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은 2007년 라이브클럽 바다비 공연
예나 지금이나 대중음악의 가장 뜨거운 소재는 사랑이다. 무차별로 양산되어 온 사랑타령은 대중가요의 질적 하락을 불러온 원흉이라는 비난을 받지만 무소불위의 위치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사랑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전 인류의 영원한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요즘 세대는 1926년에 발표된 윤심덕 ‘사의 찬미’가 노래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곧 죽음’이었던 그 시절의 비장한 정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일제강점기의 대중이 인스턴트식 사랑이 난무하는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사랑을 목도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처럼 사랑노래는 각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대중의 기호, 유행, 트렌드, 심지어 패션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한 시대상을 투영하며 진화해 왔다.데뷔 때부터 줄기차게 사랑의 정서를 음악적 화두로 삼아온 여성 싱어송라이터 오지은의 노래는 청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내밀하게 사랑의 정서를 터치하는 그녀의 음악은 달콤 말랑한 기존의 사랑노래들과는 멀찍한 간극을 둔다. 진부한 소재인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는 점에선 공통적이지만 오지은의 사랑노래가 차별적인 것은 사랑의 이면을 상투적이고 예쁘게 포장하기 보단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진솔하게 토해내기 때문이다.
2007년 홍대 라이브 클럽 바다비. 칙칙한 조명아래 통기타 한 대를 들고 무대에 오른 긴 생머리의 여가수를 처음 보았다. 이름은 오지은이라 했다. 외모와 분위기가 묘했다. 어색한 듯 멘트를 날리고 멋쩍게 웃으면서 노래했던 그녀의 모습은 여러모로 헷갈렸다. 예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분위기가 상큼하면서도 뭔가 칙칙하고 심오한 감성이 공존하는 것 같은 정체성을 규정하기가 힘든 독특한 신인 여가수였다. 분명한 것은 노래의 느낌이 신선해 생소한 신인 여가수의 데뷔앨범을 기꺼이 구입했던 기억이 삼삼하다.
솔직히 데뷔 시절 그녀의 비범함을 단숨에 눈치 챘지만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중요 여성 싱어송라이터로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성장을 거듭해 온 오지은은 최근 정규 3집 아니 자신의 세 번째 사랑이야기를 발표했다. 신작 앨범을 들어보니 자칫 앨범의 통일성을 해칠 우려가 있는 다양한 장르음악을 구사한다. 그런데 자신의 음악질감을 흔들리지 않고 유지하는 골이 깊어진 탄탄한 내공이 느껴졌다. 특히 곡 분위기에 따라 보컬 창법을 달리하는 팔색조의 가창능력에는 감탄이 절로 배어나왔다.
가을의 향기가 살짝 느껴지는 여름의 끝자락, 서울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오지은을 만났다. 장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경청한 그녀의 음악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진진했고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다채로운 이미지를 표현해 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꽤나 성장했다는 확신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사진촬영을 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질 않았다. “웃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워 그랬습니다. 저에게 웃는 모습은 친구와 기념사진 찍을 때나 가능한데 잘 모르는 사람이 렌즈로 나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는 요청하지 않으면 절대 웃지 않는 편입니다.”
오지은은 당당한 무대 매너와 당돌한 가사 때문에 까칠한 성품일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실제로 만나보니 당당한 것은 맞는데 개그 욕심이 넘쳐나는 유쾌 발랄한 성품이라 살짝 당황스러웠다. “무대 위에서 본 가수 오지은을 꿈꿨던 분들이 실제로 절 만나면 수다스럽고 약간 푼수 끼가 있는 모습에 깜짝 놀라거나 심지어 싫어하시는 분들도 많아요.(웃음)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누군가를 웃기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더라구요.”
오지은은 1981년 9월 20일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의 중산층 가정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치원 시절부터 공상을 많이 했던 아이였다. 당시 엄마는 저녁 9시만 되면 잠을 자라고 불을 껐지만 전래동화를 연상하며 이야기 한 편을 만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늘 많은 것에 위화감을 느끼고 살았다. “유치원 때 장기자랑에서 잘했다고 선생님이 독무대를 마련해주었는데 친한 아이가 나를 보는 표정이 싸늘해지는 걸 보며 우울했어요.”
