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방학. 아리송한 이름이다. 가을에 방학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그런데 노래를 섬세하게 잘 만드는 남자와 귀에 감겨오는 독특한 음색으로 노래를 잘 부르는 여자가 만나 결성한 혼성듀엣 ‘가을방학’은 분명히 있다. 남자멤버 정바비는 1세대 모던록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원년 멤버 출신으로 현재 밴드 줄리아 하트, 바비빌의 멤버로도 활동하는 뛰어난 싱어송송라이터이고, 여자멤버 계피는 인디밴드로는 엄청난 팬덤을 구축한 혼성밴드 ‘브로콜리너마저’와 프로젝트 밴드 ‘우쿨렐레 피크닉’의 리드보컬리스트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감성 보컬리스트다. 두 사람은 서로가 상대방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이었다니 속된 표현으로 이보다 환상적인 찰떡궁합은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정바비와 계피의 만남은 시작부터 화제를 모았다. 가을방학의 정규 1집은 ‘취미는 사랑’,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속아도 꿈결’, ‘3×4′, ‘호흡과다’ 등의 노래가 무한 사랑을 받으며 인디음반으로는 경이적인 2만 장이 넘는 음반판매기록을 세웠다. 가을방학은 서로 다른 경력을 지닌 두 사람의 정체성으로 인해 ‘단발성 프로젝트 팀’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작업한 곡들을 자연스럽게 들려주는 정도로 생각했던 두 사람은 정규 2집을 기점으로 ‘가을방학’은 프로젝트 그룹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계피 역시 처음으로 전업 뮤지션으로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인터뷰를 앞두고 가을방학의 음반들을 다시 들었다. 수도 없이 들었던 1집은 몇 년 전에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난 반가운 기분이었고 봄에 나온 2집은 가을에 들으니 더 느낌이 좋았다. 칼럼을 쓰기위해 마치 심사위원의 마음으로 집중해 노래들을 듣다가 여지없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계피의 편안하고 달콤한 음색에 그만 무장해제 되어버렸다. 귀에 감겨오는 감칠맛 나는 그녀의 음색은 가히 신의 축복 수준이다. 여성의 뺨을 서너대 칠 정도로 섬세한 정바비의 가사와 탁월한 멜로디는 또 어떤가. 가을방학의 노래는 분석할 필요가 없는 우리를 위로해주는 노래들이다. 최근 소속사를 루오바팩토리에서 독립한 스팽글뮤직으로 옮긴 가을방학은 ‘첫사랑’, ‘낮잠열차’, ‘베스트 앨범은 사지 않아’ 등 신곡 3곡을 발표했다. 정규 2집 후 반년 만에 발표한 새로운 노래다. 역시나 계피의 음색에 얹혀 들려주는 정바비의 가사는 기발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절로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지난 4월 봄에 가을방학의 정규 2집이 나왔을 때, 인터뷰 여부를 고민했다. 낭만적인 가을 풍경과 어우러진 가을방학의 피처사진을 담고 싶었기에 꾹 참고 무려 7개월을 기다렸다. 11월 중순, 만추의 풍경이 근사한 서울 상암동 평화의 공원에서 계피와 정바비를 만나 피처사진을 촬영했고 긴 음악이야기를 나눴다. 결과는 대만족이지만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함께 음악을 시작한지 4년이나 되었기에 어쩌면 달콤 쌉싸름한 노래처럼 러브라인이 형성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은 두 사람을 만나자마자 한방에 날라 갔다. 친분이나 연애감정으로 맺어진 팀이 아닌 순수한 음악적 호감으로 맺어진 두 사람은 아직도 존칭을 쓸 정도로 서먹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로맨틱한 사진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었다.
