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장진리 기자]

요행으로 너무도 빠르게 지어진 집은 모래성과 같아서 작은 비바람에도 쉽게 무너진다. 반면 벽돌 하나 하나 오랜 시간 공들여 쌓은 집은 거친 태풍에도 좀처럼 흔들림이 없다. 최성원은 그런 배우다. 요행도 없었지만, 요령 피울 줄도 모른다. 오늘의 성실한 최성원은 한 발짝 나아가 내일의 무엇이 될까. 오랜 시간 쌓은 내공이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한 지금, 최성원의 다가올 내일을 주목한다.

10. 그동안 많이 바빴겠다.
최성원: 내가 바쁘다기보다는 ‘응답하라 1988’이 바빴다(웃음). 촬영 스케줄이 워낙 빠듯하게 돌아갔으니까.10. 1988년의 노을이와 1994년의 노을이는 너무 달랐다. 오늘은 1994년의 노을이를 만난 기분이다.
최성원: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1988년 노을이 머리도 청담동 샵에서 2시간 반 걸려서 완성된 헤어다(웃음). 검은색으로 염색을 먼저 한 다음 새치 분장을 해서 드라마 속 노을이 헤어스타일을 완성했다. 새치는 신원호 감독님의 아이디어다. 칫솔로 만든 건데, 결과를 보고 감독님도 굉장히 흡족해 하셨다.

1988년의 노을이는 당시 사진을 보고 재현된 스타일이다. 처음엔 정말 이렇게 해도 되나 싶었다. 헤어 담당 팀장님께 사진을 보여드렸는데 충격이 크신 모양이더라. 그 당시 스타일 자체도 충격이지만, 본인이 습득하고 경험해서 얻은 것과는 정반대로 잘라야 하니까(웃음). 헤어샵이라는 곳은 예쁘고 멋있게 보이려고 가는 곳이지 않나. 그런데 자꾸 머리를 억지로 띄워야 하고, 더 촌스럽게 잘라야 하고, 반대로만 가야하니까 처음에는 꽤 애를 먹었다. 머리도 길게 유지해야 해서 자주 잘라줘야 했는데, 샵에 갈 때마다 자꾸 ‘언제 머리 바꾸냐’고 물어보시더라. 1994년으로 타임워프를 하면서 정말 신나게 머리를 해주셨다. 정말 너무 신나게(웃음).

10. 1994년 노을이의 파격 변신이 화제가 됐다. 특히 상의 탈의는 감독님이 일부러 넣어주신 것 같았다. 이미 ‘팬서비스’ 준비가 완벽히 되어있는 근육이 인상적이더라.
최성원: 넣어주신 건 맞다. 그렇게 벗길 원하셨던 건 아니었던 것 같지만(웃음). 게다가 故 장국영 배우의 맘보춤을 카피했는데 전혀 안 살았던 것 같다. 특히 그 상의 탈의신은 근육보다 제 알레르기가 더 화제가 된 것 같기도 하다(웃음). 평소에 피부가 굉장히 예민하고 알레르기가 심하다. 그 장면에서 입었던 ‘리(Lee)’ 맨투맨 티셔츠가 촬영을 위해 민무늬 티셔츠에 브랜드를 넣어서 특별히 제작을 한 건데, 안에 있는 털이 저랑 안 맞았는지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그런데 시청자 분들이 그걸 보시고 노을이가 카사노바가 된 게 아니냐고 하시더라(웃음). 화면을 보니 모기에 물린 것처럼 알레르기가 있어서 속상했다.대본에서 상의 탈의 장면이 있는 걸 보고 큰일났다 싶어서 밥도 이틀 정도 굶고, 집에서 홈 트레이닝을 했다. 헬스장 가봤자 어차피 샤워하는 시간이 더 길다(웃음). 평소에도 휴대전화에 어플리케이션을 깔아놓고 그대로 따라하는 편이다. 사실 나는 의지박약이고 게으름의 상징이다(웃음). 이번에 대본을 받고 처음 노출을 하다 보니 너무 불안해서 현장에서 계속 운동을 했다. 장비팀에 웨이트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구가 있어서 그걸 들고 계속 했다. 그래서 ‘신인류의 사랑’ 테이프를 꺼내는 장면을 찍을 때 손가락이 너무 떨리더라. 화면을 자세히 보시면 손가락이 떨릴 거다. 단지 테이프를 꺼낼 뿐인데 손을 떨고 있다. 왜일까(웃음).



