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겪었던 굴욕 하나. 아이가 아직 어렸을 적의 어느날, 급히 손님 치를 일이 생겨 백화점에 장을 보러 나갔다가 과거 잠깐 만난 적이 있는 남자와 떡하니 마주쳤다. 그 때 내 차림은 그야말로 봉두난발을 겨우 면한 차림에 아이까지 들쳐 업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웠겠는가. 게다가 그 남자는 “저 여자가 저렇게 망가질 수가!”하는 기색이 역력했던지라 서둘러 집에 돌아와 한참동안 통곡 했었다. 훗날 딴엔 명예회복이라고 한껏 차려입고 그 부근을 몇 차례 배회했지만,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만큼 사람의 차림새는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결정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겉치레라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사람의 마음 속까지 볼 수는 없으니,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겉모습을 꾸미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겉모습은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한 준비를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구멍 난 양말을 신는 선생님, 명품 가방을 든 쿠여신

특히나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기를 보여주는 직업인 연기자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들에겐 자신이 연기하는 배역에 맞춰 필요한 겉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연출이 연기하는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기자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라면 곤란하다. KBS <꽃보다 남자>의 금잔디(구혜선)의 경우 드라마 속에서는 ‘서민 대표’라고 설정 돼 있지만, 실상은 명품 옷과 가방을 걸쳐 논란이 됐다. 가난한 집 여고생이라면 교복용 코트에 도톰한 파커와 스웨터 몇 장으로 겨울을 나야 현실적이건만, 건물 청소며 갖가지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버는 처지에 고가의 옷가지를 걸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리 입고도 가난으로 심신이 지친 사춘기 여고생의 절박함이 잘 표출된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다.

물론 지적거리가 책 한 권은 족히 될 드라마에서 구혜선이 부상까지 견디며 눈물겨운 투혼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런 배우를 토닥여주지는 못할망정 꼬집어 타박할 게 뭐냐며 서운해 할 법 하다. 하지만 강부자 씨는 얼마 전 SBS <야심만만>에서 형편이 어려운 역을 맡을 적엔 구멍 난 양말까지 신을 정도로 세세히 신경을 쓴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구멍 난 양말이 TV에 비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큼 자신의 보이는 모습에 철저하게 준비한 연기자가 연기도 어떻게 준비했으리라 하는 것은 짐작 간다. 물론 연기 경력이 수십 년에 달하는 살아있는 전설을 젊은 연기자와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일찍 연기자로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안다면 연기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 일 것이다.

지켜보고, 기다려 봅시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겉모습을 통해 캐릭터를 표현하는 배우도 있었다. 세상을 버린 지 어느 새 2년이 흐른 故 정다빈은 MBC <옥탑방 고양이>에서 트레이닝복을 비롯한 수수한 옷 몇 벌과 화장기 없는 얼굴로 마치 실제로 옥탑방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캐릭터 남정은을 연기해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슬픈 것은 故 정다빈도 연기자로서의 겉모습을 준비하는 데는 충실했으되, 여성 스타로서 대중의 시선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故 정다빈의 자살 이유가 그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故 정다빈은 죽기 전 성형 논란 등 네티즌의 악플에 괴로워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부분들을 생각하면 구혜선의 선택도 아주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오죽 관심 많고 말 많은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으니, 예쁘게 꾸미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고, 그 반대라면 신경 안 쓴다는 말들이 나올 법도 하다. 강부자 씨처럼 선생님 소리 들을 나이에도 철없이 겉모습에만 신경 쓴다면 볼썽사나운 일이겠지만, 어린 연기자들은 아직 예쁜 모습을 꾸미고 싶기도 할 것이고, 그 마음을 다스리는 법도 차츰 배워갈 테니 우리 모두 기다려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故 정다빈이나 故 장자연처럼 화려한 연예계의 겉모습 뒤에서 남모를 고통을 겪었을 그들을 생각하니 괜시리 그런 마음이 든다.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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