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수 “그동안 몸으로 부딪혀서 해왔고 그래야 안다”
박해수 “그동안 몸으로 부딪혀서 해왔고 그래야 안다”
박해수는 건강하다. 큰 키와 다부진 어깨, 선 굵은 외모가 주는 이미지가 크게 한몫 하겠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건강한 사고와 고민을 단단하게 뭉쳐 무대에 던질 줄 아는 남자다. 부족한 자신감과 불안을 딛고, 문제를 직접 몸으로 부딪혀 깨나가는 배우이자 인간. 서른하나,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의 그에게 끊임없이 고민하고 번민하고 질문하는 남자가 찾아오는 이유다. 혼돈에 빠진 사춘기 소년()과 운명에 인생을 빼앗겨버린 왕(), 고독을 친구 삼아 영겁의 시간을 보낸 무사()를 거쳐, 이번엔 자존심 때문에 생을 포기하는 작가()다. 여전히 좌절 속의 인물을 그리지만 작품에 함몰되지 않고 “그런 게 큰 역”이라며 웃음 지을 수 있는 박해수는 그래서 더욱 빛이 난다.

두 달 사이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박해수: 9월에 을 했는데, 그때는 케이가 무사인데다가 말도 없는 캐릭터여서 수염도 더 기르고 눈도 강하게 뜨고 다녔다. 움직임도 워낙 많았던 연극이라서 살도 많이 빠졌었고. 지금은 를 연습하고 있어서 좀 학구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 같다. (웃음)

과 는 단편적으로 보면 무사와 작가, 육식남과 초식남이라는 대척점에 있는데 쉽게 변화가 됐나.
박해수: 는 끝나고 바로 연습을 시작한 거라서 처음에는 작가인지 무사인지 나조차도 헷갈렸다. 검으로 글을 쓰는 느낌이랄까. 밖으로 나와 배우를 한 지 4년 정도 됐는데 역시 어려운 것 같다. 공연 때까지는 최대한 만들지만, 아직까지는 어떤 작품을 맡으면 그 배역에 완전하게 빠지진 못하는 것 같다.

그럼 지금은 좀 손으로 쓰는 것 같나. (웃음)
박해수: 되게 재밌다. 이게 굉장히 막장드라마 같은데 하다보면 인생의 철학이 담겨 있어서 그거 파는 재미가 쏠쏠하다. 근데 너무 깊어서 파도 파도 어렵다. 는 진짜 하고 싶었던 작품이고, 이걸로 인해 연극을 시작하게 되어서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는 무서웠다. 스물다섯에 학교에서 처음 했었는데, 너무 모르겠어서 나중에 나이 먹고 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6살이나 많은데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작품을 어떻게 분석해야하고, 처음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을 차근차근 배우고 싶었는데 그런 지점에서 내가 가진 고민들이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대본만 죽자 사자 파고 있다.

“자기연민도 강하고 자학하는 스타일이다”
박해수 “그동안 몸으로 부딪혀서 해왔고 그래야 안다”
박해수 “그동안 몸으로 부딪혀서 해왔고 그래야 안다”
뮤지컬 에서부터 , , 그리고 까지 줄곧 갈등이 많은 인물들을 연기해오고 있다. 자신이 살지 못했던 삶을 살아내기 때문에 그런 캐릭터에 더 끌리는 편인가?
박해수: 좌절하는 역을 맡는 게 좋다. 큰 배역이거든. (웃음) 폭이 커서 연기할 때 도움이 많이 된다. 배우는 갈등이 많고 고통스러운 작품을 해야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의 김운기 연출님이 학교 교수님이셨는데 거의 세뇌하듯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친구들하고도 어렸을 때 힘든 거 해야 내공도 쌓이고, 나중에 그런 거 다 버리고 코미디를 해도 깊이가 있지 않겠냐, 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근데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배역이면 더 좋을 것 같다. 마지막에 좀 행복하게 끝나게. 죽지 않고, 눈 빼지 않고, 혼자 살지 않고. (웃음)

머리로는 알아도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고, 특히 어릴 때는 더 그런데 계속 그런 작업들을 해왔다. 그래서 연출가나 작가들이 좋아하나보다.
박해수: 진짜 진짜 진짜 진짜 감사하다. 시작도 인복이 많아서 가능했다. 하지만 연습 때는 싫어하셨을 수도 있다. 잘 못하니까. (웃음) 연습 하면서 조광화 연출님이랑은 대화를 많이 안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서로 눈빛만 봐도 믿고 가게 되더라. 할 수 있지? 그런 눈빛. 그런 믿음들이 나에게 힘을 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해야지, 할 수 있어! 라고.