10. 시간이 흘러 현재 노을이가 된 배우 우현의 등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최성원: 우현이 내게 오나봐, 노을이가 보여(웃음). 신원호 감독님이 예능 PD 출신이시라 예능감을 발휘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노을이가 늙어서도 노안이라는 설정은 저도 재밌었다. ‘노을이가 왜 노안이지? 어떤 사건이 있었나? 미백용품 이런 걸 잘못 썼나?’ 여러 가지 생각해 봤지만 결국 원인은 나오지 않았다. 44세에도 그 얼굴이라는 건 개그 포인트가 된 것 같아서 방송을 보고 나도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런데 94년에는 젊어졌기 때문에 ‘노을이가 갑자기 잘못됐나, 죽기라도 한 건가. 현재의 노을이는 지금의 노을이와 다른 사람인가’ 추측도 했다. 하지만 감히 노을이가 어떻게 그 치열하고 바쁜 현장의 감독님께, 굳이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웃음).10. 1994년의 노을이는 솔직히 멋있었다.
최성원: 기분 좋아져서 잘생김 연기를 했다(웃음). 7개월 만에 굉장히 정상적인 헤어스타일을 했기 때문에 정말 신나더라. 자신감이 생겼다. 분장팀도 굉장히 좋아했다. 옷도 정말 예뻤다. ‘어깨깡패’처럼 보이는 옷도 입어서 기분도 좋고 왠지 모를 자신감까지 들어서 당당해졌다. 성동일 선배님도 ‘이 놈, 이제 보니 잘 생겼네’라고 해주시더라. 그런 거에 흔들릴 분이 아니신데(웃음).

10. 곧 덕선이의 남편이 공개되겠지만, 노을이의 입장에서 솔직히 남편은 누구였으면 좋겠나.
최성원: (매우 단호하게)택이 형이다(웃음). 엉덩이 때리고 괴롭히는 형이 좋겠나, ‘노을아, 바나나 먹어’ 이러는 형이 좋겠나. 심지어 대회만 나가면 6~7천만 원 벌어오고, 돈까지 잘 꿔주는 매형이다(웃음). 당연히 택이 형이 좋다. 정환이 형네도 잘 살지만 비교가 안 된다.

하지만 최성원의 입장이라면 정환이 형이다.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가정에 충실할 수 있는 남자가 좋은 것 같다. 승부의 세계란 워낙 냉철한 곳이고 열에 한 번이라도 일이 우선일 수 있다. 누나가 평범한 직업을 가진 매형을 만났으면 좋겠다. 둘 중에는 그나마 정환이 형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건 최성원의 입장이다.10. 노을이의 사랑은 어떻게 된 건가.
최성원: 노을이는 한 번의 풋사랑으로 끝나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첫사랑일 수도 있고(웃음).



