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나에게도 멘토 같은 비서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성 “나에게도 멘토 같은 비서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난 29일 종영한 SBS 의 마지막 장면에서 차지헌(지성)은 행복해보였다. 사랑하는 노은설(최강희)과 함께 걷는 길은 아름다웠고, 함께 나누는 키스는 달콤했고, 우산을 타고 내리는 빗방울조차 예뻐 보였다. 재벌 후계자가 되어 여자 주인공의 신분을 승격시켜주는 멋진 왕자님 대신, 그 여자를 위해 그리고 그 여자와 함께 자신이 살던 동네를 바꿔가는 평범한 남자의 길을 택한 차지헌은 참 멋진 남자였다. 아무리 노은설의 속을 뒤집어놓아도 얄미워 보이기는커녕 두 팔 벌려 안아주고 싶었던 건 차지헌을 연기한 배우 지성의 힘이 컸다.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눈망울엔 소년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고 입가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번지는, “사랑하기엔 참 부족한 차지헌을 그렇게 성장시킨 건 결국 사랑이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사랑스러운 지성을 만났다.

엔딩 신을 촬영할 때 최강희가 “지성 씨의 눈빛이 아련해서 울컥했다”고 말하더라. 그 땐 어떤 마음이었나.
지성: 엔딩 신을 찍기 이틀 전부터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라는 걸 느꼈다. 노은설과 난간키스를 했던 계단을 내려오면서 강희 씨와 그런 얘기를 했다. 이 나이에 이 시점에 우리는 여기서 멜로드라마를 찍었구나, 우리 둘한테는 좋은 추억이 많은 장소니까 오래오래 간직하자. 마지막 장면을 촬영할 땐 ‘이대로 카메라 쪽으로 걸어가면 진짜 끝나는구나’ 라는 생각에 그동안 노은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번 작품은 유독 가슴이 먹먹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지성: 차지헌이 노은설을 만나면서 공황장애를 치유하고 성장해가는 것처럼, 이 작품이 나를 치유해줬던 것 같다. 그동안 살면서 내 뜻대로 살아 온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는데, 덕분에 그 모든 게 유쾌하게 느껴졌다. 피곤한 와중에 그런 느낌을 받기 힘든데, 소소한 감정을 하나씩 하나씩 느껴가면서 촬영했다. 그래서 차지헌이라는 캐릭터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이라기보다는, 날 기분 좋게 만들어 준 작품이라 가슴이 먹먹했다.

“이번에는 전략을 짜는 대신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지성 “나에게도 멘토 같은 비서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성 “나에게도 멘토 같은 비서가 있었으면 좋겠다”
차지헌은 노은설의 정신을 쏙 빼놓는 ‘초딩’이면서도 늘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놓치지 않았다. MBC 의 은성을 보면서도 그런 사랑스러운 느낌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런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나. 실제로 그런 면이 있나.
지성: 내 모습이라기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솔직하게 표현했다. 차지헌이 서나윤(왕지혜)의 얘기를 듣기 싫어서 입으로 빨대를 물고 막 돌리는 장면이 있다. 그건 웃기려고 한 게 아니라 정말 그 상황이 따분하고 지겨우니까 나온 리액션이다. 차지헌을 표현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꾸미지 말자, 웃기려고 하지 말자, 귀여운 척도 멋있는 척도 하지 말자였다.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나를 놓게 되더라. 다리도 턱 벌리고, 주변 사람들 꼴 보기 싫으면 눈도 흘기고 툭하면 멍 때리고. (웃음) 예전에는 연기를 이렇게 해야겠다고 전략을 짰다면, 지금은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한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 캐릭터 연구를 할 때, 칠판에 그 캐릭터에 대한 모든 걸 써내려가면서 접근한다고 들었다. 이번에도 그랬나.
지성: 이번에는 칠판 대신 예쁜 노트에 썼다. 첫 장을 펴고 차지헌, 나이는 몇 살, 직업은 재벌 3세, 이렇게 썼다. 그 다음엔 공황장애가 있다면 왜? 얼만큼? 차지헌을 둘러싼 울타리의 크기는? 그 안에서 차지헌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사회에 대한 불만은? 이런 식으로 차지헌의 행동반경을 넓혀갔다. 이 모든 조건을 내 몸에 익숙하게 만든 후에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장에서 내 안의 진솔함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차지헌의 독특한 헤어스타일이나 말투도 그 과정에서 완성된 건가.
지성: 노트에 메모하면서 차지헌에 대한 그림이 딱 그려졌다. 헤어스타일도 처음부터 만화 의 송태섭 머리로 정한 게 아니라,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차지헌의 모습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힌트를 얻었다. 재벌 3세의 물건은 보통 비서가 다 챙겨주지만, 차지헌은 자기 물건은 자기가 챙길 것 같았다. 그러면 가방이 좀 커야 되고 그게 몸에 착 안기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럼 백팩을 사용하자. 그 다음에 패션은 구두에 멋진 수트? 에이, 차지헌은 안 그럴 것 같은데? 캐주얼하게 가자. 하지만 재벌 3세로서의 예의는 좀 갖춰야 되니까 뭐, 귀찮지만 재킷 정도는 하나 입어주자. 신발 같은 경우도 편하게 운동화를 신고.

