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김규리.

[텐아시아=황성운 기자] 약 10년 전,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당시에는 감독님의 모든 것을 다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6개월간 촬영장을 매일 나갔다. 절벽 끝에 선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작품에 임했다. 김규리는 ‘하류인생’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리고 ‘화장’으로 다시 임권택 감독과 재회했다. 시간의 흐름만큼 삶의 향도 짙어졌고, 연기 공력도 단단해졌다. 두 번째 만남에서 오는 약간의 여유까지 생겼다. 그런데 그건 자만이었다. 조금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차’ 싶었다는 게 그녀의 기억이다. 김규리는 이를 두고 ‘성장통’이라고 말했다. ‘하류인생’과 ‘화장’ 그리고 성장통을 그녀에게 직접 들었다.

Q. ‘화장’ 출연 계기부터 묻고 싶다. 2013년 부산영화제 오픈 공연에 올랐는데, 그게 ‘화장’ 출연으로 이어졌다고 들었다.
김규리 : 당시 부산영화제 개막 공연할 때 긴장을 많이 했다. 원래 댄스스포츠는 많이 해봐야 1분 40초 정도인데, 그날은 3분이 넘었다. 안무 받은 지도 얼마 안 됐고, 또 어떤 여배우가 부산영화제 개막공연을 할 수 있겠나. 그만큼의 영광은 있었다. 여하튼, 무대에서 안전장치 없이 끈을 잡고 올라갔다 내려오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그 순간 쥐가 났다. 근데 중간에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이를 꽉 물고 버텼다. 감독님이 그걸 보셨는데, 난 줄은 몰랐나 보더라. 나중에 김규리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에너지에 놀라셨다고 하더라. 그게 ‘화장’까지 연결됐다. ‘화장’에서도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나 밖에 생각이 안 나셨다고. 우연인데 필연이 된 거다. 마치 오랫동안 준비된. ‘댄싱 위드 더 스타’는 2011년, 부산영화제 개막공연은 2013년 그리고 ‘화장’은 2014년에 촬영했으니까.Q. 원작 소설은 영화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나.
김규리 :
워낙 유명한 작가고, 이게 어떻게 영화화될지 궁금했다. 더욱이 임권택 감독님이 하시고. 그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추은주 역할은 원작에서 두 장면 정도밖에 안 나온다. 오상무 시선에서 바라보는 모습인데, 그게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하기도 했다. 확실한 건 감독님이 영상화한 ‘화장’은 이야기가 다르다. 큰 흐름은 같지만, 풀어내는 방식이나 글 안에 녹아 있는 지혜 등은 감독님스럽게 나온 것 같다.

Q. ‘화장’을 보고 난 뒤 임권택 감독님이 김규리를 무척 아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예쁘게 그려졌더라. 그런 생각은 해 봤나.
김규리: 추은주는 그래야 하는 인물이다. 노골적이지 않게 매혹적이어야 했다. 무엇보다 아름다워야지 모든 이야기의 진정성이 생긴다. 그렇게 예쁘게 나와야 하는 캐릭터인데 왜 나한테 주셨지 했다. (웃음) 예쁘게 그려야 하는 캐릭터인데 (그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스태프들이 고생했겠나. 애쓰고, 공들여 만든 캐릭터다. 그래서 감사하고, 죄송하다.


‘화장’ 김규리
Q. 죄송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김규리 : 더 잘하고 싶었는데…. 내 장면만 나오면, 부끄러운 마음만 든다. 촬영 끝나고 지금까지 죄송한 마음을 들고 왔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감기가 안 떨어지더라. 심지어 무대 인사를 하는데 내 캐릭터 이름마저 잊어버렸다. 아마도 임권택 감독님 영화여서 그랬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한 게 아니라 조금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차’ 싶었다.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고, 뒤돌아보게 하더라. 영화를 찍으면서 내 심장에 화장을 많이 하고 다녔구나 생각했다. 오롯이 내 심장으로 생동감 있게 산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하나를 덧씌우고, 색깔을 입히려고 하고. ‘화장’을 찍으면서 심장에 색조화장 했던 걸 벗어내고 지워내야 한다는 걸 자각했다. 이 영화로 인해 방황도 하게 되고. 그보다 ‘성장통’이 정확할 것 같다.

