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구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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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아시아=이정화 기자] 슬픈 눈을 지녔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애수를 실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영화 ‘연평해전’에서 고 한상국 하사(진구)의 아내 김지선을 연기한 천민희에겐 특유의 정서가 있다. 그것이 연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지니고 있던 원래 자신의 것인지, 후에 체득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의 존재를 은근하지만 진하게 증명해주는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양손과 표정이 역동적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때면 구체적인 행동을 보이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시원한 웃음도 빠지지 않는다. 참을성 많고 인내심 강한 자아와 고향인 강원도 태백의 힘찬 에너지가 묘하게 조화를 이룬 듯 보였다. 상반된 기운은 상쇄되지 않고 시너지를 내며 그녀를 빛나게 했다. 고요하고도(靜) 역동적인(動) 여인, 천민희다.
사진. 구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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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그리 일찍 시작한 건 아니었다. “어떻게 연기를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며 이야기 보따리 하나를 풀었다. 웃음 띤 목소리로 “태백 시골에서 자라 문화적 혜택을 많이 못 받았다”며 “내가 연기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운을 뗐다.

“중고등학교 때 연극부를 하긴 했지만 시골이라 연기 학원도 없었어요. 게다가 연기는 타고나게 예쁜 아이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전 그냥 공부를 계속해서 평범하게 대학에 진학했죠. 그런데 어느 날,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공부를 하다가 회사에 들어가고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그럼 내 삶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뭐지? 하고요. 그러던 중 뮤지컬 ‘컨페션’을 보게 되었는데 그 무대를 보면서 저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연기하면 매일매일이 너무 행복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지 하다가 고등학교 선배 중에 연극영화과에 간 언니가 있어서 연락을 한 뒤 연기학원으로 바로 갔죠.”

결단력과 배포가 엿보였다. 그렇게 연기 공부를 시작하게 된 그녀는 “부모님이 반대할 걸 알았기에 알바를 하며 몰래” 학원에 다녀야 했다. 연극영화과 입시까지 남은 시간은 3개월. “아침 일곱 시에 가서 학원 문을 열고 열 시에 문을 닫”던 치열한 시간은 결국 서울예대 연극과 합격이라는 성과를 안긴다. 예대의 특성상 다양한 학과가 모여 있는 덕에 그곳에서 연극, 뮤지컬, 영화 등을 경험했고, 졸업 후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며 독립 영화 등에 출연하게 된다. 그러던 중 2012년, 영화 ‘박수건달’로 스크린에서 주목받는 신인 여배우로 떠오른다.

“‘박수건달’로 대종상 신인여우상 후보에 올랐죠.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 후보에 계셨거든요. 레드카펫을 걸어가는 순간을 상상만 했었는데 직접 걷고 있으니 너무 행복했죠. 그 작품을 한 이후로 하나씩 하나씩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박수건달’의 원혼, 금옥의 처연한 눈빛을 기억한다면, 작년 tvN 드라마 ‘응급남녀’ 속 레지던트 이영애의 코믹한 모습이 낯설 수 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연평해전’ 속 김지선 역시 그간의 캐릭터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니 이쯤 되면 천민희의 진짜 얼굴은 뭘까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두부 같은 느낌의 얼굴”이라며 “처음에는 얼굴에 불만이 많았는데 지금은 좋다”고 한 그녀의 겸손한 얘기 뒤로 어떤 역할의 옷을 입어도 캐릭터의 얼굴로 보이게 하는 능력을 지닌 배우라는 생각이 스쳤다.

“영화 속 지선은 남편을 기다리며 마음 아파하던, 따뜻한 아내였어요. 그런데 실존 인물이 있으시다 보니 연기하면서 책임감이 많이 느껴지더라고요. 고민도 많았고요. 분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저를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다 하는 욕심은 없었어요. 그냥 나중에라도 ‘그때 그 배우’라고 기억해 주는 분이 계신다면 행복하겠다 했죠.”
사진. 구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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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말미,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조금은 짓궂은 주문을 했다. 사실, 스스로를 눈앞의 누군가에게 설명한다는 게 배우라 할지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객관적인 동시에, 뻔뻔해야 한다. 그녀는 “쑥스럽다”고 말했지만 당황하는 기색은 드러내지 않았다.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을 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선가 핀 조명 하나가 그녀를 밝히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이 환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양파 같은 매력을 가진 천민희라고 합니다. 흔히들 ‘볼매(볼수록 매력있다)’라고 하죠? 하하. 전 처음 볼 때보다 두 번째 볼 때가 더 괜찮고 세 번째 볼 때가 더 괜찮은 사람이랍니다. 천민희는 다음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하고 궁금하게 하는, 다음이 기대되는 배우가 될 테니 꼭 지켜봐 주세요.”

이정화 기자 lee@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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