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근우의 10 Voice] 스크롤을 내리면 치유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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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새끼는… 누구나 다 아는 뻔한 말을 항상 뻔하게 한다. 그게 진짜 짜증나.’ 웹툰 의 허세는 자신의 팬티를 벗겼던 꼬마 손님에게 암바를 걸었다가, 어찌 됐든 손님을 함부로 대했다는 것에 대해 사과하라는 선배 강해의 말에 이렇게 독백한다. 하지만 하일권 작가의 전작 의 주인공 호구는 말도 안 되는 허세를 부린 자신보다는 그런 자신을 때리고 괴롭히고 방관하는 친구들이 나쁜 거라는 로봇 시보레의 말에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말을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런데 당연한 그 말이… 왜 위로처럼 들리는 걸까.’ 반응은 다르지만 중요한 건, 그토록 당연하고 뻔한 말들이 그다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해나 시보레가 말하는 윤리적 기준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실제 세계에서 통용되는 가치들은 평균적인 것이다. 보편과 평균의 괴리. 여기서 하일권의 작품은 시작된다.

일상에 잠복 중인 폭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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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재 중인 을 제외하면 그의 작품들은 일상에 만연한 폭력에 주목한다. 여기에 영화 처럼 인면수심의 괴물들이 등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외모 바이러스라는 가상의 질병을 그린 에서 남학생들은 “너 같이 못생긴 년들이 오바하고 다니는 거 진짜 짜증나거든?”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에서 이유 없이 두들겨 맞는 호구에 대해 반 아이는 “만날 구석에서 여자애들 힐끔힐끔 보면서 이상한 그림만 끄적대니까 저렇게 맞는 게 당연”하다 말한다. 뉴스는커녕 교내 신문에서도 안 다룰 일이지만, 과연 당사자들에게 그 하루하루가 지옥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가학적인 상황은, 하지만 연예인 과거 사진을 보며 낄낄거리고, 주는 거 없이 미우면 따돌리는 게 다반사인 일상의 평균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상에 스민 폭력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비교적 악의 주체가 명확한 주호민 작가의 웹툰 ‘이승 편’에선 가택신과 저승사자가 히어로가 되어 그들과 대립한다. 에도 거대한 가위를 든 히어로 김삼봉이 등장하지만, 그는 싸우기보다는 상처 받은 대상을 치유한다.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외모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에게 “너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다독이는 삼봉의 위로가, 마술을 하고 싶지만 가난 때문에 입시에만 신경 써야 하는 여학생 윤아이에게 “하고 싶은 것만 하라는 게 아냐.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만큼 하고 싶은 일도 하라는 거지”라고 말하는 의 ‘ㄹ’의 조언이 세상을 바꿀만한 파괴력을 지닌 건 아니다. 실제로 정도를 제외하면 그의 작품에서 세상이 바뀌는 장밋빛 결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TV에선 여전히 메이크오버 쇼를 하고, (삼봉이발소) 학교에는 호구를 대신할 또 다른 호구가 등장하며 (3단합체 김창남) 어릴 적의 꿈을 다시금 이뤄보려 했던 소녀는 ‘시시한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말한다. (안나라수마나라) 다만 옳지 않은 세상보단 자신을 책망하는 주인공들에게 네가 틀린 게 아니라고, 쉽게 무너지지 말라 말하는 위로를 통해 최소한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라는 무책임한 낙관주의는 아니다. 그건 거짓말이거나, 고난을 극복하지 못한 책임을 당사자들에게 떠넘기는 알리바이일 뿐이다. 삼봉과 ‘ㄹ’이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 아닌, 오히려 과거의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철 안든 어른인 건 그래서 중요하다. 그들은 내가 그 고난 겪어봐서 아는데, 라는 식으로 말하기보다는, 힘들지만 같이 이겨내 보자고 한다. 그들의 삶이 긍정되어야 하는 건, 그 끝에 아름다운 미래가 있어서가 아니라 삶은 그 자체로 긍정되어야 해서다. 어머니의 부재 때문에 여자 수영복에 대해 집착하면서도 그것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자책하는 의 배수구가 과거의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장면이 감동적인 건, 무조건적인 자기 긍정과 화해의 순간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나를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온도 36도씨
[위근우의 10 Voice] 스크롤을 내리면 치유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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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작들과 비교해 가장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는 외형적 배경을 차치하고서라도 은 하일권의 작품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갖는다. 허세의 조력자 강 회장은 성공한 어른이며 허세가 일하는 금자탕은 ‘노력한 만큼 인정받고 진심을 담은 만큼 전해지는, 밖에서는 코웃음 치는 빛바랜 가치들’이 소중하게 다뤄지는 곳이다. 다시 말해 만화의 주 무대인 금자탕 안에서만큼은 보편과 평균의 괴리가 거의 없다. 기본적으로 웃음 위주의 구성이기도 하지만 이 하일권의 작품 중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느낌으로 편하게 볼 수 있는 건, 이런 낙관적 분위기가 전면에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전작들의 미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은 그 이후의 문제를 담아내는 듯하다. 하일권은 고교생 주인공에게 용기를 주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방식으로 세상의 폭력을 잠시 유예시킨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은 사회에 나가 직업을 선택하고 세상과 관계 맺어야 한다. 과연 그 안에서 어떻게 세상의 평균치에 쉽게 물들지 않을 수 있을까. 은 때밀이에 대한 직업윤리를 통해 사회화의 과정과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것을 일치시키려 한다. 별다른 꿈 없이 겉보기에 그럴싸한 삶만 따라가던 허세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 사이에서 고민하던 전작의 주인공들보다 더 대책 없다. 그의 ‘자뻑’은 오히려 공허하다. 언제나 셀카만 찍던 그가 때밀이의 삶에 익숙해지며 밖을 향해 눈을 돌리기 시작할 때, 처음으로 무언가에 대한 열망을 느꼈을 때 비로소 그는 세상과 관계 맺는 동시에 온전한 자기 삶의 주체가 된다. 물론 그 과정을 위해 스펙과 겉모습을 중요시하는 바깥세상과 단절된 금자탕이라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어느 정도 판타지이지만,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으면서도 세상이 쉽게 나아지리라 무책임하게 말할 수 없는 작가가 내놓은 최대한의 타협점일 것이다. 그래서 은 금자탕을 닮았다. 힘든 일상 속에서 잠시 쉬어 가시라고. 지치고 식어버린 마음, ‘나를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온도 36도씨’에 잠시 따뜻하게 담궜다 가시라고. 작품 속에서 이뤄지던 치유의 서사는 그렇게 작품 바깥의 우리 역시 어루만진다.

글. 위근우 기자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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