Q. 극 중 추은주와 오상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나.
김규리 : 어떤 심장을 품어야 하는지가 첫 번째 질문이었다. 그 질문의 답을 금방 찾았는데 바로 존경심이었다. 극 중 회식 장면에서 안 선배가 연기하는 걸 봤는데, 촬영할 때나 안 할 때나 정말 멋진 분이더라. 그 모습을 보고 여자로서가 아니라 후배로서 존경심이 생겼다. 이게 혹시 추은주가 오상무를 대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존경심이라는 것도 결국은 사랑을 밑바탕에 두고 있다. 거기에 추은주를 맞췄다. 내가 안 선배를 대하는 시각으로, 오상무를 대하는 추은주를 해야겠다고.

Q. 근데 어느 하나로 규정하긴 어려울 것 같다. 존경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엔 유혹하는 것 같다.
김규리 : 그런 맥락의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근데 잘 생각해보면, 그건 철저하게 오상무 시선이고, 감독님의 시선이다. 내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극 중 오상무가 불렀는데 왜 종종걸음으로 가느냐고 하는데, 그 상황도 추은주의 시선이 아니라 오상무의 마음일 수 있는 거다. 영화에서 나는 오상무를 유혹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연기했다. 추은주가 적극적일 때가 딱 한 번 있다. 오상무 별장에 찾아갈 때인데, 그땐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열어두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Q. 생각해보니 그렇다. 추은주가 정말 예뻐 보이는 것도 오상무의 시선이겠다. 죽어가는 아내를 돌보는 오상무의 눈엔 젊은 에너지의 추은주가 더없이 예뻐 보였을 테니까.
김규리 : 시나리오를 보면서 오상무가 이해되기도 했다. 주변에서 보면 성공적인 중년인데, 내 몸은 늙어가고, 아내는 죽어가고.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희망이란 게 없을 것 같다. 자신도 지쳤을 것 같고. 그런데 너무 상반된 젊음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면 정신적 위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경우 있지 않나. 딱 요즘 같은 때인데, 너무 피곤해 있는데 길가에 핀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느낌 아니었을까.


‘화장’ 김규리.

Q. 안성기와 처음 호흡이다.
김규리 : 어느 배우든 처음 작업하면 긴장하게 된다. 첫 작품이 ‘여고괴담’인데, 그 이전에 안 선배와 기회가 닿을 뻔했다. 내 연기 인생의 처음을 안 선배와 했을 수도 있다. 당시엔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는데, 결국 그게 잘 안 됐다. 그러다가 이번 작품에서 인연이 됐다. 같이 하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어려운 감정 라인을 연기해야 함에도, 어쩌면 가장 예민했을 사람인데 다 포용해주셨다. 기회가 닿는다면 예민하지 않은, 편안한 모습을 현장에서 다시 보여드리고 싶다.Q. 임권택 감독과 두 번째 호흡이다. 그게 벌써 10년이 지났더라. 김규리의 눈에 비친 임권택 감독의 변화된 모습은 무엇이 있을까.
김규리 : 가장 첫 번째 물어보는 게 건강이다. 근데 깜짝 놀란 게 감독님이 ‘화장’ 때문에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으셨나 보더라. 부산 동서대에서 감독님과 GV를 했는데, 그렇게 말을 빨리하시는 거다. 그리고 정확하게. 깜짝 놀랐다. 내가 감기약 때문에 해롱해롱했다. 그런 감독님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힘을 받아왔다. 정확하게 12년 전인데 감독님은 에너지가 더 올라오셨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하다.

Q. 10년, 아니 12년 동안 김규리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김규리 : 너무 많지. 주름도 생겼고, 피부 탄력도. (웃음) 그래도 나의 하루를 내주고서 연륜이 쌓이는 거니까. 그때는 어떤 모습인지 기억 안 나지만, 향은 짙어지고 있는 것 같다.

