브르 항구 등 프랑스 곳곳을 누비며 자신들의 생각과 장난을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한다.바르다의 말처럼 얼굴마다 사연이 있었다. 철거될 광산촌의 마지막 주민 자닌, 혁신적인 기계를 좋아하는 농부, 두 아이의 엄마지만 소녀처럼 수줍은 카페 여직원, 오래된 러브스토리의 고조부와 고조모, 외진 마을의 연결고리로 살아온 늙은 집배원, 소신 있는 농장주의 선택으로 뿔이 건재한 염소, 최소 생계 보장금으로 살지만 인생이라는 광활한 무대를 믿는 79세 노인 포니이, 항만 노동자인 남편 곁을 토템처럼 지키는 세 아내가 바로 그 서사의 주인공들이다.
염산공장의 통로 벽에는 서로를 향하는 것처럼 양 손을 올린 오전과 오후팀의 직원사진으로, 물탱크 외벽에는 시장의 매대에 있던 생선으로 벽화가 완성된다. 버려진 집들이 모여 있던 유령 마을은 사람들의 얼굴 사진으로 채워진다. 그렇게 사진벽화는 활력을 불어넣는다. 해변에 떨어진, 전쟁 때 독일군의 토치카로 사용된 벙커에는 가장 공을 들여 사진을 붙였건만 이튿날 밀물에 씻기는 일도 겪는다. 바르다와 제이알은 그 또한 흔쾌히 받아들인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포토트럭이 아니라 기차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집이다. 바르다의 영화에 출연했던 화면과 말로만 언급되던 그를 진짜 만나는지는 보는 이의 몫으로 남기겠다. 더불어 종종 장 뤽 고다르를 연상시켰던 제이알이 바르다의 핀잔에도 꿋꿋이 사수했던 선글라스를 포기하는 순간이 도래하는지도.나는 바르다가 좋다. 처음에는 털 비니인 줄로만 알았던 투톤 헤어스타일은 그녀만의 시그니처다. 자신의 주름진 눈, 손, 발을 사진 모델로 내어주는 순간에도 망설임이 없다. 르 아브르 항구로 가는 길에 제2차 세계대전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소녀와도 같다. 꽤 근사한 OST로 들렸다. 그녀의 말은 순수하고, 사려 깊고, 위트가 넘치며 무엇보다 여운이 있다.
나는 제이알이 좋다. 그는 어릴 적 할머니들은 자신을 키우고, 자신은 할머니들을 지켰다고 했다. 그의 카메라는 지금도 노인들 곁을 지킨다. 바르다의 눈과 손, 발을 찍은 사진을 기차에 붙이고 그녀가 가지 못한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했을 때 사진 너머 그의 시점에 새삼 탄복했다. 그의 사진은 순수하고, 사려 깊고, 위트가 넘치며 무엇보다 여운이 있다.
이 둘의 나이는 33과 88, 숫자로만 봐도 재미있는 조합이다. 숫자 33의 반쪽이 채워지면 88이 아니던가. 서로가 있어서 더 완벽했던 그들의 협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들이 사진으로 담은 사람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웃음이 번지기도 하고, 경이로움이나 자부심 이상의 것을 느끼기도 했다. 바르다와 제이알이 바랐던 것처럼 놀이와 추억으로 공감했다.어릴 적 절로 탄식이 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찔끔 눈물이 나기도 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금 놀고 싶어졌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끝났음에도 쉬이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광산촌의 마지막을 지키는 자닌은 광부였던 아버지가 탄광에 도시락으로 싸갔다가 남겨온 빵을 ‘알루에트’라고 불렀는데, 때가 탄 빵 조각에서 각별한 맛이 난다고 했다. 그 맛이 그려졌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사진벽화들도 공간과 어우러져 각별한 맛이 우러나기 때문이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작가 박미영은 영화 ‘하루’ ‘빙우’ ‘허브’의 시나리오,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의 극본,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의 동화를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입문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 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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