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은 시동이 걸리고 엔진이 덥혀지기 전까지 드라마 보다 긴 시간이 걸린다. 소소한 캐릭터들의 엉뚱한 행동을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의 역사를 알고 정이 붙는 기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트콤이 처음부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는 힘들다. 한국 시트콤사의 명작으로 꼽히는 <순풍산부인과>도, <거침없이 하이킥>도 모두가 미달이를 얘기하고, 윤민라인-민민라인 지지파가 생기기까지는 몇 달이 걸렸다. 야심차게 시작한 MBC <그분이 오신다>가 방영된 지 2달이 지났다. 시청자들이 까칠한 매력의 전PD에 빠질 때도, 여배우 서영희의 돌아이스러움을 패러디할 때도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다. 시동이 쉬이 걸리지 않는 <그 분이 오신다>를 김은영, 윤이나 TV평론가가 점검했다. /편집자주

사직동 908번지, 윤소정 여사 가족의 집에는 온갖 전통과 권위의 상징물들이 뜬금없이 모여 있다. 사직(社稷: 국가, 조정)이라는 지명에 걸맞게 현관에는 ‘대한독립만세’ 현판을, 안에는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 사진을 걸어 놓았지만 정작 건물 외관은 일제시대 관공서처럼 생겼다. 거실 배경에 조악하게 박아 놓은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종교권력이 하늘을 찌르던 중세시대 유럽의 대성당에서, 나선형 계단과 석상들은 절대군주의 궁전이나 박물관에서 베껴 온 듯하다.

가정의 권력구도는 돈을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이 집엔 권위가 없다. 아니, 이 집의 유일한 권위는 돈이다. 이 집의 실질적인 가장은 돈줄을 쥔 시어머니와 며느리다. 소정의 딸 이영희(서영희)는 독립할 집을 얻기 위해 내키지 않는 가족여행에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가족의 수입원인 피자가게의 경영자 정경순은 불성실한 남편 이문식을 쥐꼬리만 한 월급봉투로 응징한다. 문식은 야바위판을 벌여 아들 재용(정재용)의 용돈을 강탈하고, 빈털터리가 된 재용은 할머니(윤소정)가 아끼는 ‘운도봇’을 업그레이드해서 다시 용돈을 번다. 어른의 권위가 아니라 돈의 흐름을 좇아 움직이는 식구들의 모습은 돈 쓸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 가정의 권력이 집중되는 현실세계의 단면을 빼다 박았다.

이밖에도 그들이 처한 상황은 오늘날 실제 가족들의 문제들과 여러 모로 겹친다. 실종과 기억상실로 경제력을 잃고 완전히 딴 사람이 된 문식과 그 변화에 당황하는 경순의 갈등은, 정신없이 아들딸 키우느라 서로에 대해 알 겨를도 필요도 없이 살다가 뒤늦게 서로의 변해 버린 모습을 맞닥뜨린 장년층 부부를 연상시킨다. 식구들이 할머니의 제안을 번번이 “다음에”로 묵살하다가, 모처럼 떠난 가족여행 자리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것 또한 아들딸들이 장성한 집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가족을 가족답게 하는 사소한 것

심각하다면 심각한, 하마터면 부부클리닉이 될 뻔한 이 ‘시추에이션’을 시트콤 <그분이 오신다>는 과장된 ‘코미디’로 풀어낸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코미디는 신기하게도 갈등의 본질을 웬만한 드라마보다 더 정확하게 꿰뚫는다. 예컨대 식구들 앞에서 다정한 척하던 경순과 문식은 집이 비자마자 봉을 들고 진짜 결투를 벌이다가도, 싸움이 끝난 뒤에는 나란히 소파 위에 널브러져 박카스를 나눠 마신다. 그 순간 독백으로 흘러나오는 “싸울 사람 있으니까 좋네”라는 경순의 대사는 허구한 날 바가지 긁고 싸우면서도 서로가 없으면 허전한 부부들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소정이 식구들에게 섭섭할 때마다 늘어놓는 ‘궁극의 신세한탄 모노드라마’는, 젊은 자녀들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상투적 넋두리를 들을 때의 뜨악한 기분을 극대화한다.