차지헌-노은설의 달달한 로맨스 덕분에 드라마가 초반부터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그만큼 파트너 최강희와의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은데, 함께 촬영하는 건 어땠나.
지성: 첫 촬영부터 전혀 불편한 게 없었다. 강희 씨는 촬영장에 도착하면서부터 이미 노은설에게 몰입한다. 촬영장에 오면 혼자 고개 푹 숙이고 있었다. 뭐하냐고 물어보면 “응? 아니 그냥…”이라고 얼버무리면서 계속 그러고 앉아있는 거다. 나도 어느 순간 차지헌한테 몰입이 된 상태로 그렇게 앉아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둘이 눈 마주치면 엄청 뻘쭘해하고. 하하.

아직 연기 경력이 많지 않은 김재중과는 어땠나. 노은설과의 러브라인과는 별개로 ‘차차커플’도 꽤 인기가 좋았는데. (웃음)
지성: 연기는 가르치는 게 아니니까 조언해주는 건 한계가 있다. 그냥 내 경험을 들려주면서 차지헌과 차무원의 캐릭터가 어떻게 만났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나눴다. 재중이는 배우가 되기에도 충분한 친구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캐릭터에 몰입했기 때문에 얻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 효과를 우리도 봤고. 한 명이라도 낙오되면 스토리 자체가 흔들리는데, 그런 점에서 참 고마웠다.

두 남자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모습은 레스토랑에서 노은설을 두고 싸울 때였다. 여자들처럼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가 결국 차무원이 차지헌에게 ‘직선주먹’을 날렸는데, 당신 아이디어라고 들었다.
지성: 카리스마 있게 싸우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사촌지간이니까 어렸을 때 분명 치고 받고 싸웠을 테고 소꿉장난도 했을 거다. 무술감독님과 그런 부분을 어떻게 표현할까 얘기하다가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래, 머리를 잡자! (웃음) 둘 다 머리를 잡고 고개를 꺾으면서 넘어지자, 거기서 목과 다리를 조르면서 레슬링까지 해버리자. 그렇게 동선을 짜고는 재중이한테 물어봤다. “너 싸움 잘하냐?”, “저요?”, “아니, 너 말고 무원이 싸움 잘 하냐고?”, “안해봤을 것 같은데요?”, “그치? 내 생각에도 안 해봤을 것 같아. 그러면 너랑 나랑 각 잡고 싸울 것 같지도 않거든. 주먹을 요렇게 쥐고 때리자!” 눈빛은 막 이글이글한테 주먹은 직선으로 날리고. 하하.

네 사람이 단순한 사각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려면 배우들끼리 인간적으로 친해지는 과정도 필요했을 것 같은데 어땠나.
지성: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대본 리딩하겠다고 앉아있으면 어색하다. 어차피 드라마 장르도 밝으니까 촬영하기 전에 다같이 MT를 가자고 제안했다. 모닥불도 피우고 소주도 한 잔 마시면서 얘기하면 좋을 것 같았다. MT 가서 서로 이렇게 물어봤다. 지성은 어떤 사람이야? 재중이는 어떤 사람이야? 강희는 어떤 사람이야? 넌 어떤 걸 좋아해? 마치 진실게임 하듯이.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차지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이기 전에 성장드라마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것을 극구 반대하던 아버지에게 결국 인정받는 모습을 지켜보니 어떻던가.
지성: 차지헌은 참 사랑하기 부족한 친구다. 자기밖에 모르고 남 배려할 줄 모르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다. 심지어 일하기 싫어서 만화책 보고 게임하고 퇴근 빨리 하려고 도망 다니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노은설을 만나서 사랑을 시작하고 아픔을 극복했는데, 참 사람 사는 게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이번 드라마가 달랐던 건, 어른의 몸을 하고 유아기부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거다. 어린애가 어른으로 성장을 한 게 아니라. 차지헌을 그렇게 성장시킨 건 결국 사랑이었다.

겉으로는 어리광 부리고 유치한 행동을 하지만 가끔씩 툭툭 던지는 말이 사람들의 정곡을 찌를 때가 있었다. 마지막 회에서 아버지한테 “제 능력껏 마음 편하게 사는 게 더 좋아요. 그게 더 행복하다고요”라고 말하는 것도, 단순하지만 인생의 진리 아닌가.
지성: 그래서 차지헌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단순하게 돌아볼 수 있게 만든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다. 나이가 들면 다들 어른인 척 하고 센 척 하고 고차원적인 지식을 갖고 생활하려고 애쓰는데, 그건 너무 재미없지 않나. 진짜 자기 모습도 아니고. 그렇게 인생을 거창하고 어렵게만 생각하니까 소소한 것들에 대한 기쁨을 놓치고 사는데, 차지헌은 그렇지 않다. 차지헌을 통해 그런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도 힘든 건 별개의 문제다”
지성 “나에게도 멘토 같은 비서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성 “나에게도 멘토 같은 비서가 있었으면 좋겠다”
배우도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직업이다보니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 ‘척’을 해야 할 때가 있지 않나.
지성: 우리들이 굉장히 강한 척, 카리스마 있는 척하지만 알고 보면 연약하다. 작품을 통해 내 자신을 오픈시켜야 하는 부분이 많다. 울어야 하는 신에서는 진짜 울어야 하고, 아픔을 표현해야 하는 신에서는 진짜 아픔을 표현해야 하니까 감정에 쉽게 흔들리고 나약해진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서 외롭지 않을 것 같지만 외로움을 참 많이 타는 직업이다.