10.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응답하라 1988’에 캐스팅 됐을 때 어땠나. 워낙 인기 시리즈라 좋았겠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겠다.
최성원: 긴장감, 떨림, 그리고 설렘이었다.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은 있었지만 ‘내가 잘 해내야 된다’는 부담은 감히 없었다. 한 달 정도는 촬영장 가는 거 자체가 너무 긴장돼서 잠도 안 왔다. 내 걸 잘 해내자는 생각이 있었다. 부담감은 방송하기 직전에서야 조금씩 들더라. 내가 하는 연기를 정말 좋아할까. 왠지 안 되면 배우 탓인 것만 같고(웃음). 결과가 정반대라 다행일 뿐이다.10. 본인이 생각했던 노을이는 어떤 사람인가. 최성원이 생각한 대본 밖의 노을이가 궁금하다.
최성원: 집에서와 학교에서의 생활이 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생존본능을 위해 보호색으로 지내는 것뿐이지, 모자라거나 그런 애는 아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처럼 숫기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내가 정말 편한 애들이랑은 일일카페도 하고, 판치기 놀이도 하고, 평범하디 평범한 남학생. 공부하는 거 싫어하는데 못하고, 뚜렷한 꿈도 없고. 근데 우연한 기회에 전국노래자랑에 나가서 꿈을 찾았고, 그런데 여자친구는 또 만나고, 여자친구한테 담배 끊으라고도 얘기하고.

10. 드라마에서는 막내로 나왔지만 실제 나이로는 가장 오빠다. 실제도 형제나 남매가 있나.
최성원: 실제로는 외동이다. 그래서 노을이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류혜영, 혜리가 자매와의 싸움 이런 걸 너무 잘해버리니까 나도 모르게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내가 막내고, 우린 남매고 이런 것들을 세뇌시킬 필요가 전혀 없었다. 노을이가 다 자라고, 누나들도 취직을 다 하니까 이런 누나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들이 때리는 걸 막아낼 수도 있고(웃음). 사회 생활하면서 가족들,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다만 아직 결혼 생각은 없다. 일에 대한 성취감을 좀 더 맛보고 싶다.

10. 일에 대한 만족, 성취감을 느낀다면 어디서 느낄 수 있을까.
최성원: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막연하게 생각해 본다면 시상식이나 영화제, 이런 데 참석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20대 시절에 영화제를 보면서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지금 당장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쓰임새가 많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10. ‘응답하라 1988’에 캐스팅 됐을 때 그야말로 복권 당첨된 기분이었을 것 같다.
최성원: 기대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잘 다스리려고 했다. 감독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중이 적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캐스팅 당시부터 주체적인 에피소드보다는 영향을 주는 인물로 그려질 예정이라고 하셨다. 성동일 선배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착각하면 안 된다. 너희가 잘 해서 ‘응답하라’ 출연 전후가 바뀌는 게 아니다. ‘응답하라’ 자체가 잘 되는 거다. 거기에 취하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우리 직업의 숙명이고, 이 후광은 길어야 2~3개월이다. 사람들은 야속할 정도로 까먹을 것이고, ‘응답하라’ 같은 영화나 드라마는 또 나올 거라고. 내려놓는 일 자체는 힘든 일이지만 배워놓으려고 한다. 선배님들이 해주신 말씀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싶다. 사랑은 그 이후에 뒤따라오는 거겠지.



10. ‘응답하라’는 말 참 좋은 것 같다. 무엇인가 최성원에게 응답해 줬으면 하는 게 있다면.
최성원: 일적으로는 좀 더 저를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참여할 수 있는 작품이 많아졌으면 좋겠고, 오디션을 보고 함께 할 수 있는 작품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사실 이런 스케줄에 익숙하지 않다. 늘 규칙적으로 출근하고 퇴근했었는데 밀리기도 하고, 바뀌기도 하고, 이런 패턴에 빨리 적응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체력도 튼튼했으면 좋겠다. 사실 어제 일어나서 계속 못 자고 있다. 이런 것들이 이제 우습게 콧방귀 뀌면서 ‘기본 코스지’라고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웃음).

