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터고’에 출연한 배우 김흥래

‘미스터 고’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고릴라 링링이다. 성동일이 “내 출연료는 링링의 털 몇 가닥밖에 안 된다”고 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투자했다. 국내 흥행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지만, 고릴라 CG에 대한 만족도만큼은 높다. 가상 캐릭터 링링의 완성도는 물론 배우들 간의 호흡도 매끄러웠다. 실제와 가상의 간극을 메우는 작업은 대부분 애니메이터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실제와 가상 사이를 연결한 이가 한 명 더 있다. 촬영장에서 링링의 빈자리를 채운 배우 김흥래다.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보면, 최근 그가 읽은 듯한 책의 제목들이 눈에 띈다. 먼저 ‘온몸으로 연기하기’에서는 고릴라 연기를 위해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의 감각까지 살리려 했던 그의 노력이 보인다. 다른 한 권의 제목은 ‘뇌를 단련하다’. 그는 논문까지 찾아볼 정도로 고릴라의 습성을 파고들었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뇌를 단련시켰다.

Q. 원래 무슨 일을 했었나.
김흥래 : 연기로 돈을 벌 수 있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많이 했다. 지금은 작은 스튜디오를 차려 연기를 가르치고 있다. 소수정예로.Q. 학생들도 영화를 봤겠다. 뭐라고 하던가.
김흥래 : 애들이랑 극장에 같이 갔다. 영화를 보더니 링링이랑 나랑 닮았다고…(웃음) 또 한 녀석이 ‘여기 고릴라 연기한 배우 있다!’고 외치는 바람에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분들도 계셨다. 나야 감사하지.

Q. 대역배우 일은 어떻게 하게 됐나.
김흥래 : 오디션을 봤다. 지인이 알려줘서 갑작스럽게 지원했는데 운 좋게도 내가 뽑혔다. 당연한 거겠지만, 오디션에서 대사 대신 고릴라 연기 지문을 받았다. 김용화 감독님이 요구하시는 건 영화 ‘킹콩’에서처럼 의인화된 킹콩이 아니라 고릴라 그 자체였다.

Q. 고릴라 연기를 배워나간 과정이 궁금하다.
김흥래 : 촬영 전에 2주간 돈 맥너드(미국의 고릴라 연기 전문 배우)로부터 고릴라 연기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열심히 배웠지만, 그 분이 미국으로 떠나고 나니 막막했다. 2주로는 부족할 수밖에. 촬영 때마다 감독님이 숙제를 내 주셔셔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수험생이 된 것 같았다. 학교 다닐 때 그렇게 했으면 서울대도 갔을 텐데. 구글에서 고릴라 관련 논문까지 찾아봤다.Q. 숙제를 해갔을 때, 김 감독의 반응은 대체로 어땠나.
김흥래 : 좋을 때는 좋다고 말씀해 주신다. 문제는 별로였을 때다. “과연 그럴까?”라며 좀 더 생각해보라고만 하셨다. 정답을 미리 말해주지 않는 거다. 그러니 더 공부해야 했다. 촬영장에서 외로움도 느꼈다. 김 감독을 제외하고는 고릴라의 감성에 대해 공유할 사람이 없으니까. 보조 출연자 중에 ‘저 사람 왜 저렇게 하고 다니냐’고 묻는 분도 있었다. 그럴 때 서교에 많이 의지했다. 연기할 때 나를 진짜 고릴라로, 링링으로 대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나도 감정 이입이 잘 되고.

Q. 링링은 그냥 숲 속의 고릴라도 아니고, 야구하는 고릴라다. 보고 따라할 모델이 없으니 시작부터 막막했겠다.
김흥래 : 그게 내 첫 숙제였다. 고릴라는 배트를 어떻게 휘두를까. 다양한 모션을 연구해서 감독님께 보여드리면 감독님이 그 중 하나를 고르셨다.

