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영화 ‘건축학 개론’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성공과 함께 불기 시작한 대중문화계 ‘추억 바람’은 올해도 이어졌다. 가요계에서는 조용필, 이문세 등 1980~90년대를 풍미한 가수들이 성공적인 컴백을 알린 데 이어 90년대 가요의 리메이크 바람이 이어졌고 영화계에서도는 ‘러브레터’ ‘터미네이터 2’ 등 90년대 인기 작품의 재개봉이 줄줄이 이뤄졌다. 브라운관에서는 MBC ‘일밤- 진짜 사나이’ 케이블TV tvN ‘푸른 거탑’ 등이 ‘군대 예능’이라고 칭해지며 군대 시절 추억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고 90년대 초반을 무대로 한 tvN ‘응답하라 1994’는 하반기 최고 히트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같은 ‘대중문화의 추억 소환’은 90년대 청년기를 보낸 지금의 30~40대들이 사회적으로 가장 활동이 왕성한 세대가 된 점과 무관치 않다. 여기에 계속된 경제 불황도 자연스레 ‘순수했던 그 시절’을 불러오는 데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올 한해 다양한 방면에서 추억을 소환한 대중문화의 면면을 되짚어봤다.
1. 영화 속 ‘그 때 그 물건’
2. 낡은 서랍 속의 필름2013년 극장가가 사랑한 단어는 단연 ‘재개봉’이다. 기획전 형식으로 추억의 영화들이 찾아오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재개봉이라는 이름을 건 명화들이 이처럼 줄줄이 소환된 적은 없었다. 이 정도면 재개봉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일종의 문화현상이고, 새로운 전략이다. 하나의 배급방식으로 자리매김 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재개봉 열풍의 진원지는 이와이 ?지의 ‘러브레터’다. 대한민국을 ‘오겡끼데스까’ 열풍으로 몰아넣었었던 ‘러브레터’가 다시 극장에 걸린 건, 지난 2월. 1995년 개봉 당시 극장과 비디오방에서 영화를 본 30~40대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손을 맞잡고 들어갔다가, 각자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극장문을 따로 빠져나오는 중년커플이 자주 목격됐다. 사랑을 ‘편지’가 아닌 ‘카톡’으로 전할 것 같은 10대들의 반응도 의외로 뜨거웠다. 10년 만에 재개봉한 ‘러브레터’에 전국 3만 9,000여 명이 응답했다. ‘러브레터’를 타고 불어 온 추억놀이는 잇따른 재개봉으로 이어졌다.
추억의 영화들이 귀환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었다. 필름을 디지털로 변환하는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은 기본!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불후의 명작 ‘시네마천국’, 버킷리스트 소재의 원조 격인 ‘노킹 온 헤븐스 도어’, 허진호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 대한민국 국가대표 영화로 자리매김한 ‘올드보이’ 등이 전보다 깨끗한 화질과 또렷해진 사운드로 관객을 만났다.‘레옹’ ‘그랑블루’ ‘터미네이터2’는 디렉터스컷으로 찾아왔다. ‘레옹’은 마틸다의 킬러수업, 레옹과 마틸다의 베드신 등 당시 심의기준에 의해 가위질 당한 장면들이 복원됐다. 1993년 110분 편집본이 개봉됐던 ‘그랑블루’는 오리지널 프랑스 버전인 168분 감독판으로 상영됐다. ‘터미네이터2’는 1991년 당시 공개되지 않았던 감독판 엔딩을 삽입해 관객을 유인했다. 픽사의 ‘몬스터 대학교’과 ‘니모를 찾아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은 3D라는 새 옷으로 완전히 갈아입은 경우다.
재개봉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최초개봉인 영화도 있다. 소피마르소의 ‘라붐’이 그렇다. 놀라워하는 게 당연하다. 수입사도 개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야 최초개봉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니,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가 싶기도 하다. ‘재개봉’에서 ‘최초개봉’으로 급하게 홍보문구를 바꿔단 영화는 ‘책받침 여신’ 소피마르소의 얼굴이 들어 간 책받침을 사은품으로 증정하며 호응을 얻었다. 책받침을 받으려고 영화를 보러간 남성들이 꽤 있었으니, ‘추억마케팅’의 성공사례로 오래도록 기억될 만하다. 왕가위 감독이 손수 내한, 홍보에 심혈을 기울인 ‘동사서독’은 최초개봉과 감독판 버전이 섞인 경우다. 왕가위 감독이 자신의 입맛에 맞춰 재편집을 한 작품은 그래서 ‘동사서독’이 아닌 ‘동사서독 리덕스’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다.
