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8년 만이다. 1995년 국내 개봉 시 편집됐던 23분 분량의 미공개분 영상을 담은 이 지난 11일 ‘디지털 리마스터링’판으로 재개봉했다. 한때 레옹 모자와 안경이 큰 인기를 끌었고, 각종 광고와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는 너 나할 것 없이 을 소재로 다뤘다. 그야말로 ‘레옹 신드롬’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와 오갈 데 없는 어린 ‘소녀’의 만남. 영화는 ‘단어’가 만들어낸 인물유형의 전형성을 타파했고, 현란한 조명과 인공적인 이미지로 창조된 영상미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이젠 명실 공히 고전으로 자리 잡은 , 재개봉을 맞이하여 그들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 본다.
레옹 역 장 르노(Jean Reno)
프랑스 대표 배우 장 르노는 에서 숨 막히는 액션신을 펼쳤다. 명불허전이었다. 하지만 전작의 성공이 부담으로 다가왔던 걸까. ‘프랑스 대표 배우’를 넘어 ‘세계적인 배우’의 대열에 올라섰지만, 그는 지난 18년간 부침을 겪어야 했다. 그는 을 계기로 (1996) (1998) (2006) 등의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며 꾸준히 인지도를 쌓았지만, 출연작들 대부분이 조연 배역에 그쳤고 영화의 인기에 편승한 느낌이 강했다. 주연을 맡았던 작품들을 통해서는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위트 있는 현대판 ’돈키호테‘로 분한 (1993) 시리즈와 ‘레옹 2’를 표방한 (2001) 와 같은 코미디 영화를 통해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러나 코미디는 코미디로 끝났다. ‘깨알’같던 프렌치 코미디는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그것이 장 르노의 수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깐의 외도 후엔 다시 액션물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 뤽 베송 감독의 페르소나로 호흡을 맞춰 왔기에, ‘장르액션물’이 그에겐 익숙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에선 주연으로 나선 (2000) 와 그 속편으로 일시적인 흥행몰이에 성공했다. 그러나 어느덧 ‘프랑스식 장르액션물’ 전문배우라는 타이틀은 장 르노에게 ‘멍에’가 되었다. 주연으로 나선 (2009) (2010) 과 조연 출연작 (2012)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액션 대작 속엔 ‘새로움’도 ‘흥행’도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의 성공 이후 국내에 소개된 장 르노의 작품들 중에는 이렇다할 흥행작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올해 6월 그의 주연 출연작 (2013) 가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마틸다 역 나탈리 포트만(Natalie Portman)
은 그녀의 데뷔작이었다. 당시 12세였던 나탈리 포트만은 기성 배우와 같은 대담한 연기로 마틸다의 복잡한 내면을 풀어냈다. 한때 영화 속 그녀의 헤어스타일과 의상 등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정말 될성부른 그녀는 떡잎부터 달랐던 걸까.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던 그녀는 이후 차곡차곡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채워나갔다. 후 곧장 출연했던 (1995) (1996) (1999) 등으로 대중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며 ‘국민 여동생’으로 등극했다. 한편으론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00) 에선 임신한 십대의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내더니 (2005) 로는 ‘브이’의 혁명 동반자 이비 역을 맡아 제32회 새턴 어워즈의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시리즈를 10여년에 걸쳐 통과하며 성인이 되었고, 그 후 몇몇의 작품들을 통해 배우로서의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탈리 포트만의 커리어 중 주지할 만한 또 하나의 사실은 그녀가 영화를 찍으면서도 학업을 계속 했다는 것이다. 하버드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녀는 배역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고, 그 능력은 (2004) 의 스트립댄서 역할을 소화해낼 때 빛을 발했다. 그리고 결국 2010년 을 통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발레리나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1년여 간 매일 10시간의 특훈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녀는 수상과 함께 ‘재능뿐 만아니라 노력도 겸비한 배우’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2013) 와 (2013) 의 개봉을 목전에 둔 올 한해, 그녀의 비상(飛上)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감독 뤽 베송(Luc Besson)뤽 베송은 80년대 초기의 ‘누벨 이마주’(Nouvell image, 새로운 이미지를 추구한 1980년대 프랑스 영화감독들의 작품 경향)로부터 시작한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에 할리우드적 상업요소를 결합해 ‘프랑스식 장르액션물’에 한 획을 그었다. (1988) 로는 지중해 바다를 담은 뛰어난 영상미와 함께 두 사나이의 우정·도전·경쟁을 담아내 연출력을 인정받았고, (1990) (1993) 등의 스타일리쉬한 액션물도 직접 연출했다. 이후의 뤽 베송은 점차 연출뿐 만이 아닌, 제작·각본 분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특히 (1999) 이후로는 주로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그의 능력은 연출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게리 올드만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1997) 의 제작에 참여하여 제51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알렉산더 코다 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제작·각본에 참여한 (1998) 와 (2002) (2008) 시리즈는 여러 편의 속편이 제작될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각본부터 제작·연출까지 전 영역에 참가한 (2006) 으로 판타지 애니메이션 영역으로의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일한 스타일 안에서의 계속되는 ‘사소한 변주’는 새로움이 없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2011년 제작·연출을 맡은 로 제 34회 밀 밸리 영화제 ‘액티브 시네마’ 부문 시상 후 침묵하고 있는 뤽 베송. 올해 개봉을 앞둔 제작 참여작 (2013) 과 연출·각본 참여작 (2013) 에 관심이 집중되는 까닭이다. 아 참, 한 가지 더. 뤽 베송은 (1997) 가 한국에서 상영할 당시 상영 횟수를 늘리기 위해 감독의 허락 없이 ’20분‘을 잘랐다는 이유로 차기작인 에서 한국인 택시기사를 비하하는 듯한 내용을 담아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는 2011년 10월 11일 부산 영화의 전당 아카데미룸에서 진행된 ’마스터 클래스-마이 라이프, 마이 시네마 뤽 베송‘ 행사 중에 “한 나라에 대해 지속적으로 나쁜 인상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는 부산에서 전혀 자르지 않고 상영해줘서 고마웠다”며 반한(反韓)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글.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편집.홍지유 jiyou@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