10. 힘들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하겠다.
최성원: 맞다. 피곤함의 뿌듯함이 있다. 성동일 선배님은 촬영 초반 때까지 정말 힘든 스케줄이었다. 영화 두세 개를 찍으면서 ‘응답하라 1988’을 같이 촬영하시는 상황이라 너무 많이 피곤하시죠, 여쭤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집에서 일 없어서 쉬는 게 피곤하지, 일 많아서 밖에서 일하는 게 피곤하냐고 하시더라. 언제 이렇게 다닐 수 있냐고, 메뚜기도 한철이지라고(웃음). 진짜 많이 배웠다. 신원호 감독님도 피부가 요즘 안 좋아진 것 같다고 하시길래 이런 힘든 스케줄이 처음이라 피부 트러블이 났다고 했더니, 계속 한철을 만들어야지 격려해주시더라.



10. 사담이지만 인터넷에서 본인의 짤방(짤림방지의 준말) 사진과 사진의 자막이 인기 있었던 사실을 혹시 알고 있나. ‘남자의 자격’ 출연 당시다.
최성원: (폭소) 정말 몰랐다. 모를, 정말 모를(웃음). 정말 모를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실버합창단 어르신들이 생글생글 웃으시면서 우리도 청춘이 있었다오, 이런 내용의 가사의 노래를 부르시는데 그 노랫말이 이상하게 너무 슬퍼서 정말 모를 눈물이 났다. 너무 창피해서 왜 우는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가렸다. 근데 무대는 보고 싶어서 손가락은 벌리고 있다(웃음).

10. 신원호 감독과는 ‘남자의 자격 합창단’으로 인연이 있다. 혹시 캐스팅에 플러스 점수가 있었던 것 아닌가.
최성원: ‘남자의 자격’ 때 예쁘게 보셨다면 ‘응답하라 1997’ 때 부르셨어야 하지 않나(웃음). 모를, 정말 모를(웃음). 이번에도 부르신 것도 아니고, 제가 오디션을 보러 갔다. 연락을 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남자의 자격’ 촬영 당시에도 1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날 수 있었는데 제가 낯가림이 정말 심해서 그 정도 만나서는 친해질 수가 없다(웃음). 오디션에서 5년 만에 감독님을 처음 만났다. 잘 살았냐,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냐 하시더라. 2차 오디션 끝나고 노래를 불렀는데 감독님이 네가 노래를 그렇게 소름끼칠 정도로 잘하는 건 아니잖아 하셔서 욕심이 났다. ‘홀로 된다는 것’을 불렀는데 기니까 사비만 불러봐, 하셔서 별 감흥은 없으셨구나(웃음). 오디션 갈 때도 제 나름대로는 꾸민다고 머리하고 갔는데 2차 때 또 만나게 된다면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셔서 2차 오디션 당시의 몰골은 노안에 가까웠다. 가장 찾기 쉬운 캐릭터일 줄 알았는데 가장 찾기 힘들었다고 하더라. 제 노안의 농도 정도가 적절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캐스팅이 된 것 같다.

10. 한철을 계속 만들 비장의 무기가 있다면.
최성원: 그럴 무기가 있다면 지금까지 아낄 이유가 없다. 전설의 명검처럼 1회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웃음). 남들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밋밋하다. 나는 늘 어정쩡의 아이콘이다. 잘 생기고 싶지만 성형은 죽었다 깨나도 하기 싫고(웃음). 늘 대학 시절부터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기본을 지키는 것밖에 없을 것 같았다. 더 빨리 와서 가장 나중에 연습실을 나가고, 누구보다 빨리 드라마 현장에 도착해서 내 일에 집중하는 게 내 무기다. 그래서 어떻게 꾸역꾸역 여기까지 왔다.

무기는 없지만 강력한 한 방은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내 인생은 요행이 없다. 행운이 없었다. 한 만큼 얻고, 한 만큼 벌고, 한 만큼 이룩하고.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보다(웃음).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으니 기다려야지. 완벽한 삶이 어디 있겠나(웃음).

장진리 기자 mari@
사진. 서예진 기자 yejin0214@, KBS2 ‘남자의 자격’ 방송 화면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