식구들은 사람보다 돈을 더 밝히고, 무능해진 남편은 ‘여보’에서 ‘이씨’로 추락하고, 늙은 할머니의 설움은 자아도취 모노드라마로 치부되는 집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가족으로 모여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그분이 오신다>는 ‘진심’이라는 짧고도 강력한 답안을 보여준다. 그 진심은 올케가 세탁해 준 운동복을 TV 생방송에서 은근히 자랑하는 영희의 멘트에, 재숙(하연주)이 할머니의 거울에 붙여 놓은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이름표에,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어머니인 소정을 위해 첫 월급을 몽땅 털어 사온 문식의 빨간 내복에 담겨 있다. 가정의 위기라는 말조차 식상해지고 IMF 못지않은 경기한파에 몸도 마음도 얼어붙는 지금, 그나마 가족을 가족답게 하는 것은 잃어버린 권위가 아니라 한솥밥 먹고 아옹다옹하다 미운 정 들어버린 사람들 사이의 사소한 진심이지 싶다.
글 김은영

MBC <그분이 오신다>는 ‘상실’에서 시작된다. 모든 것을 가졌던 칸의 여왕 이영희(서영희)는 스캔들과 음주운전으로 인기와 돈, 약혼자를 잃었고, 문식(이문식)은 노숙생활 2년을 제외한 모든 기억을 잃었다. 그리고 문식의 가족들은 과거의 따뜻하고 다정했던 아들, 남편, 아버지, 오빠를 잃었다. <그분이 오신다>는 문식과 문식의 가족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이다.

캐릭터의 개성 아래 실종된 관계

하지만 <그분이 오신다> 속의 가족은 잃어버린 것에 대해 그다지 집착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실종된 문식을 찾기까지 진행된 초반의 에피소드에서 가족들은 문식의 부재를 거의 느끼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실제로 돌아온 뒤에도 한바탕 통곡의 바람이 불고 지나간 뒤, 타인처럼 변해버린 문식으로 인해 실제 생활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내인 경순(정경순) 뿐이다. 이는 <그분이 오신다>의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자신만의 분명한 세계를 가지고 있고, 그 세계가 가족이나 타인으로 인하여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견고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열중하다가 오줌을 지리기까지 하는 전무후무한 ‘오덕’인 아들 재용과 클럽과 남자, 돈만이 전부인 재숙도 그렇지만, 배달로만 채워진 20년을 살아온 성진(강성진)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세계에서 문식의 역할, 곧 가족의 역할은 미미하다. 어떤 상황이 와도 ‘팩’으로 대변되는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윤소정은 가족의 구심점이기는 하지만 그 관계는 돈과 거짓말로 이루어진다. 기획의도대로라면 이런 가족들을 연결 시켜주어야 하는 고리가 문식이 되어야 하는데, 기억을 찾는다면 부부로 살아야 하는 경순은 아무리 봐도 자기 스타일이 아니고, 아들에게는 자꾸 존댓말을 써야 할 것 같은 문식은 그 역할을 맡기에 버거워 보인다.

이처럼 <그분이 오신다>의 가족들은 첫 회부터 가지고 있던 확실하게 형성된 캐릭터를 그대로 유지한 채 행동한다. 이러한 캐릭터의 형성은 개개인의 에피소드를 만들어가고 다양한 패러디를 시트콤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유용하지만, 이들이 어떠한 ‘관계’를 맺는 데는 도리어 방해 요소가 된다. 이들은 처음부터 그다지 친밀하지 않은, 어느 한 부분이 극대화된 캐릭터들로만 이루어진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정이 계획하고 추진하고 억지로 모두 참여하게 만들었던 가족여행이 우스꽝스러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아쉽다, 아쉽다, 아쉽다

그렇게 문식의 가족들은 ‘보호시설이랑 똑같다’는 가족의 관계로 돌아간 다음, 관계의 빈 구석은 각기 따로 확장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새로운 캐릭터, 카메오와 같은 단발성 등장인물들이 그 빈 곳을 채워간다. 그래서 결국 이야기의 추가 가족들에게서 그 주변 인물들로, 특히 서영희와 전PD(전진)에게로 옮겨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돌아이바’ CF를 찍은 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전국민의 0.05%인 2만 5천명을 위해 3분의 생방송에 최선을 다하는 이영희는 이미 형성되어 등장한 캐릭터가 아니라 극의 진행에 따라 ‘변화하는’ 캐릭터로서 <그분이 오신다>를 생동감 넘치게 만든다.

사실 <그분이 오신다>는 그저 그런 가족 시트콤 중 하나로 사라져버리기에 아까운 부분이 너무 많은 시트콤이다. 지금 방영되는 어떤 프로그램보다 인터넷의 놀이문화를 적극적으로 들여왔고, 매 회마다 선보이는 영화와 만화, 드라마와 뉴스까지 오가는 패러디는 알고 보는 이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다. ‘돌아이바’가 왜 웃긴지, 왜 눈을 감으면 ‘오호라 공주’의 ‘자진 방아를 돌려라~’라는 외침이 가끔 떠오르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시청층이 대부분인 시간대에 <그분이 오신다>가 편성되었다는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웃고 나면 내일 그 가족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과연 문식은 기억을 되찾게 될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 그보다 더욱 아쉽다.
글 윤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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