Q. 배트 휘두르는 거야 고민의 시작일 뿐이고, 촬영하면서 더 큰 고충이 많았을 것 같은데.
김흥래 : ‘미스터 고’ 3대 악재가 있었다. 우선 회차가 너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많았다. 이 신 찍었다가 저 신 찍었다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두 번째는 생리현상. 모션캡처를 위해 입는 옷이 있는데, 소변을 볼 수 있는 지퍼가 없었다. 세 번째는 고릴라 옷이다. 처음엔 고릴라 옷을 다 입고 촬영했다. 그게 40kg이나 된다. 고릴라 연기 하려고 83kg에서 105kg로 찌웠는데, 너무 힘들다보니 15kg가 쫙 빠졌다. 그 옷이 영상과 안 맞아서 결국은 벗게 됐는데,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Q. 그 고릴라 옷을 입고 김용화 감독과 함께 모니터링하는 사진을 봤다.
김흥래 : 컷 사인이 나면, 서교랑 성동일 선배님은 감독님한테 가는데 나는 컴퓨터 그래픽 담당하는 분들한테 먼저 갔다. 모니터링할 때도 다른 배우들과 달랐던 거지.

Q. 배우들을 보면서 부럽거나 아쉽지는 않던가.
김흥래 : 아쉬운 마음이야 당연히 있다. 하지만 기왕 고릴라 연기를 하게 된 거, 고릴라 분야에 있어서는 일인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에게는 이성과 본능이 있는데, 동물 연기를 하다보면 본능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송강호, 최민식 선배님이 링링을 연기하셔도 잘 하셨을 것 같다. 고릴라 연기에도 연기력이라는 게 필요하다. 중요하고. 고릴라 연기와 배우 연기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루게릭 환자 역할을 맡은 배우가 연기를 위해 10kg 넘게 감량하기도 하지 않나. 내가 고릴라 연기를 위해 살찌우는 거랑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 ‘미스터고’에 출연한 배우 김흥래
Q. 김용화 감독 말로는, 인간과 고릴라의 골격 자체가 달라서 애니메이터들의 손을 거쳐야 하는 부분이 있다더라. 어떤 부분인가. 연기할 때도 그 부분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김흥래 : ‘미스터 고’는 애니메이터가 완성한 영화다. 감독님이 낸 숙제도 애니메이터에게 영감을 주라는 것이었다. 진종현 슈퍼바이저와 스물일곱 명의 에디터들이 천 컷의 고릴라를 완성했다. 내 연기 비중이 10이라면, 그들은 1,000이다. 난 내 몫을 충실히 했을 뿐이다. 영화 속의 링링은 내 연기보다 훨씬 완벽했다.

Q.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묻고 싶다. 아무래도 링링이 등장하는 신일 텐데.
김흥래 :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베이스를 돌아 홈까지 달려오는 링링. 링링이 뛰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나더라.

Q. 고생했던 게 생각나서인가.
김흥래 : 그건 아니다. 사실 링링은 야구를 모른다. 웨이웨이에게 교육받은 대로 행동하는 것일 뿐이다. 경마장의 말도 뭘 알고 뛰는 게 아닌 것처럼. 링링은 웨이웨이가 기뻐하는 게 좋아서 치고 달린다. 무릎이 아파도 웨이웨이를 위해서 뛰는 거다. 그게 참 짠하다.Q. ‘연예가중계’에 성동일과 함께 링링이 출연했다. 그것도 김흥래 씨의 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텐데. 이제 한국에서는 사실상 고릴라 연기의 일인자가 된 것 아닌가? 다른 아르바이트나 부업 제의도 있을 것 같다.
김흥래 : 아직은 전혀 그런 게 없다. 이 기사가 나가면 연락이 올 수도 있겠지만.(웃음)

Q.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김흥래 : 나는 배우다. 연기로 승부를 보고 싶다. CG를 활용하는 영화나 영상물에서 내 연기가 필요할 경우, 의무감을 갖고 임하겠다. ‘미스터 고’에 출연한 사람으로서 그 정도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나.

글,편집. 기명균 kiki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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