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남을 신경 쓰고 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무엇을 원하는 지에 더 신경이 쓰이지 남들이 저한테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아요.” 2007년 <밀양>으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전도연의 이름은 ‘칸의 여왕’, ‘칸이 인정한 여배우’ 등 국제적인 수식어에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늘 “느껴지는 만큼” 연기했을 뿐인 그녀에게 이 요란한 공치사는 그저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저를 둘러싼 수식어들이 롤모델, 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건 남들의 시선일 뿐이에요. 그들이 제게 얼마나 기대하고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것만 열심히 하면서 살고 싶어요. 물론 그런 수식어들이 기분이 좋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이런 모습의 배우로 남아야 돼’ 그런 건 없어요.”

이것은 <밀양> 이후 <하녀>로 다시 한 번 칸을 찾은 뒤에도 <카운트다운>을 선택한 전도연의 근거가 된다. 온전히 아이를 잃은 후의 신애의 뒤를 ?았던 <밀양>과 <하녀>로 여전히 극의 무게 중심이었던 그녀를 지켜본 이들에게 <카운트다운>은 의외의 한 수다. “태건호(정재영)의 드라마”를 더 꼬이게 만드는 차하연은 “장치적인 캐릭터”로 소비될 수 있고, 분명 이야기의 “주”가 아니다. 순간 순간 배우로서 도드라지고 싶은 욕심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전도연은 담담히 답했다. 그리고 그 안에 모든 배우가 귀담아 들었으면 하는 열연과 과잉의 경계에 대한 지침이 있었다. “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어요. 차하연은 이미 만들어진 게 완벽한 캐릭터라서 거기다 무언가를 더하면 오버가 될 수 있어요. 그냥 ‘적당히’가 베스트였죠. 그녀의 드라마가 아니니까. 덜하지도 않고 너무 빠지지도 않고 적당한 수준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어요. 제가 주가 아니라 일부이더라도 작품이 좋으니까 한 것이고, 그 안에서 어떤 몫을 해야 할지 알아야죠.” “연기 앞에선 선후배도 없다”고 생각하고, “연기 외엔 끊임없이 열정을 가지는 것”도 없는 투철한 배우 전도연. 그럼에도 자신이 배우란 것을 잊게 되는 순간은 영화를 볼 때다. 다음은 그녀를 여배우가 아닌 순수하게 관객으로 돌아가게 만든 영화들이다.




1. <첨밀밀>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1996년 | 진가신

“참 아름다운 영화죠. 말랑말랑한 멜로이면서도 아련함이 오래 남는 사랑 이야기예요. 물론 여배우로서 장만옥이 연기한 여자 주인공은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물론 들지만 요즘은 로맨틱 코미디가 더 좋을 것 같아요. 밝고 즐거운 드라마를 찍고 싶더라구요. 보고 있으면 그냥 즐거워지는 그런 작품이요.”

친절하지 않은 홍콩이라는 대도시에 꿈을 찾아온 가난한 소군(여명)과 이요(장만옥)는 닮았다. 등려군의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10여 년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도 온전히 사랑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달콤하다는 뜻의 제목처럼 달콤한 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추억을 만들어가는 소군과 이요 같은 연인들 덕택에 건조한 도시도 조금은 물기를 머금는다는 것이다.



2. <귀향> (Volver)
2006년 | 페드로 알모도바르

“제가 원래 감독이나 배우들의 이름을 잘 못 외워요. 그래서 ‘이 영화 보니까 너무 좋더라’ 그리고 ‘저 영화도 진짜 좋더라’ 하고 얘기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두 영화, 감독이 같은 사람이야’ 할 정도거든요. (웃음) 그런데도 페넬로페 크루즈 이름은 기억하죠. 너무 좋아하거든요. 할리우드 영화에서 처음 그녀를 봤는데, 그 때는 그렇게 인상에 남진 않았어요. 그런데 <귀향> 같은 스페인 영화에서 보면 너무 좋더라구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에서 색은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으며 등장한다. 완벽하게 배치된 보색과 문양들은 때로는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다. <귀향>에서도 여주인공의 부엌에서, 옷장에서 감독 특유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와 가족들의 아픔과 치유를 통해 깊이를 얻는다.



