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췌장암은 ‘아버지의 병’ 이었다. 중학교 때 읽었던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에서 처음 알게 되었던 췌장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주인공이었던 그 소설에서 아직도 몸 속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 수 없는 ‘췌장’이란 낯선 단어를 배웠다. 그 후로 ‘췌장암’은 늘 ‘아버지’를 환기시키는 말이었다. 드라마 <바람의 가든> 역시 이 ‘아버지의 병’에 걸린 한 남자가 주인공이다. <바람의 가든>은 후지TV 개국 50주년 특집극이자 <북쪽의 나라에서>, <다정한 시간>을 잇는 쿠라모토 소우 작가의 ‘후라노 3부작’의 완결편이다. 올해 74세의 쿠라모토 작가는 무려 21년 동안 방송되며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북쪽의 나라에서>를 비롯하여 자연과 가족의 따뜻함을 작품 속에 녹여내 온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다. 특히 작가 자신이 살고 있는 홋카이도의 후라노를 배경으로 북쪽 대지의 따뜻한 이야기를 그린 일련의 작품들로 호평을 받았는데, 이번 <바람의 가든> 역시 후라노가 무대다.

바람의 끝에 췌장암을 얻고 돌아온 아버지

주인공 시라토리 사다미(나카이 키이치)는 말기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마취과 의사다. 그는 실력 있는 의사일 뿐 아니라 유머러스하고 밝은 성격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다. 그러나 화려한 여성 편력 때문에 아내가 자살을 하고, 아버지 테이조(오가타 켄)로부터 절연 당했다. 후라노에서 재택의료를 전문으로 하는 왕진의사로 일하는 테이조는 사다미의 아이들을 자신이 키우며 사다미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사다미의 딸 루이(쿠로키 메이사)는 지적 장애를 갖고 있는 동생 가쿠(카미키 류노스케)와 함께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정원 ‘바람의 가든’을 가꾼다.

사다미는 무책임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아내가 지하철에 몸을 던져 죽던 날도 그는 불륜 상대의 여자와 함께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친한 친구의 아내이자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였다. 그 일로 아버지에게 연을 끊긴 채 6년간 자식들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우연한 기회에 맡게 된 환자이자 자신보다 조금 더 진행이 빠른 췌장암을 앓고 있는 후타가미 타츠야(오쿠다 에이지)를 통해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병이 잘못 살아 온 지난 삶에 내려진 천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는 나고 자란 고향이자, 아이들이 살고 있는 고향 후라노로 돌아간다. 비록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사람들 눈에 띌까 얼굴을 숨기고, 자신이 죽은 줄 아는 아들에겐 ‘대천사 가브리엘 님’이라고 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쿠라모토 작가는 <바람의 가든>에 대해 “가든이란 죽음의 강 너머로 보이는 화원이다. 즉 삶의 마지막 순간을 그리고 싶었다. ‘인간이 마지막에 돌아가는 곳’을 주제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극 중 테이조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면 누구든 반드시 지나가는 길입니다.” 이처럼 <바람의 가든>은 지난날의 잘못으로 인해 가족과 절연했던 한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인 동시에 ‘어떻게 죽느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테이조가 집에서 죽음을 맡길 원하는 환자들을 왕진하며 돌보는 의사인 것도 사다미가 죽음을 앞둔 환자를 편안하게 하는 완화의료(호스피스)의 전문가인 것도 이와 연관 있다.

하나의 거대한 정원으로 탄생한 후라노

<바람의 가든>의 또 하나의 주인공은 바로 후라노, 자연 그 자체다. 제작진은 후라노 현지에 2년여에 걸쳐 365 종류의 꽃과 화초로 영국식 정원 ‘바람의 가든’을 조성했다. 그리고 사계절을 모두 담아낸다는 취지 아래 단풍과 눈 풍경 등 자연을 1년 전에 미리 찍어 두고, 꽃이 피는 시기에 맞춰 배우들의 촬영을 시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정성 들여 가꾼 자연을 배경으로 <바람의 가든>은 작품 속에서 죽음을, 마치 흐드러지게 핀 꽃으로 가득 찬 정원에 편안에 몸을 뉘인 채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배웅 속에서 떠나는 여행처럼 보여준다.

<바람의 가든>의 방영 직전인 지난 10월 초, 테이조 역을 맡은 배우 오가타 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 <나라야마부시코> 등을 통해 인상적인 연기로 선보였던 그는 유작이 된 <바람의 가든>에서 아들의 잘못에는 완고한 아버지이지만 마을에서 존경 받는 의사이자 지적 장애를 가진 손자에게 재미있는 꽃말을 지어 알려주는 자상한 할아버지를 따뜻하게 연기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를 화면을 통해 만나는 것은 낯설고 서늘한 기운을 줄 수밖에 없지만 <바람의 가든>이 말하는 ‘죽음은 곧 여행이다’라는 주제는 그 역시 편안한 여행을 떠났으리라 믿게 해준다.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