오지은은 동요를 일렉트릭 기타로 들으며 풍족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대기업에 다녔던 아버지는 대학시절 자작곡을 썼던 분이고 음색이 좋았던 어머니는 평소에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같은 잔잔한 대중가요를 즐겨 불렀다. 연년생인 오빠가 넥스트 음반을 사면 오지은은 공일오비를 사는 식으로 서로 분담해서 음반을 샀다고 한다. “아버지가 음반수집가라 LP는 절대 만지면 안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어요. 유치원 때 스피커 밑에 까는 오석을 사러 아버지가 지방에 가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아버지가 아끼시는 앰프의 진공관을 뺐다 꼈다 하는 것이 재미있어 가지고 놀다가 혼나곤 했습니다.(웃음) 아버지 덕분에 저는 딥 퍼플부터 60-70년대 록음악을 LP로 들으면 성장했죠.”
초등학교 시절 독서를 즐겼던 그녀는 중학생이 되면서 록밴드 너바나의 음악에 광적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커트 코베인의 자살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재능 있고 맑은 영혼에다 아름다운 음악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권총 자살을 했는지 혼란스러웠어요. 특히 사람들이 너바나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까지 추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났습니다. 정작 뼈와 살을 갈아서 노래를 만든 사람은 행복하지 못해 자살을 했는데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가 만든 노래를 즐겁게 소비하는 걸 보고 나는 절대 불행의 구덩이에서 사람들이 얄팍하게 소비할 뭔가를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중2때부터 독학으로 기타를 치기 시작한 오지은은 음악에 대한 갈증이 증폭했다. 그래서 정보의 보고인 PC통신 나우누리의 메탈 체인 동호회에 아버지 아이디로 가입해 활동했다. 당시 자우림 김윤아, 노이즈가든 윤병주도 동호회 회원이었다. 노이즈가든 1집에 보컬 박건이 감사한 사람들 이름에 그녀의 닉네임 ‘계라니’를 기명한 이유다. 이후 동신 동호회 언니, 오빠들과 이름도 없는 메가데스, 메탈리카 카피밴드를 결성해 기타를 쳤지만 체계도 없이 혼자 기타를 배우다 그만두었다. “당시 아버지는 음악을 하면 성공하기도 힘들고 유혹당하기 쉽고 잡놈들이 많다고 생각해 기타를 치면 잘라 버린다고 반대를 했었습니다.”1996년 중3때 난생 처음 나간 소개팅을 통해 남자친구가 생겼다. 막 이성에 눈을 뜰 사춘기에 접어든 그녀는 이미 뮤지션으로서의 고통을 경험했다. “그때 서울대생 오빠들과 북유럽동화에 나오는 난장이 이름을 딴 4인조 럼플 스틸스킨(rumple stilskin)이란 밴드에서 처음으로 리드보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열심히는 하는데 목소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해 감정적으로 적나라하게 불러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내가 음악을 할 자격이 있는가 자괴감이 들더군요. 잔재주는 많은데 나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남을 흉내를 내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왠지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에게 혐오감까지 생겨났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정식 데뷔를 목표로 하는 5인조 밴드에 들어갔다. 합주는 시작했지만 밴드 이름까지는 정하지 못했다. 당시 멤버들은 보컬인 자신에게 가사를 쓰라고 했지만 어설픈 사회비판이 나올 것 같고, 남을 비판하는 건 무책임하고 얄팍한 짓이란 생각에 곡을 쓰지 못했다. 다시 자신은 음악을 할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의심이 생겼다. 부모님을 따라 부산에 내려간 그녀는 부산 중앙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혼자 상경해 역삼동에서 거주했다. 그녀가 대학진학을 한 것은 부모님이 “인정할만한 대학에 들어간다면 스스로 알아서 할 깜냥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니 증명하라”고 했기 때문. 오기가 생겨 열심히 공부해 고려대 서어서문학과에 진학했지만 곧 학사제적을 당했다. “대학에 합격해 다녀보니까 별로더군요. 그래서 학교에 나가지 않고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갔습니다.”
음악을 관둔다고 생각하니 잘해야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스트레스를 안겨주던 노래 부르기가 오히려 즐거워졌다. 일본에서 2년 정도 어학연수를 한 그녀는 한국 관련 일을 맡아 일본 패션잡지의 한국 특파원이 되어 25살까지 프리랜서 기자로 일했다. 또한 민생고 해결을 위해 3일 동안 자지도 않고 일본어 통역과 성인용 일본 문학만화 ‘커피 한잔 더’, ‘토성 맨션’을 번역하기도 했다. 오지은은 23살 때 일본에서 만난 한국남자와 1년 간 교제한 후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처음으로 사람에게 채였던 거죠. 그전까지 저는 오만했던 것 같아요. 사랑하는 감정이 식어 헤어지자는 남자의 변심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더군요.”(part2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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