Q.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류인생’의 김규리와 ‘화장’의 김규리는 비교한다면.
김규리 : 정확하게 기억하는 게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다. 그래서 ‘하류인생’의 김규리는 ‘여기 안 계셔도 정말 잘 지내고, 건강하게 촬영하면서 지낼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가 심장 안에 있었다. 그땐 모든 것을 잘 해내고 싶었다. 그땐 연기도 어수룩할 때니까. 감독님의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배우고 싶었고, 감독님의 말을 다 알아듣고 철썩같이 연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현장을 6개월간 매일 나갔다. 어머니 발인 다음 날이 크랭크인이었는데, 나오지 말라는데도 나갔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고, 그게 유일한 목표였다. 절벽 끝에 선 것처럼, 절벽에 한 손으로 매달려 있는 간절한 마음으로 했다. 반면 ‘화장’은 그동안 현장 경험도 쌓였고, 사람들도 겪어봤다. 그래서 여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다. (웃음) 겉모습보다 내면을 다시 바라보게끔 하는 뭔가가 있다. 어쩌면 ‘하류인생’을 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런 자세로 돌아갔을 수도 있고. 더욱이 두 번째 불러주신 거니까 더 잘하고 싶었고, 그래서 자신을 더 못살게 굴지 않았나 싶다. 정말 예쁘게 찍어주는 데, 그걸 즐겨도 됐을 텐데 말이다.
‘화장’ 김규리.

Q. 단순한 생각인데, 소위 상업영화 출연이 한참 전이더라. 스크린에 목마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김규리 : 목표는 연기를 잘하고 싶은 거다. 옛날에도, 지금도 그렇다. ‘어떤 것을 해야 잘 어울려’가 아니라 잘할 줄 아는 게 뭔지 찾으려 했다. 지금은 숨 좀 돌려야 할 것 같다. 관계자든, 대중이든 나한테 찾는 게 센 여자 혹은 진한 색깔인 것 같다. 시대별로 넘나들긴 했지만 그런 역할을 해왔다. 뭔가 꾸며야 하는 캐릭터였다. 그래서 다음 작품은 화장을 지울 수 있는, 안 해도 되는, 소탈한 내 모습을 다시 찾고 싶다. 그런 캐릭터, 작품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막연한 게 대중이, 만드는 사람이 그런 모습을 원할까 싶기도 하다.

Q. ‘미인도’란 작품이 김규리에게 큰 심경의 변화를 줬던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런 관점에서 ‘화장’을 짚어볼 수 있나.
김규리 : 나아가는 선상인 것 같다. ‘화장’으로 인해 뒤돌아봄이 있었고, 그 성장통의 계기를 마련해준 작품이다. 건강하게 견디고 넘어가면 튼튼하게 올라갈 것 같다. 성장통이라는 게 못 견디게 아프긴 한데 건강하게 견뎌내려고 한다.

Q, 또 김규리에게 ‘화장’은 어떤 의미일까. 영화 말고, 매일 하는 화장(化粧) 말이다.
김규리 : 화장을 하면 당연히 예쁘게 보인다. 그런데 나는 그냥 심장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주름 생기는 것도 견뎌서 안성기 선배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여배우한테 들이대는 잣대는 간혹 가혹하기도 하다. 인간적인 것을 원할까, 겉모습이 완벽한 걸 원할까. 나는 인간적인 게 더 좋다. 사람이니까. 화장을 지우고, 민낯이 드러나도 웃을 수 있는 소탈한 사람이 되고 싶다.

Q. 김민선에서 김규리로 개명한 지 한 5년쯤 되는 것 같다.
김규리 : 나는 나다. 어떻게 불리든 나는 그대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시에는 나부터 먼저 생각해야 했을 뿐이다. 깨달은 게 가장 나를 위하는 일이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어떤 사랑을 받고 어떤 사랑을 주겠나 싶었다. 내가 건강해야 사람한테 건강함을 알릴 수 있고, 같이 건강해질 수 있다. 아직도 민선이라고 부르시는 분들이 계신 데 당연하다. 중요한 건 둘 다 나다.

황성운 기자 jabongdo@
사진. 팽현준 기자 pangp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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