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워커. ‘분노의 질주’ 시리즈 속에서 그는 다치기 일쑤였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구르고 쫓기고.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서 늘, 불사조처럼 살아 돌아왔다. ‘분노의 질주’의 ‘브라이언 오코너’는 폴 워커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지난달 30일. 폴 워커는 LA북부에 위치한 산타 클라리타에서 친구가 모는 포르쉐를 타고 가던 중 차량이 도로 가로수에 부딪히는 사고로 사망했다. 기적은 없었다. 신은 비정하게도 폴 워커를 그 자리에서 앗아갔다. 폴 워커의 죽음으로 그가 주연으로 참여중인 ‘분노의 질주 7’ 촬영은 무기한 중단된 상태다. 지금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폴 워커의 촬영 분을 폐기하고 새로 찍느냐, 아니면 남은 분량을 대역캐스팅을 통해 소화하느냐. 폴 워커처럼 촬영 도중 주연 배우가 사망할 경우, 작품의 운명은 위태위태하게 흔들린다. 그래서 살펴봤다. 미완의 작품을 남기고 떠난 배우와 그 작품의 운명을.

1. 히스레저 (1979-2008)
조커(히스 레저)는 말했다. “언젠가 다시 또 보게 될 거야.” 하지만 그의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2008년 AP통신이 선정한 ‘올해의 엔터테인먼트 뉴스’는 ‘히스레저 사망’이었다. ‘브로크백 마운틴’ 등을 통해 인상 깊은 연기력을 보여줬던 젊은 배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만큼 충격이었고, 슬픔이었고, 아쉬움이었다. 히스레저를 죽음으로 초대한 요인은 약물과다복용. 자신의 아파트 침대에서 숨진 채 발견된 히스레저의 몸에는 불면증과 불안함을 이겨내기 위해 의지했던 약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크나이트’의 조커로 전 세계 영화팬을 고무시킨 그는 정작 자기 인생 절정의 연기를 극장에서 확인하지 못하고 그렇게 떠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직격탄을 맞은 건 촬영이 한창이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이었다. 하지만 팬들의 그의 모습을 영화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랬고, 감독 테리 길리엄 역시 영화가 완성되길 희망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을 완성시킨 것은 그의 동료들. 조니 뎁과 주드 로, 콜린 패럴은 자신들의 영화일정을 미뤄가면서까지 번갈아 가며 고인의 배역을 대신 소화했다. 1분 1초가 돈의 가치로 환산되는 쇼비지니스 세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우정이었다.
히스 레저의 유산: 2007년 헤어진 미셸 윌리엄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마틸다.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우리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다시 한 번 희대의 조커를 만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아마, 영화는 보다 흥미로웠을 게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가장 큰 적은 조커의 빈자리였음을 우리는 확인하지 않았던가.

2. 리버 피닉스(1970-1993)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없는 ‘토탈 이클립스’를 상상할 수 있을까? 레오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왜? 원래 시인 랭보는 (레오와 최고의 미모를 겨루던,) 당대의 꽃미남 리버 피닉스가 맡기로 돼 있었으니까. 그러니 리버 피닉스가 출연했어도 뇌쇄적 매력의 랭보는 탄생했으리라. 그의 출연을 막은 것은 안타깝게도 죽음이었다. 기면발작증으로 길에 픽픽 쓰러지던 ‘아이다호’ 마이크(리버 피닉스)의 모습이 이랬을까. 1993년 10월 31일. 리버 피닉스는 조니 뎁이 운영하는 술집 바이퍼룸 앞에서 쓰러져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물 셋. 꽃 같은 이 남자를 데려간 것 역시 약물(헤로인과 코카인)이었다.
당시 리버 피닉스는: 조지 슬루저 감독의 ‘어두운 피’ 촬영 중에 있었다. 리버 피닉스의 죽음으로 필름은 갈 길을 잃었다. 애초에 리버 피닉스가 없으면 무의미한 영화였으므로 대역을 내세운 재촬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18년 후, 감독은 먼지 쌓인 필름을 꺼내 영화를 재편집한다. 리버 피닉스의 친동생 호아킨 피닉스의 더빙이 더해진 영화는 뒤늦게 당도했고, 그 속에서 리버 피닉스는 신화 속의 미소년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세 명의 꽃미남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을 게다.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의 만남으로 화제가 됐던 이 영화에는 리버 피닉스도 (크리스천 슬레이터가 연기한 역으로) 출연이 예정이 돼 있었으니 말이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리버 피닉스가 죽은 후 ‘Jesus Don’t Want Me for a Sunbeam’라는 곡을 그에게 바쳤다. 하지만 커트 코베인 역시 약물로 세상을 떠났다.
‘리버 피닉스’의 리버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 나오는 ‘생명의 강’(River of Life)에서 영감을 얻어 지어졌다. 리버 피닉스는 떠났지만, 그의 강은 아직도 흐른다.3. 이소룡(브루스 리 1940~1973)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동양배우. 동양사람들은 이소룡에게 어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다. 동양남자는 약하고 ‘찌질하다’는 인식에 대혁명을 일으킨 것은 이소룡의 무쇠팔, 무쇠 다리, 로케트 주먹이었으니까. 그의 배를 선명하게 가르는 일명 ‘초콜렛 복근’은 서양인들에게도 섹시하게 어필됐다. 이소룡이 즐겨쓰던 쌍절곤은 애플의 사과마냥 강한 남자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불사조 같은 남자의 마지막은 너무나 허무했다. 1973년 7월 20일, 그는 여배우 딩페이의 집에서 35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약물 과다복용설, 심장마비설, 타살설 심지어 복상사설 등 수많은 루머들이 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룡은 여전히 액션 아이콘으로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이소룡이 당시 촬영 중이던 영화: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사망유희’. 제작진은 영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소룡 대역을 대대적으로 공모했는데, 흥미롭게도 캐스팅 된 배우가 (그와 닮은) 부산 출신의 한국배우 김태정이었다.
이소룡의 진중한 한 마디: “목표의 도달은 종점이 아니라 기점인 것이다.”
이소룡의 결정적 한 마디: “아~뵤!”