3. 복고열풍+저렴한 수입가+IPTV 등 부가판권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수입사와 배급사들이 잠들어 있던 필름의 판권 확보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뭘까. 복고열풍에 기인한 바가 크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수요가 많아도 수지타산이 안 맞으면 공급이 일어나지 않는 게 자본주의의 이치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는 추억을 넘어서는 경제학적 숫자 놀이가 있다. 일단 추억의 영화는 연식이 오래됐다는 점에서 신작들보다 수익가격이 낮다. 재개봉영화 수입가는 일반 외화(블록버스터 제외한) 수입가의 5분의 1 정도로 알려져 있다. 1만 5,000명에서 2만 명 정도면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다는 얘기다.홍보비도 매력적이다. 이미 명성을 얻은 작품들이다보니 마케팅 하기가 신작보다 수월하다. 마케팅이 영화 흥행을 좌우하는 요소로 급부상한 요즘, 돈이 없는 중소기업들로서는 부담 없는 선택지인 셈이다. 수입가와 홍보비가 낮은데도 불구하고 극장에서 수익을 내지 못했다?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IPTV와 디지털케이블 등 부가판권 시장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재개봉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추억의 영화들이 극장가에 몰리면서 신작영화들의 설 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그것이다. ‘추억 팔기’에 몰두하느라 영화사가 새로운 상품 개발을 등한시 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개봉 열풍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란 전망이 설득력을 얻는 건, 추억의 힘은 강하기 때문이다. 추억은 시공간을 초월해 지나간 사람과 사물을 여기 이곳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 보다 막강한 것이 어디 있을까.
글, 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1. 영화 속 ‘그 때 그 물건’
‘러브레터’ 도서대출카드
‘러브레터’ 도서대출카드: 지금은 바코드로 책을 인식하지만 예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면 ‘도서대출카드’를 작성했어야 했다. 대출자, 대출일자, 반납일자 등을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기록하는 도서대출카드를 보면, 이 책이 누구의 손을 거쳐 갔는지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혹은 짝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도서대출카드에서 발견했을 때의 동질감이란! ‘러브레터’에서 두 주인공을 이어준 매개체도 바로 이 도서대출카드였다. 하나의 목록에 나란히 적힌 이름, 그리고 카드 뒷면에 그려져 있던 소녀의 초상화. 도서대출카드는 로맨스의 다른 이름이었다.’8월의 크리스마스’ 코닥필름
‘8월의 크리스마스’ 코닥필름: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정원(한석규)의 사진관 곳곳에서 발견되는 반가운 얼굴은 바로 코닥필름이다. 코닥은 후지필름과 함께 1980-90년대 필름사진 시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자신들이 발명해 낸 디지털 카메라에 발목이 잡힐지. 지난 2012년 코닥은 디지털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온라인 사진 현상소들의 출몰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동네사진관 역시 ‘8월의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추억의 부스러기다.‘시네마극장’ 속 단관극장
‘시네마천국’ -단관극장: 인기 외화를 보기 위해 극장 앞에 줄을 선 사람들, 화공(畵工)이 붓으로 직접 그린 간판, 극장 매표소 앞에 붙여졌던 ‘전회 매진’ 안내문, 하얗게 비가 내리던 스크린, 암표상, 극장 앞 오징어를 파는 포장마차 등,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모습이다. 서울에 남아있던 마지막 단관 극장인 서대문 아트홀이 문을 닫을 건 지난 2012년. 1만 명의 어르신들이 극장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극장은 멀티플렉스 시대의 자본화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았다. 한국에 멀티플렉스가 상륙할 때 좌우명은 다양한 영화를 보여준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삶이 시작됐고, 사랑이 시작됐고, 인생이 있었던 ‘시네마 천국’은 어디로 간 것일까.2. 낡은 서랍 속의 필름2013년 극장가가 사랑한 단어는 단연 ‘재개봉’이다. 기획전 형식으로 추억의 영화들이 찾아오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재개봉이라는 이름을 건 명화들이 이처럼 줄줄이 소환된 적은 없었다. 이 정도면 재개봉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일종의 문화현상이고, 새로운 전략이다. 하나의 배급방식으로 자리매김 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재개봉 열풍의 진원지는 이와이 ?지의 ‘러브레터’다. 대한민국을 ‘오겡끼데스까’ 열풍으로 몰아넣었었던 ‘러브레터’가 다시 극장에 걸린 건, 지난 2월. 1995년 개봉 당시 극장과 비디오방에서 영화를 본 30~40대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손을 맞잡고 들어갔다가, 각자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극장문을 따로 빠져나오는 중년커플이 자주 목격됐다. 사랑을 ‘편지’가 아닌 ‘카톡’으로 전할 것 같은 10대들의 반응도 의외로 뜨거웠다. 10년 만에 재개봉한 ‘러브레터’에 전국 3만 9,000여 명이 응답했다. ‘러브레터’를 타고 불어 온 추억놀이는 잇따른 재개봉으로 이어졌다.