3. <빨간 구두> (Don`t Move)
2004년 | 세르지오 카스텔리토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놀랐어요. 페넬로페 크루즈가 연기한 이딸리아야 말로 진짜 팜므파탈이 아닌가 싶어요. 차하연도 그렇고, 한국에도 팜므파탈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많았지만 이딸리아 만큼 치명적일까요? 너무 멋있었어요. 감동을 참 많이 받아서 가슴이 벅찰 정도였죠. 강하고, 강렬하고, 가슴 아픈 영화예요. 제가 본 영화중에서 이 정도로 치명적인 여자가 있었나 생각해봤는데 없더라구요. 욕심나는 캐릭터냐구요? 아니에요, 영화 보는 내내 ‘난 못하겠다’ 싶던걸요. (웃음)”

벌어진 앞니, 퀭한 두 눈, 남루한 옷차림. 언제나 아름다웠던 페넬로페 크루즈는 <빨간 구두>에서 모든 것을 벗어 던졌다. 실제로도 “감정적으로 벌거벗었다”고 밝힌 바 있는 그녀가 연기한 이딸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사랑뿐이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결국 자신은 지키지 못한 그녀, 그리고 모든 것을 가졌지만 끝내 이딸리아와 함께 하지 못한 띠모떼오(세르지오 카스텔리토). 이들의 빨간 구두 한 짝에 담긴 비극의 무게는 오랫동안 마음을 짓누른다.



4. <오픈 유어 아이즈> (Open Your Eyes)
1997년 |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그러고 보니 페넬로페 크루즈는 정말 좋은 작품에 많이 출연했네요. 페넬로페 크루즈의 매력이요? 일단 예쁘고, 연기도 잘 하고. 또 그게 다 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거든요.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를 보고 놀란 적이 많아요. <오픈 유어 아이즈>에서도 역시 절 놀라게 했죠.”

사고로 얼굴을 잃게 된 세자르(에두아르도 노리에가)는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사랑하는 여자에게도 버림 받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모든 비극이 환희로 뒤바뀐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지우면 슬픔도 지울 수 있기에 눈을 떠도 여전히 꿈을 꿀 수밖에 없는 한 남자의 세계가 스릴러와 미스터리, 판타지를 오가며 펼쳐진다.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바닐라 스카이>보다 원작인 <오픈 유어 아이즈>를 먼저 볼 것을 권한다.



5. <그녀에게> (Talk To Her)
2002년 | 페드로 알모도바르

“직업이 배우지만 영화를 볼 때, ‘저 배우는 어떻게 연기 했나’ 고민하면서 보진 못해요. 순수하게 관객으로서만 봐요. 영화는 객관적으로 보고 어떤 캐릭터를 욕심내거나 염두에 두면서 보진 않아요. <그녀에게>에도 정말 좋은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건 그 배우들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고, 저는 나름대로 한국에서 배우로서 누릴 수 있는 걸 누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부럽긴 하죠. 그녀들에겐 다양한 작품들이 있고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여배우가 아니라 배우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녀에게>는 아름답다. 햇살에 푹 잠긴 스페인의 곳곳은 연인들의 과거와 현재를 예쁘게 윤색해준다. <그녀에게>는 슬프다. 이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식물인간이 된 연인과의 사랑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는 기묘하다. 두 연인들의 사랑을 고운 색으로 칠하지만 ‘저들이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사랑인가’하는 의문을 끝내 지우지는 못한다. 제 75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수상작.




“뭐든 의도하거나 계획하거나 어떤 캐릭터나 작품을 꿈꿔서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충실한 것 외에는 답이 없더라구요. 어떤 분들은 제작도 해봐라 조언하기도 하는데 저는 그렇게까지 적극적인 배우는 아니에요. 그냥 할 수 있는 것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게 제일 저답고 그렇게 해왔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소극적일 수 있는데 그 이상의 무엇이 제게 없더라구요. 연기 외에 끊임없이 열정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일도 없구요. (웃음)” 배우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말하는 전도연의 대답은 기운이 빠질 정도로 거창하지 않다. 그녀 앞에는 그저 매 순간 “혼자 카메라 앞에서 견뎌”왔던 지난날과 현재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심심한 대답에 오히려 안심이 되는 건 왜일까. 전도연은 앞으로도 그녀의 마음이 가는대로 연기를 할 것이고, 그 빛나는 순간들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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