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티스트’ 스틸 이미지

‘아티스트’의 춤추는 신바람녀 베조가 이혼과 결혼을 반복하는 마리로 찾아온다. 그녀의 슬픔과 번민 속에서 빛나는 ‘배우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떡잎부터 남다른 연기자가 있는 반면, 도저히 스타가 될 것처럼 보이지 않는 여배우도 있기 마련이다. 조금 잔인하게 내뱉자면, 아무리 좋게 보려고 애를 써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 배우가 있다. 개인적으로, 베레니스 베조가 그런 경우였다. 월드컵에서의 우승 확률이 1/400쯤 되는 축구팀처럼 전혀 기대가 되지 않았다. 이를 테면 그녀는 샹탈 애커만의 ‘갇힌 여인’(2000)에서 단역 사라로 등장하지만, 오직 실비 테스튀(아리안느 역)에 집중하느라 그녀가 어디서 나왔는지 기억도 못한다. 굳이 그녀를 찾기 위해 방구석에 쌓여 있는 DVD를 다시 꺼내서 또 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나마 기억에 남은 것은 ‘기사 윌리엄’(2001)이었다. 히스 레저가 반한 샤닌 소세이먼(조슬린 아가씨 역)의 시녀로 등장했다. 히스에게 샤닌의 손수건을 건네주는 작은 역할인데, 여자 대장장이로 나온 로라 프레이저보다도 존재감이 없었다. 평생 주연과는 인연이 없어 보일 정도로 지극히 평범했다. 어쨌든 이 영화가 그녀의 할리우드 데뷔작이었다. 아마도 결정타는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의 ‘OSS 117: 카이로-스파이의 둥지’(2006)였던 것 같다. 이 영화를 계기로 베조는 감독과 아이까지 낳고 가족을 꾸리는 의외의 성과를 얻었지만, 라미나 역할은 신물이 날 정도였다. 007시리즈를 프랑스식으로 재해석한 OSS 117 시리즈는 여러모로 패러디를 남용하지만, 상한 굴을 먹은 것처럼 느끼한 탓에 ‘오스틴 파워’ 시리즈 같은 재미를 주지는 못한다.
영화 ‘OSS 117: 카이로-스파이의 둥지’ 스틸 이미지

여기서 그녀의 역할은 본드 걸과 유사하다. 엔딩에서 란제리 차림으로 어설픈 격투기를 펼치다가 불필요한 수영을 잠시 즐긴 후에, 촉촉이 젖은 머리와 몸으로 위베르(장 뒤자르댕)와 뻔하게 키스를 한다. 몇 줄만 설명을 해도 짜증이 밀려올 정도로 진부하다. 어떤 특별함도 찾을 수 없는 탓에, 편견만 더욱 심해졌다. 베레니스 베조는 아르헨티나 영화감독 미구엘 베조의 딸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파리로 이주해서 1990년대에 TV시리즈에 출연하면서 배우의 꿈을 키웠다. 아! 불혹의 나이를 코앞에 둔 1976년생이니, 세계적으로 주목받는데 참 오랜 시간에 걸린 셈이다.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탓에, 2000년대 그녀의 연기를 정확히 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녀의 이름을 알린 것은 그녀의 남편이 연출한 ‘아티스트’(2011)였다. 2012년 아카데미를 정복한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황금시대(무성영화)를 복원했다. 무성영화의 대스타 조지(장 뒤자르댕)가 유성영화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잘 묘사했다. 30분이 지나면 영화 속의 사물에서 소리가 나고, 조지는 그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다. 반면 배우 지망생 페피(베레니스 베조)는 첫 등장부터 배우로 뽑히기 위해 신나게 춤을 추면서 윙크를 던진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인기를 모은 것은 최초의 유성영화가 등장한 1927년(‘재즈 싱어’의 출현)이후다. 그리고 마치 찰리 채플린의 영화처럼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가 펼쳐진다. 입에 권총을 넣고 자살을 시도하는 조지(장 뒤자르댕)에게 달려간 그녀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품에 안기는 장면을 보면서, 처음으로 베조가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 ‘아티스트’ 스틸 이미지
베조는 말 못하는 뒤자르댕과 춤(탭 댄스)을 추면서 뮤지컬 시대를 연다. 마치 ‘스윙 타임’(1936)의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존 굿맨이 “퍼펙트. 뷰티풀!”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무척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의 힘이지, 배우 베조의 힘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의 차기작 ‘사랑은 타이핑 중!’(2012)을 특히 눈 여겨 봤다. 안타깝지만, 이 영화는 전적으로 로즈 역의 데보라 프랑소와의 것이었다. 베조는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핑 치는 그녀의 실력을 향상시키고자 피아노를 가르쳐 주는 마리 역할로 나온다. 배역이 너무 작아서 로망 뒤리스와의 뜨거운 관계를 복원할 만한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베조에게 재발견이란 단어를 쓸 수 있는 진짜 영화는 두 번째 마리로 나온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였다.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스틸 이미지

그녀는 여기서 아마드와 4년째 별거 중인 여인으로, 사실상 3번째 결혼을 하기 위해 전 남편을 부른다. 아이러니하게 그녀의 집에는 전 남편들의 아이들, 전 남편, 그리고 결혼을 앞둔 연인 사미르와 그의 아이가 모두 한자리에서 모인다. 그리고 사미르의 아내(자살과 혼수상태)에 대한 진실공방이 오가면서 그녀는 신경쇠약 직전까지 내몰린다. 참으로 꼬이고 꼬인 갈등 상황에서 그녀는 과거를 잊고 새출발을 하고 싶지만, 사실상 과거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것이 그녀의 운명이기도 하다. 소리를 지르고 불 같이 화를 내는 것보다는 다소 이기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행복을 갈망하는 그녀의 호흡이 훨씬 인상적이다. 그녀의 혼란을 보고 있으면 ‘더 패스트(과거)’라는 영문 제목보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제목이 더 설득력이 있다. 분명, 그녀는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배우가 아니다.

글. 전종혁 대중문화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이은아 domino@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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