자신감이 별로 없는 편인가.
박해수: 자학하는 스타일이다. 자기연민도 좀 강하고, 나는 안 되나? 싶은 것도 많고. 그래서 뜨레플레프가 작가 캐릭터에 초식남 같은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많이 공감하는 편이다.

주로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기준이 높은 편이기도 하고, 인정에 굉장히 목말라하지 않나. 그런 부분이 배우의 욕망과도, 뜨레플레프와도 맞닿아 있을 것 같다.
박해수: 도인이 아닌 이상 칭찬 받으면 다 좋아한다. 문제는 그 선을 잘 지켜야 되는 건데, 뜨레플레프는 왔다 갔다 한다. 내 것이 최고라 생각하고, 엄마 엄청 사랑하고, 연민과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치기 어린 마음에 내 것이 안 되면 비꼬기도 하고. 게다가 뜨레플레프는 인정 안 받아도 돼, 도 아니고 인정받고 싶어, 도 아닌 중간 사춘기 같은 상황이다. 그 사이에서 자기 혼란에 빠지니까 스트레스를 받고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자존심이 스스로를 짓밟는데 그걸 다시 잡으면 또 놓치고. 그런 상황인 거지. 짜증나는 스타일이다. (웃음) 아마 뜨레플레프는 인정만 해줬어도 안 죽었을 거다. 그런 걸로 따지자면 고독이라는 측면에서 그동안에 해왔던 작품들과 비슷한 지점들이 있다. 오이디푸스도 그렇고. 모든 게 다 애정결핍 때문이다!

아무래도 배우는 캐릭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직업군인데, 유난히 극적인 캐릭터를 많이 해왔다. 일과 생활을 잘 구분하는 편인가.
박해수: 초반엔 좀 했다. 그러다 하면서부터 개그가 없어졌다. 옛날엔 재치 있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재미가 없어지면서 대신 애교가 많이 늘었다. (웃음) 요즘엔 일단 그런 배역들에 너무 들어가면 사람이 늙는 거 같아서 좀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취미 같은 게 있어야 되는데 특별한 게 별로 없어서 걱정이다.

오이디푸스도, 뜨레플레프도 타인과 스스로에게 질문을 많이 했다. 그 캐릭터들로부터 얻은 답이 있다면 무엇인가.
박해수: 계속 왜 이렇게 결핍되어 있거나 불안에 떠는 배역들이 들어오나 생각해봤다. 사실 나는 자신감은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런 게 별로 없다. 화를 내도 케이처럼 와악! 하고 내버리는 스타일이고. 그런데 작품을 하면서 그런 불안과 결핍이 특이한 사람들의 일이 아니라 주변의 누구든 느끼고 있는 점이라는 걸, 그리고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단지 극으로 써지면서 좀 더 증폭되는 경향이 있는거고. 오이디푸스도, 케이도, 뜨레플레프도. 다 우리 얘기인데 간과했나 싶은 생각을 했고, 주변을 둘러봐야겠다 싶었다.

“ 포스터 덕에 드라마 제안이 왔다”
박해수 “그동안 몸으로 부딪혀서 해왔고 그래야 안다”
박해수 “그동안 몸으로 부딪혀서 해왔고 그래야 안다”
선 굵은 외모 때문에 좀 더 드라마틱한 캐릭터를 많이 접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언제부터 그랬나.
박해수: 원래는 완전 꽃미남이었다. 머리를 어깨까지 길러서 묶고 다녔고, 그때는 수염도 거의 안 나고 뼈대도 되게 얇은 길고 마른 체질이었다. 화장해놓으면 그렇게 예쁠 수 없는. (웃음) 근데 군대 가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어깨가 벌어지고 뼈가 굵어지면서 덩치가 좋아졌다. 처음엔 굉장히 충격이어서 제대 후 2-3년 동안 학교에서 진짜 연기만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웃음) 올해 에서 배우들이 피아노를 치는데, 손가락도 엄청 굵어서 피아노 친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어릴 때부터 가끔 쳤다. 근데 코드는 칠 줄 아는데 악보를 못 봐서 남이 치는 거 손 모양 보고 치는 특이한 케이스다. 하하하