추억의 영화들이 귀환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었다. 필름을 디지털로 변환하는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은 기본!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불후의 명작 ‘시네마천국’, 버킷리스트 소재의 원조 격인 ‘노킹 온 헤븐스 도어’, 허진호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 대한민국 국가대표 영화로 자리매김한 ‘올드보이’ 등이 전보다 깨끗한 화질과 또렷해진 사운드로 관객을 만났다.‘레옹’ ‘그랑블루’ ‘터미네이터2’는 디렉터스컷으로 찾아왔다. ‘레옹’은 마틸다의 킬러수업, 레옹과 마틸다의 베드신 등 당시 심의기준에 의해 가위질 당한 장면들이 복원됐다. 1993년 110분 편집본이 개봉됐던 ‘그랑블루’는 오리지널 프랑스 버전인 168분 감독판으로 상영됐다. ‘터미네이터2’는 1991년 당시 공개되지 않았던 감독판 엔딩을 삽입해 관객을 유인했다. 픽사의 ‘몬스터 대학교’과 ‘니모를 찾아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은 3D라는 새 옷으로 완전히 갈아입은 경우다.
재개봉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최초개봉인 영화도 있다. 소피마르소의 ‘라붐’이 그렇다. 놀라워하는 게 당연하다. 수입사도 개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야 최초개봉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니,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가 싶기도 하다. ‘재개봉’에서 ‘최초개봉’으로 급하게 홍보문구를 바꿔단 영화는 ‘책받침 여신’ 소피마르소의 얼굴이 들어 간 책받침을 사은품으로 증정하며 호응을 얻었다. 책받침을 받으려고 영화를 보러간 남성들이 꽤 있었으니, ‘추억마케팅’의 성공사례로 오래도록 기억될 만하다. 왕가위 감독이 손수 내한, 홍보에 심혈을 기울인 ‘동사서독’은 최초개봉과 감독판 버전이 섞인 경우다. 왕가위 감독이 자신의 입맛에 맞춰 재편집을 한 작품은 그래서 ‘동사서독’이 아닌 ‘동사서독 리덕스’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다.
3. 복고열풍+저렴한 수입가+IPTV 등 부가판권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수입사와 배급사들이 잠들어 있던 필름의 판권 확보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뭘까. 복고열풍에 기인한 바가 크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수요가 많아도 수지타산이 안 맞으면 공급이 일어나지 않는 게 자본주의의 이치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는 추억을 넘어서는 경제학적 숫자 놀이가 있다. 일단 추억의 영화는 연식이 오래됐다는 점에서 신작들보다 수익가격이 낮다. 재개봉영화 수입가는 일반 외화(블록버스터 제외한) 수입가의 5분의 1 정도로 알려져 있다. 1만 5,000명에서 2만 명 정도면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다는 얘기다.홍보비도 매력적이다. 이미 명성을 얻은 작품들이다보니 마케팅 하기가 신작보다 수월하다. 마케팅이 영화 흥행을 좌우하는 요소로 급부상한 요즘, 돈이 없는 중소기업들로서는 부담 없는 선택지인 셈이다. 수입가와 홍보비가 낮은데도 불구하고 극장에서 수익을 내지 못했다?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IPTV와 디지털케이블 등 부가판권 시장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재개봉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추억의 영화들이 극장가에 몰리면서 신작영화들의 설 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그것이다. ‘추억 팔기’에 몰두하느라 영화사가 새로운 상품 개발을 등한시 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개봉 열풍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란 전망이 설득력을 얻는 건, 추억의 힘은 강하기 때문이다. 추억은 시공간을 초월해 지나간 사람과 사물을 여기 이곳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 보다 막강한 것이 어디 있을까.
글, 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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