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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의 <더티 섹시 머니>는 <댈러스>나 <다이너스티> 처럼 뉴욕의 부유한 콩가루 집안 달링가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심각하기 보다는 유머와 세련미를 가미해 평론가들은 물론 시청자들로 부터 호평을 얻었다. 그러나 지난해 작가협회 파업 이후 올 가을 다시 한번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증명할 기회를 갖게 됐지만, 요즘 대세인 범죄 수사물이나 의료 과학물 등에 밀려 종영을 맞고 말았다. 이 시리즈는 캐릭터들의 뉘앙스와 뒷 이야기를 알아야 재미를 붙일 수 있는데, 지난해 관심을 보였던 시청자들이 1년이 지난 후까지 이 시리즈에 귀추를 주목하기를 바란 것은 무리였나 보다. 여기에 미국 내 급작스러운 경제 악화로, 지난해 까지만 해도 “부자여도 콩가루 집안”이라며 위안을 받았던 시청자들이, 부잣집 사람들의 막돼먹은 행동을 곱게만 보기도 힘들어졌다는 평도 있다. 하지만 <더티 섹시 머니>의 팬으로 이 시리즈를 다루지 않고 넘어가기가 아쉬워 소개한다. 이미 국내에서도 소개된 시리즈이기 때문에 에피소드나 줄거리를 다루기 보다는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캐릭터와 이를 연기한 배우들을 소개할까 한다.

대인기피증 때문에 성직자가 된 셋째 아들

<더티 섹시 머니>의 모든 캐릭터는 서로 복잡한 구조로 얽혀있고, 내외적인 고민과 욕망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이 중에서 늘 외톨이로 보이는 캐릭터가 있는데, 바로 브라이언 달링이다. 성직자였던 브라이언은 아마도 어릴 적부터 자신이 달링가에서 기름처럼 겉도는 것을 느꼈나 보다. 집에서 겉도는 것 만큼, 사회생활에서도 대인관계에 젬병인 그가 성직자의 길을 택한 이유도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다. 물론 시즌 2에서는 성직을 떠나 트립 밑에서 경영의 노하우를 전수받아 뒤를 잇고 싶어하지만, 그것도 쉽지가 않다. 이 외에도 수년간 외면해 온 아버지가 살해된 뒤 자신이 혐오하던 달링가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하는 주인공 닉 조지(피터 크라우스), 아버지 패트릭 트립 달링에게 떠밀려 상원의원까지 됐지만 사실은 성전환자인 연인 카멜리타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행복한 패트릭 달링 (윌리암 볼드윈) 등의 캐릭터도 있다.

심술 많고, 만사 불만 투성이지만, 알고 보면 부드러운 면이 있는 브라이언 역은 글렌 피츠제럴드가 열연했다. 피츠제럴드는 80년대 말 ‘캘빈 클라인’ 모델로 데뷔했지만 이후 저예산 독립영화와 브로드웨이,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 등에서 연기력을 다져 연기파 배우로 성장한 케이스다. 그는 날카로운 외모 덕분에 신경질적인 역할을 많이 맡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 <로비 히어로>나 <블루/오렌지> 등을 통해 큰 연기폭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술과 남자 없이 못 사는 장녀

늘 술에 취하거나, 남자에 취해있는 캐런 달링은 닉의 첫사랑이다. 뭣도 모르던 젊은 시절, 닉의 청혼을 거절했던 캐런은 놓쳐버린 사랑을 찾으려는 듯 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다. 한 손에 칵테일을 들고. 시즌 2에서는 아버지 트립 달링의 사주를 받아, 경쟁자이자 적인 사이먼 엘더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사귀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망 없이 로맨틱한 그녀는 진짜로 사랑에 빠지고 마는데 문제는 아무도 캐런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캐런을 사랑한다는 사이먼이나, 그녀가 사이먼에게 청혼을 받은 후 다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닉, 그리고 딸의 행복을 원한다는 트립 등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한다. 이 사이에 낀 캐런은 달링가의 상속분을 빼앗기고, 사이먼에게 이용당하고, 닉의 성난 부인에게 얻어 맞고, 머리채를 잡히지만, 늘 자신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젊은 시절 뭣 모르고 잃어버렸던 사랑을 찾아서.

캐런 역을 맡은 나탈리 지는 NBC의 소프 오페라 <패션스>에 출연해 눈길을 끌었던 배우로 소프 오페라 출신 배우들 특유의 오버액팅이나 어설픈 연기를 보여주는 대신, 적절한 강약 조절로 맡은 캐릭터 만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피터 크라우즈와 도날드 서덜랜드, 윌리암 볼드윈, 질 클레이버그, 루시 루 등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도 밀리지 않는 자신감있고, 솔직한 연기에 눈길이 간다.

다 가진 것 같지만 아무 것도 가지진 못한 아버지

트립 달링은 이 역을 맡은 도날드 서덜랜드 처럼 강하고, 권위있게 보인다. 닉의 아버지를 살해한 의심도 받고 있는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너무나 가난하다. 마음이 말이다. 인생의 둘도 없는 반려자로 생각했던 부인 레티샤는 수십 년 동안 외도를 해왔고, 자녀는 많지만 단 한 명도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자녀들은 그를 보며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아버지의 재산과 권위, 두려움에서 비롯된 감정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잘 안다.

시즌 2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 나온다. 레티샤의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당한 한 젊은 여인 렌이 달링가에서 주치의에게 치료를 받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레티샤는 렌이 달링가의 돈을 노리고 일부러 접근했다고 의심하지만, 트립은 렌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갖게된다. 레티샤의 배신으로 상실했던 트립이 “나도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할 수 있게 된 것. 하지만 그의 희망은 렌과 닉의 만남으로 곧 산산히 부서져 버린다. 서덜랜드는 트립의 이같은 갈등을 별다른 대사 없이 표정과 눈빛 만으로 보여줬다. 아마도 50여년의 연륜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아무래도 이 돈만 많은 콩가루 집안이 오래도록 그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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