초연 때는 50대 최재형 역을 맡았었는데, 한 관객이 ‘꽃노년’이라고 해놨더라.
박해수: 기분 엄청 좋았다. 작은 배역인데 그걸 본 거잖아. 대극장이고 분장도 그렇게 해놓으니까 나를 아는 사람들도 와서 봤지만 내가 어디에 나온 지 몰랐었다.

올 겨울에는 그런 이미지를 살린 캐릭터로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들었다.
박해수: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드라마를, 그리고 사극을 꼭 해보고 싶었는데 좋은 계기로 MBC에서 하는 이라는 작품을 하게 됐다. 포스터를 보고 연락이 왔고, 감독님이 맘에 들어하셨었는데 공연 일정이랑 겹치면서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었다. 근데 촬영스케줄을 전부다 미뤄주시겠다고 하시더라. 1, 2부 정도 출연하게 될 것 같다. 내가 만나는 게 다 주인공들인데 전체를 다 미뤄주신다니 더 부담스럽다.

스케줄을 그렇게 조정하는 것 보니 짧지만 굵은 인물인 것 같다.
박해수: 주인공이 절에 들어와서 살게 되는데, 그 아이에게 무술을 가르쳐주는 호법승이다. 큰 스님 아래에 있는 빈틈 있는 스님. 대사도 많고 나오기도 많이 나온다. 근데 내가 매니저나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떤 식으로 해야할지 모르겠다. 연극할때도 그냥 몸으로 부딪혀서 했고, 그래야 아니까 그냥 열심히 하자고 생각한다. 그 기간 동안에는 아예 다른 일을 접고 거기에 몰두하려고 한다. 아침 촬영이면 전날 아버지 차 빌려서 거기 가서 대본이나 보려고. (웃음)

드라마와 뮤지컬에 참여하지만, 연극에 좀 더 마음을 주고 있는 느낌이 강한 배우다. 연극무대가 본인에게 주는 행복감이 있나보다.
박해수: 스트레스를 받지만 깊이가 있어서 좋다. 이게 참 변태적이죠? (웃음) 긍정적 스트레스가 낫다. 요즘 아침에 드라마 때문에 무술을 배우고 있는데 무술감독님이 몸에 긴장이 많이 들어가 있다고 하셨다. 힘 있게 하는 건 좋은데 유하다가 어느 순간 힘이 확 들어가는 게 더 멋지고 힘 있어 보인다고. 그때 연기할때도 그런게 여전히 남아있을 것 같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선배들 보면 너무 부럽다. 그동안 선생님들이랑 많이 못해봐서 나한텐 좋다. 항상 릴렉스 되어 있는데 긴장할 때는 딱 긴장하는 능력! 나도 나이들면 할 수 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무대 밖에서도 박해수를 찾는 이들이 더더욱 많아질 것 같아 불안하다. (웃음)
박해수: 지금까지는 감사하게도 인복이 진짜 많아서 행복하게 잘 왔다. 계속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 것 같은데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게 많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경험도 많이 해보고 식견을 넓혀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한국이나 잘 다니자 싶어서 외국여행을 한 번도 안 갔다. 근데 이제는 가고 싶다. 너무 이렇게 파기만 하면 위험해질 것 같고, 그 우물 안에서 거만해져서 겸손해질 수 없을 것 같다. 엄청난 사람도 보고, 깨지기도 해야 될 것 같다. 과히 능동적인 사람은 아니라 자극을 받아야 된다. 지금 쓸 수 있는 에너지량이 있을 것 같은데 내가 하루에 쓸 수 있는 열량을 다 썼으면 좋겠다. 그럼 살도 빠지고. (웃음)

글. 장경진 three@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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