4. 브랜든 리(1965-1993)
사람들은 리 가문의 저주라고 했다. 브루스 리가 떠나고 20년이 지난 1993년. 그의 아들 브랜든 리가 영화 촬영 중 비명횡사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사인은 어이없는 총기 오발사고. ‘크로우’를 찍던 브랜든 리는 공포탄이 아닌 실탄이 장착된 총에 맞아 비통하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가 잠들어있는 시애틀의 레이크뷰 묘지 옆에 안장됐다.
‘크로우’는: 살해당한 록 기타리스트가 살아 돌아와 복수극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극중 주인공 에릭이 까마귀의 도움으로 환생했다면, 브랜든 리의 환생을 도운 것은 CG였다. 제작사 미라맥스는 컴퓨터 그래픽의 힘을 빌려 브랜든 리를 살려내는데, 1천 만 달러의 예산이 투입돼 만들어진 CG의 완성도는 놀라웠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 속 브랜든 리의 모습은 완벽했다. 영화는 비록 흥행에 실패했지만 그의 모습은 ‘크로우’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중이다.

5. 제임스 딘(1931-1955)
‘청춘의 아이콘’ ‘반항의 표상’이라는 수식어의 원조 중의 원조. ‘제임스 딘’이 ‘에덴의 동쪽’을 찍은 것은 1954년. 이후 1년 동안 ‘이유 없는 반항’ ‘자이언트’에 연이어 출연한 그는 두 영화가 공개되기도 전에 비운의 사건을 만난다. 1955년 9월 30일. 로스앤젤레스 근교 466번과 41번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제임스 딘을 태운 포르쉐가 굉음을 내며 폭발한다. 그렇게 제임스 딘은 가장 아름답게 만개했을 때, 찰나의 감동을 선사하고는 낙화했다. 벚꽃처럼. 그렇게. 영원히. 그리고 전설이 됐다.
그가 떠난 날은: ‘자이언트’의 촬영 마지막 날이었다. 모든 촬영 분을 소화하고 떠났으니 엄밀히 따지면 그에게 미완의 작품은 없다. 하지만 혜성 같이 등장해 일찍이 떠나며 ‘불멸의 존재’가 됐으니, 우리에게 그는 끝나지 않은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폴 뉴먼의 진가는 뒤늦게 발휘됐을지 모른다. 제임스 딘의 죽음으로 그가 출연하기로 했던 ‘상처뿐인 영광’은 무명에 가까운 폴 뉴먼에게 돌아갔는데, 폴 뉴먼은 이 영화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제임스 딘의 명언: “빨리 살고, 일찍 죽는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남긴다.”

6. 변영훈(1966-1993)
미완의 작품을 남기고 간 비운의 스타는 한국에도 있다. 1993년 영화 ‘남자 위의 여자’ 촬영 중 헬기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변영훈이 그 주인공이다. 1992년 MBC 미니시리즈 ‘분노의 왕국’으로 주목받은 변영훈에게 ‘남자 위에 여자’는 영화 데뷔작이기도 했다. 신은 그에게 너무나 짧은 시간의 행복만을 허용한 게 아닌지.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비상:이 걸린 건, KBS 드라마 ‘청춘극장’이었다. 제작진은 변영훈을 닮은 대역을 내세웠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아무리 분장과 조명의 힘을 빌린들, 변영훈이 아닌 이상 네티즌들의 눈을 속이기란 불가능했다. 대한민국 네티즌들이 얼마나 예리한데! 작품성이 크게 훼손된 ‘청춘극장’은 그렇게 조용히 종영했다.

글, 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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