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김상호 감독을 꼭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와 MBC <비밀남녀>를 함께 작업했던 김인영 작가의 귀띔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미국 SF 드라마 <테이큰>이나 <배틀스타 갤럭티카>같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의 대답은 예상 외였다.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을 제일 좋아해요. 드라마 감독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앤은 대단히 많은 드라마적 장치를 가진 작품이거든요. 외계인이란 것도, 사실 빨강머리 앤이 그 세계에서 ‘외계인’이잖아요. 드라마라는 건 결국 관계에 대한 이야기고, 외계인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적응하는 것처럼 낯선 관계가 어떻게 익숙해지느냐에 관한 거거든요.”

독문학을 전공하는 문학청년이었던 그가 드라마 연출이라는 생소한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것도 사실은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관계 때문이었다. 입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뼈아픈 실연을 당했던 그는 마침 비슷한 시기에 같은 처지가 된 동기와 급속도로 친해졌고, 결국 친구를 따라 방송국 입사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김상호 감독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그 친구가 바로 지금 SBS <카인과 아벨>을 연출하고 있는 김형식 감독이라는 것 또한 재미있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외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 외로움을 덜어주고 위안을 주는 게 드라마가 갖는 미덕이나 본질이겠죠. 그리고 그걸 가장 극명하게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상황과 관계들을 낯설게 함으로서 그것들을 다시 돌이켜보게 만드는 것 같아요. 외계인이 성인이어도 지구에 오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 <환상의 커플>의 나상실(한예슬)같은 ‘외계인’이 전혀 다른 세상으로 와서 적응하고 관계를 발견하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 그런 데서 사람들이 위안을 얻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외계인, 드라마, 관계라는 키워드를 매끄럽게 엮으며 간단한 드라마論까지 펼쳐 준 김상호 감독이 고른 세 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NBC
1994년~

“병원 응급실을 오가는 환자들과 그들과 마주하는 의사들, 굉장히 분절되고 단절된 관계로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에요. 의사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고 환자는 내가 살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함을 갖고 그들을 이어주는 끈은 ‘죽음’ 밖에 없죠. 이런 의학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애정이 계속되는 이유는 다양한 사람이 모인 집단 안에서 각자의 개별적인 이야기를 펼쳐 나갈 수 있다는 점도 있겠지만 병원이라는 장소 자체가 죽음, 외로움, 관계의 단절과 이어짐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의사가 환자를 살리는 순간 그들은 서로 외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걸 보는 시청자는 자신이 상처를 입었을 때 치료해 줄 누군가가 있으며 자기 또한 남을 살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죠. 그런 면에서 은 상처를 드러내고 관계의 근원을 회복하게 하는 작품이에요.”

MBC <그대 그리고 나>
1997년 연출 최종수 극본 김정수

“이 작품이 방영될 당시 신입사원이었는데 처음 회사 들어와서 카메라 케이블도 끌어 보고 세트 스태프들과 밤새 막걸리 마시며 일했던 개인적인 추억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대 그리고 나>는 가족극의 정수이면서 드라마가 갖는 미덕의 최고봉을 보여 준 작품이었어요. 우리 모두가 조금씩 그렇듯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도 가족 사이의 날 선 관계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데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끌어안고 포용하는 용기와 사랑을 보여 주거든요. 어떻게 보면 IMF로 인해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이 작품을 생각하면 그 때가 그리워질 정도로 지금도 이런 드라마가 다시 나와 주기를 바라고, 저 역시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가족 드라마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日 <오야지>(オヤジぃ) TBS
2000년

“동네 병원 의사인 아버지, 순종적인 전업주부인 어머니,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딸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 위해 재수하는 막내아들이 있는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에요. 매 회마다 사랑, 임신, 결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엄마와 딸의 관계, 자매간의 문제 등 가족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갈등과 소재가 등장하는데 코믹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섬세함이 있어 앉은 자리에서 11부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어요. <24>를 빼고 그렇게 단숨에 본 드라마가 없었는데. (웃음) 어떤 면에서 <오야지>는 <그대 그리고 나>와 연결되는 지점들이 있고, ‘외계인’ 코드와도 통하는 데가 있는 작품이에요.”

“공포는 근원적으로 외로움과 죽음에 연결되는 것 같아요.”

2007년 <향단전> 이후 김상호 감독은 진짜 외계인 소재를 포함해 다양한 작품을 기획했지만 제작까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환상의 커플> 한지도 벌써 3년 지났어요. 시간 참 빨리 가네요”라고 웃는 그가 그래서 요즘 준비 중인 작품은 이윤정 감독의 <트리플> 후속으로 8월 5일부터 10부작으로 방영될 납량특집 <혼>이다. 악인에게 억울하게 살해된 데 대한 원한을 품은 귀신이 주인공인 여고생의 몸에 깃들어 자신을 죽인 자를 응징한다는 내용의 <혼>은 최근 드라마로서는 보기 드물게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 오디션 지원서를 받고 있기도 하다. “무섭다는 감정은 내가 보지 못하는 어떤 곳에서 나오죠. 어두워진 샤워실에 불을 켜서 밝고 환하게 만들면 공포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 반대는 공포를 생겨나게 해요. 그래서 공포는 근원적으로 외로움과 죽음에 연결되는 것 같아요.” 재기발랄한 감수성과 치밀한 논리를 함께 갖춘 이 감독의 공포물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질까. 상상하니 벌써 등골이 오싹해진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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