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천국>│아듀, 라디오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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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겪어도 무뎌지지 않는 게 헤어짐의 아쉬움이다. 지난 3년 반 동안 우리의 밤을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던 KBS (이하 )이 막을 내린다. 참 많은 이야기와 음악과 웃음과 눈물을 나누었다. 매일 같은 밥상에 앉아 밥을 먹는 가족처럼 매일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우리도 ‘라천민’이 되었다. 잠 못 드는 불나방들이 모여드는 심야의 집합소일 뿐 아니라 가장 충실한 대중음악 교과서이자 큐레이터였던 을 보내며 에서 뜨거운 안녕의 인사를 준비했다. 그 동안 을 거쳐 간 모든 소리들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을 KBS 스튜디오와 ‘라천민 집단 부흥회’ 같던 첫 공개방송 현장을 다녀왔다. 그리고 DJ 유희열을 보내며 그와 함께 했던 게스트와 스태프의 인사를 대신 전한다. 여기에 지난 15년 동안 DJ 계의 변태 조련사, 희열 오빠와 함께 했던 애청자 K양의 낯 뜨거운 고백을 덧붙인다. 고마웠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아듀,

처음은 아니다, 이 이별은. 10년 전 MBC < FM 음악도시>(이하 )와의 첫 이별만큼 황망하진 않다. 7년 전 MBC < ALL THAT MUSIC >(이하 < ATM >)과의 두 번째 이별만큼 아쉽진 않다. 그런데, 두렵다. 이 쓸쓸한 계절에 을 떠나보내기가 참 쉽지 않다. 지난 3년 반 동안 함께 했던 정 때문만도, 이제 매일 밤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누구에게 위로받아야 하나 난감해서만도 아니다. 지금의 이별이 단순히 DJ 유와 가족들과의 잠깐의 헤어짐이 아니라, 어쩌면 한 시절의 종언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두려움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이란 말인가.

이제는 가족이 된 사람들이 주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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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알기 위해 지난 31일 시월의 마지막 밤, KBS 본관 1층 오픈 스튜디오를 찾았다. 많은 이들에게 유희열과의 이별만큼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재형과의 헤어짐이 예정된 날이다. 의 간판 코너, ‘La Vie en Rose’(이하 ‘라비앙 호즈’)의 메인 DJ 정재형과 보조 MC 유희열. 이 환상의 복식조의 만담 쇼도 이제 끝이다. 지난 몇 주 동안 정재형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과 ‘라비앙 호즈’ 가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마지막 밤, 정재형은 “제가 말이 안 되는 말을 해도 웃어주고, 제가 말을 못 하고 있을 때도 웃어주셨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여러분의 웃음은 요정을 탄생 시켰어요”라고 말했다. 옆에 앉은 유희열도, 스튜디오 부스 밖의 윤성현 PD와 김성원, 윤설야 작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오히려 허세를 떨며 고마움을 고백하는 가족을 보듯이.

가족 같다. 이 상투적인 말 외엔 이 날의 스튜디오를 감싼 공기를 표현할 방법이 없다. 생방송에 들어가기 전 대본도 준비된 선곡도 없이 “야, 음악 뭐 하지?” “첫 곡만 고르시죠”라고 정재형과 윤성현 PD가 주고받는 대화에서도, 부스 밖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 “요즘 희열이 사진 왜 이렇게 (웃기게) 찍어?”라며 웃는 김성원 작가의 말에서도, 추운 날씨에도 오픈 스튜디오를 찾아 온 수많은 청취자들의 얼굴과 “오빠, 이거 바깥에서 (준) 선물~”이라며 두 손 가득 선물 꾸러미를 안고 온 윤설야 작가의 품에서도 ‘가족’이라는 단어가 느껴졌다.

가족은 울타리다. 그 안에서 우리는 소속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같은 밥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는 실제 가족보다 더 가깝게 느껴질 수 있었던 건, 여기에 취향이라는 요소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에는 ‘내 이야기 같은’ 사연들과 멘트, ‘내 마음을 읽은 듯한’ 귀신같은 선곡들이 있었다. 이 이렇게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고, 척! 하면 착! 하며 위로해줄 수 있었던 건 이곳이 유희열과 그의 친구들을, 그가 소개하는 음악을, 그의 개그를 좋아하는 취향 공동체가 살아가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똑같은 노래를 들어도 출근길에 듣는 거랑 밤늦게 라디오에서 듣는 거랑 다르네요”라고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를 시작으로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웃어요, 그게 더 보기 좋아요, 그대의 여린 마음에 언제나 작은 위로 돼 줄게요’라던 유희열의 감성이 여전히, 아니 그 때보다 더 절실히 유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뜨거운 첫 인사를 나눌 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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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천민’은 지난 10개월 동안 ‘라비앙 호즈’에서 마치 ‘가오나시’처럼 “어…어…어…”만 연발하던 음악요정 정재형이 차세대 MC 유망주, 예능계의 다크호스로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했다. 스스로 고백했듯 “쓸데없이 부러지지 않고 유연성도 없고” 유난히 예민한 아티스트 정재형도 에서는 많은 것을 놓고, 편해질 수 있었다. 우리 역시 안타까운 사연에 울컥해 말을 잇지 못했던 요정님의 “알~레~~ 뾰~로~~롱~~~”에 학업과 일 그리고 사랑하는 이에게 지친 마음의 상처, 무엇보다 지난한 삶의 피로감을 위로 받고 치유 받았다.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고집 세고, 유난히 뻣뻣하고, 마음을 표현하는데 서투르다는 점에서 닮은.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던 건 파리로 가겠다는 정재형을 평소답지 않게 여러 번 붙잡아 ‘라비앙 호즈’를 맡겼던 유희열 덕분이었다.

‘자뻑’과 변태라는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를 내세웠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숨은 보석 같은 음악과 뮤지션을 소개하고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전통적 의미의 DJ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유희열. 흔히 뇌가 혀에 달린 ‘달변가’로 평가 받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잘 듣고 있기에 잘 말할 수 있었던, 가장 성실히 ‘들어주는 사람’이었던 유희열. 심야 라디오에 최적화된 이 독보적인 DJ를 중심으로 스태프와 게스트, 그리고 ‘라천민’이 함께 키워 온 이 공간과 시절은 여기서 일단락된다. 솔직히 두렵다. 과 DJ 유의 빈자리는 다른 방송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것이라서, 무엇보다 또 몇 년을 기다려 그가 라디오에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때는 아마 그도, 우리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일 것 같아서.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라디오가, 음악이, 이것을 함께 듣는다는 것의 의미가, 과거에서 지금으로 오며 달라졌듯 다가 올 날에는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는 게 지나친 비관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을 보내며 그저, 기도한다. DJ 유가 말했듯 우리 모두 한동안 허둥대겠지만 다시 만났을 때 우리 서로 너무 변하지 않고 철들지 않았기를, 좀 촌스러워도 여전히 외롭고 서투르기를. 다시 한 번 뜨겁게, 안녕! 이라고 첫 인사할 수 있기를.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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