지난 2008년 국내 최초로 인디뮤지션 사진집과 사진전에 소개할 뮤지션들의 공연사진 촬영을 위해 그랜드민트 페스티발을 취재했었다. 그때 내 취재 리스트에는 ‘브로콜리너마저’가 있었다. 음반으로만 들었던 ‘브로콜리너마저’의 리드보컬 계피의 노래를 직접 들은 것은 그때 올림픽공원 수변무대 공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5년이 지난 2013년 10월. 칼럼에 소개할 뮤지션들의 공연 사진을 담기 위해 다시 그민페에 갔다. 이번에도 내 취재 리스트에는 계피가 소속된 ‘가을방학’이 있었다. 메인무대에서 다시 들은 계피의 노래는 매력이 여전했다. 오프닝 멘트에서 그녀가 놀라운 말을 했다. 내가 취재하러 갔던 2008년 그랜드민트 페스티발 때 그녀는 정바비를 처음 만났단다. 그리고 인터뷰 때 우리 세 사람은 모두 9월에 태어났음도 알게 되었다. 묘한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다.두 사람은 서로 브로콜리너마저의 보컬 계피와 줄리아하트의 리더 정바비의 팬이었다고 한다. “2008년 그랜드민트 페스티발 때 주차장에서 바비 오빠와 우연하게 마주쳐 처음 인사를 했습니다. 나중에 코러스라도 도와드리겠다고 했지만 6-7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이 없더군요”(계피) “고1 때부터 휴식 없이 13년 정도 음악을 계속했더니 지치더군요. 그래서 1년 정도 기타를 잡지 않고 쉬었습니다. 쉬면서 음악이 아닌 다른 일을 해볼 생각이 들더군요. 연세대 인문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 노어노문학과을 전공했지만 헐렁하게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래서 음악 말고 유학을 떠나 사회과학 쪽 대학원 공부를 할까 고민했죠. 결국 다이제스트로 외무고시 공부를 1년 동안 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습니다. 페스티발은 팬 입장으로 갔는데 우연하게 좋아하는 계피를 만나 연락처를 주고받았습니다. 저는 계피에게 코러스를 시킬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결과적으로는 맞는 이야기 아닌가요. 코러스가 아닌 메인 보컬을 시켰으니(웃음).”(정바비)
외무고시 공부를 하며 음악을 중단했던 정바비는 다시 음악작업을 시작했다.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니 제가 활동하는 밴드 줄리아하트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남자후배와 작업을 하면서 계피가 생각이 나 제가 가볍게 데모 녹음을 제안하는 전화를 했습니다.”(정바비) 당시 브로콜리너마저를 탈퇴한 계피는 2009년 2월, 루오바팩토리에서 기획한 프로젝트 밴드 우쿨렐레 피크닉 1집에 참여했었다. “우클레레 피크닉 1집 녹음하고 나왔는데 한동안 연락도 없던 비비오빠가 5월쯤 진짜 전화를 해 깜짝 놀랐지만 기뻤습니다.”(계피) 다시 만난 두 사람은 2009년 여름, 데모 작업에 들어갔다.
첫 곡의 제목은 ‘가을방학’. 현실적이지 못한 아리송한 제목은 어떤 발상으로 작명했는지 궁금했다. “일본의 문예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쓴 ‘마음’이란 고전소설 비평에서 착안했죠. 소설은 한 여자를 두고 친한 후배와 주인공이 벌이는 삼각관계를 다룬 비극적인 내용입니다. 그녀에게 마음에 있다는 걸 모르다가 다른 남자가 구애를 하는 걸 보고 뒤늦게 자신도 좋아한다는 걸 깨닫죠. 남자를 속여 여자의 마음을 빼앗아 상대 남자가 자살을 한다는 소설에 대한 비평을 보면서 항상 원하는 마음은 와야 할 시점보다 늦게 와서 비극이 발생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을방학도 그런 마인드로 쓴 노래입니다.”(정바비) “자세하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가사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무기력한 패배주의적 정서는 이해를 했습니다. 그런 감성들을 분석하기 보단 흡수하면서 멜로디와 느낌을 노래했습니다.”(계피)
작업한 곡들이 예상보다 결과물이 좋았다. 기분 좋게 곡이 쌓여가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앨범제작에 합의했다. 팀 이름은 처음으로 작업했던 곡 제목 ‘가을방학’으로 정했다. “사람들은 가을방학을 프로젝트 팀이라 말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저희는 가장 프로젝트 팀이 아닌 거죠.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도 목적도 없이 시작했으니까요. 저는 그저 계피의 목소리로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곡이 몇 개 있어 ‘불러볼래요’ 라고 자연스럽게 제안했던 것뿐입니다.”(정바비) 정바비의 노래는 내러티브 형식이라 가사가 길다. 장문의 가사를 어떻게 다 외워서 노래를 하는지 궁금했다. “기본적으로 발표한 모든 노래의 가사를 다 외우지만 지금까지 발표한 30곡을 주크박스처럼 뽑아서 즉각적으로 완벽하게 부르긴 힘듭니다. 하지만 공연 때 부를 노래는 연습을 완벽하게 하기에 문제는 없습니다.”(계피)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명곡들은 하나 같이 가사가 단순한 공통점이 있다고 슬쩍 정바비를 자극해 보았다. “송라이터의 개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제 노래는 고저가 없는 작법이죠. 결국 오래 들을 수 있는 여지를 위해 내러티브에 치중하는데 팬들이 노래 가사를 외워서 따라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2집에서는 반영했습니다. ‘잘있지 말아요’가 그런 노래입니다.”(정바비) 길옥윤이 패티김과 혜은이를 위해, 이봉조가 현미를 위해, 이영훈이 이문세를 위해, 정태춘이 박은옥을 위해 곡을 썼듯 정바비도 계피만을 위한 곡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지 궁금했다. “계피의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좋은 음색이라 생각합니다. 평소에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의식적으로 계피만을 위한 노래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곡을 쓰지는 않습니다. 저는 다작을 하는 스타일인데 곡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과정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는 것 같아요. 의식적으로 사람들이 따라 부르게 곡을 만들려하면 어색하기에 자연스럽지 않은 노래는 오히려 작품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정바비)(part2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스팽글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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