그래서 자기중심을 지키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연기 외적으로도 흔들릴 수 있는 요소가 많지 않나.
지성: 한 번은 지인한테 이런 얘기를 들었다. “넌 즐거운 일을 하니까 참 편하고 좋겠다. 너네들이 방송 나와서 힘들게 고생했다고 얘기하는데 세상에 그 정도 고생 안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좀 듣기 거북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도 힘든 건 별개의 문제다. 어떤 분이 1차 술자리를 끝내고 2차 술자리에 가는 차 안에서 음악을 들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이 참 와닿았다. 약간 취한 상태니까 뭘 해도 즐겁고, 다음 장소에 간다는 기대감이 있으니까. 배우는 사람들에게 그런 즐거운 기대감을 항상 유지시켜줘야 하는 사람이다. 특별하진 않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배우들 옆에도 노은설 같은 비서가 있어야겠다. (웃음)
지성: 인정한다. 하하. 내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케어해주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멘토 같은 비서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 차지헌이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다 노은설 덕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SBS 이후 꾸준히 주연을 맡아오면서 큰 굴곡 없이 배우생활을 해왔다. 그만큼 배우로서 신뢰를 받고 있다는 증거인데, 그동안 배우 지성이라는 브랜드를 어떻게 쌓아왔던 것 같나.
지성: 좀 시간을 길게 잡았던 것 같다. 어차피 내가 송승헌처럼 잘생긴 배우는 아니니까 나만의 개성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다보니까 사고방식 자체가 답답한 면이 있었다. 이걸 깨자, 다양한 캐릭터로 부딪히자. 그래서 SBS 을 하게 됐고, 그 다음엔 사극 를 선택했고 어려운 영화에도 출연했다. 이제 연기에 대해 좀 알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2%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렇게 2% 부족한 상태에서 군대 영장이 나왔다. 진짜 미치겠더라. 하지만 군대를 다녀와서 마음이 좀 편해졌다.

군 생활이 가져다 준 변화였나.
지성: 그 안에서 혼란스러운 부분도 정리하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연기할 지 결정하다보니 여유가 생겼다. 제대하고 나서 MBC 부터 다시 시작했다. 한 길로 직진해서 달리면 빨리 도착할 수 있는데,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난 계속 이렇게 빙 둘러왔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처음부터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좋으니까 열심히 한 거였다.

속도는 상관없다는 뜻인가.
지성: 속도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냥 롱런했으면 좋겠다. 나이를 떠나 언제나 함께 대화할 수 있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친구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 역의 박영규와 함께 촬영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을 것 같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까지 롱런하고 있는 선배인데.
지성: 선생님이 연세가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젊은 후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주신 게 정말 좋았다. 본인 연기만 하시고 빠지시는 게 아니라 함께 해주셨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 나도 나중에 나이가 들면 그렇게 할 거다. 그 힘이 떨어지면 연기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모든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는 거다.

현장에서 작품 외적인 얘기도 많이 나눴나.
지성: 선생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섣불리 나눌 수 없었던 게, 몇 년 전에 선생님 아드님이 돌아가셨다. 그래서 내가 아들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것조차 죄송스러웠다. 아드님이 떠나시기 전에 선생님이 못해주셨던 부분들, 부족했던 부분들을 극 중에서라도 나한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지니까 가끔씩 울컥했다. 말하지 않아도 선생님 눈을 보면 그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회에서 노은설과의 교제를 허락해 준 아버지를 와락 안는 장면이 짠하게 다가왔다.
지성: 리허설 때부터 감정이 올라왔다. 마당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서 선생님을 쳐다보는데, 와 미치겠더라. 그 상황이 엉엉 울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냥 아버지를 안으면서 살짝 눈시울이 붉어지는 정도여야 하는데, 아버지를 안고나서… 되게 슬펐다. 선생님을 보면 참, 인생이라는 게 쉽지 않구나, 어려움도 많으셨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를 통해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인생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도 가졌는데, 배우로서 가장 크게 얻은 게 있다면 뭔가.
지성: 나한테 용기를 줬다. 다음 작품에서도 내가 확신을 갖고 삶에 대해 얘기할 수 있고 인간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오랫동안 영화를 안 해서 아마 차기작은 영화가 될 것 같은데, 내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캐릭터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들도, 나도 기뻤으면 좋겠다.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장경진 thre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