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런닝맨’(이하 ‘런닝맨’)에 출연한 장혁은 물었다. “런닝맨은 결과를 위해서는 과정은 상관 없는” 방송이냐고.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상대팀인 개리에게 휴대폰으로 가짜 미션을 전송한 유재석과 지석진의 음모는 분명 정정당당함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적어도 ‘런닝맨’의 세계 안에서는 허용될 뿐 아니라 권장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우승자가 되기 위해서 협잡과 꼼수가 난무할수록, 그래서 장혁의 의문이 반복될수록 역설적으로 ‘런닝맨’은 과정을 말하는 프로그램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최근 몇 달간 ‘런닝맨’의 우승자가 누구였는지, 우승 혜택은 무엇이었는지. 이제 이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것은 우승자가 아니라 누가 게임의 흐름을 주도했는가의 문제다.

‘런닝맨’은 어떻게 회생했나
[윤희성의 10 Voice] ‘런닝맨’이 발견한 새로운 리얼리티
[윤희성의 10 Voice] ‘런닝맨’이 발견한 새로운 리얼리티
물론 방송 초반에는 ‘런닝맨’ 역시 게임의 승패에 대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패자들에게 가해지는 벌칙은 게임에 몰입하게 하는 동기를 성장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런닝볼 확보 여부와는 별개로 복불복이나 다름없이 진행된 패자 결정 방식은 프로그램의 흐름과 좀처럼 융화되지 못했다. 따라서 아무리 야외로 무대를 이동하고 스케일을 확장시켜도 ‘런닝맨’은 ‘X맨’을 전후로 SBS에서 성행하던 스튜디오 게임쇼의 연장선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상황극이 주는 일상적인 재미를 지워냈다는 점에서는 ‘패밀리가 떴다’로부터의 발전 여부조차 의문스러운 지경이었다. 다만 몸을 움직여 보다 넓은 공간을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는 ‘당연하지’의 허무함이나 ‘아침 기상 퀴즈’의 단조로움을 타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전을 면치 못하던 ‘런닝맨’이 회생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코너였던 추격전을 방송 전체의 흐름으로 확장시키면서부터다. 출연자들은 녹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레이스에 참여하게 되고, 그 순간부터 긴장은 발생된다. 더이상 ‘런닝맨’은 출연자들이 무의미하게 카메라 앞을 서성이며 목적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방임하지 않는다. 게스트들은 게임을 통해 자신의 정체와 성격을 드러내면서 등장하고, 심지어 착석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토크에도 비밀 미션이 숨겨져 있는 식이다. 그러나 방송은 처음부터 끝까지 게임의 과정을 보여주면서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출연자들이 쌓아온 승패의 역사가 이들의 승부욕에 설득력을 더한다. 강자인 김종국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혹은 그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나머지 멤버들은 작전을 짜고 연대를 꾸린다. 학습된 정보가 인물의 행동을 본능이라 설명하고, 결국 이것을 통해 승부는 그 자체로 현실적인 긴박감을 얻는 것이다.

과도 ‘1박 2일’과도 다른 ‘런닝맨’
[윤희성의 10 Voice] ‘런닝맨’이 발견한 새로운 리얼리티
[윤희성의 10 Voice] ‘런닝맨’이 발견한 새로운 리얼리티
그래서 ‘런닝맨’은 그 의도와 별개로 결국 예능에서 리얼리티의 힘을 증명하는 사례가 되었다. 이것은 다만 장난감 말을 타고 스폰지 망치를 휘두르는 시대가 지났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승리의 대가로 이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의 허구적인 관계에 호응하는 순진한 시청자는 이제 멸종했다. 게임의 규칙이 복잡하고 정교할수록 출연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승부수를 던지고, 시청자들은 그 과정을 통해 출연자를 분석한다. 그리고 게임에 밀착해 인물의 본성을 바탕으로 구축된 캐릭터들은 좀처럼 붕괴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규칙을 재해석하고 법칙을 변주하며 스스로 진화한다. 이제 ‘근육맨 꾹이’보다 중요한 것은 힘은 세지만 여자에 약한 김종국 특유의 성격이며, 그러한 그의 특징을 이해하여 나름의 돌파구를 찾는 각자의 판단이 그 자체로 캐릭터화 되는 것이다.

리얼한 쪽으로의 변화는 제작진에게도 해당된다. 이제 ‘런닝맨’은 게임의 규칙과 정보를 필요에 따라 공개하며 편집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연자들이 서로 심리전을 벌이는 동안 제작진은 시청자를 상대로 심리전을 유도한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우승자가 아니라 얽히고설킨 타래가 풀리는 지점에 주목하게 된다. 때때로 카메라는 게임을 하는 출연자를 놓치기도 하지만 긴장의 서사 안에서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런닝맨’의 리얼리티는 현실의 현상들을 사실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3D 안경을 쓴 덕분에 느낄 수 있는 생생함에 가까우며, 이것은 이 프로그램이 KBS ‘1박 2일’처럼 현실세계의 사람들과 감정을 교류하거나 MBC 처럼 감동이나 교훈을 지향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컨대, ‘런닝맨’의 리얼리티는 오직 게임을 통해 발생하고 게임을 위해 사용된다. 지금 이 프로그램이 흥미로운 건 그 때문이다. 리얼리티가 예능 프로그램의 윤리처럼 강요되는 시대에 ‘런닝맨’은 세상과 단절된 우물 속의 리얼리티로 오히려 가열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호모 루덴스를 위한 새로운 리얼리티가 발견된 것이다.

글. 윤희성 nin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