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에게 있어 지우고 싶은 얼룩 같은 거지.” KBS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의 잔인한 이 한 마디에 숱한 여성들이 가슴에 총 맞은 것처럼 안타까워했을 게다. 하지만 구준표의 말처럼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얼룩’이 있는 게 사실이다. 나도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실수부터 내 가족의 이익을 위해 저질렀던 범법에 가까운 행위들, 그리고 아이들 어릴 때 치맛바람부대에 몸담았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어찌나 민망한지 마음에 표백제라도 들이붓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내 부끄러운 과거를 적나라하게 들춰낸다면 어떨까. 하물며 그걸 TV에 대고 폭로한다면 두고두고 상처를 입을 일이다. 얼마 전 KBS <신동엽, 신봉선의 샴페인>처럼 말이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이 날 방송에 출연한 탤런트 김세아는 배우 K모씨가 자신의 집 앞에서 밤새워 기다리는 등 집착하는 것이 싫어 절교했다고 주장했고, 서유정은 탤런트 공채 동기인 김정은과 김현주의 민망한 에피소드를 말했다. 심지어 연락 끊은 지 몇 년 째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폭로의 아이콘들이 지나간 자리

물론 연예인들 사이의 과거 폭로는 심심치 않게 있어 왔다. 하지만 같은 룰라의 멤버였던 고영욱과 신정환이나, 김국진을 비롯한 ‘감자골 사인방’처럼 지인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주고받는 폭로는 상호간의 합의에 의한 폭로이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느껴져 민망하긴 해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다. 하지만 김세아나 서유정이 한 폭로는 말 그대로 토크쇼에서 한 번 더 카메라 받겠다고 지금은 아무 상관도 없는 스타들을 이용한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제작진은 서둘러 사과하기 급급하지만, 구준표의 말처럼 “세상에 사과해서 다 없던 일되면 법은 왜 있고 경찰은 왜 있겠”는가. 이런 치졸하고 비상식적인 일이 요즘 들어 계속되는 건 아마도 ‘폭로’로 재기에 성공한 연예인들이 있기 때문이지 싶다.

지난 해 종영한 MBC 에브리원의 <김국진의 네버엔딩 쇼를 하라>는 원래 ‘다시 보고 싶은 영웅 부활 프로젝트’라는 기획으로 이제는 한물간 연예인들이 지난날의 애환을 털어놓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R.ef의 성대현이나 투투의 김지훈 등이 한 시대를 풍미한 동료 연예인들의 민망한 과거사 폭로로 시선을 모으면서 분위기가 일변했다. 이미 유부남이 된 이들의 지난 날 삼각연애를 들춰내기도 하고, 동료 간의 주먹 다툼을 화제로 끌어내기도 하며 너나할 것 없이 폭로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발군의 입담을 보인 몇몇 연예인들은 공중파에 진입했으니, 그 광경을 본 비슷한 처지의 연예인들이 자신도 ‘폭로의 아이콘’이 되기를 자처했으리라.

토크쇼에도 분리수거가 필요할 때

인기를 되찾고 싶은 절박한 마음은 백번 이해가 가고, 제작진과 MC들의 집요한 부추김도 짐작이 간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도리가 있고 윤리가 있는 것 아니겠나. 지난 번 MBC <명랑 히어로>에서 김구라에게 “당한 사람까지 같이 웃을 수 있어야 진짜 개그다”라는 일침을 가한 개그맨 최양락은 KBS <박중훈 쇼 대한민국 일요일 밤>에 출연해서도 “나는 재미있었지만 당한 저 사람은 속상했겠다, 저 사람 어머니나 아내는 정말 마음이 아프겠다 싶었다면 그건 단연코 좋은 개그가 아니다”라는 얘길 했다. 그러나 이미 일상다반사가 된 폭로 토크가 그저 앉아서 비난만 한다고 근절될 리 없으니, 이제는 아예 시청자가 나서야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는 쓰레기를 분리수거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지만 끊임없는 홍보와 계몽을 통해 이제는 누군가 쓰레기를 뒤섞은 채 버리면 ‘돌아이’ 취급을 받듯이 말이다. 그러니 ‘타인의 치부 폭로’도 이처럼 계몽 운동이라도 펼쳐보자는 얘기다. 언제까지 쓰레기를 마구 섞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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