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성장은 상실에서 시작된다. 더 이상 가질 수 없을 때 그 소중함이 발현된다는 슬픈 진리. <최종병기 활>의 서군은 그 명제를 증명해내는 인물이다. 그는 쇠꼬챙이 하나로 자신을 지키는 자인(문채원)보다도 연약한 존재였다.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언제나 뒤에 서있었고, “자인과 혼인하고 싶습니다”라고 배짱 좋게 말해도 정작 혼인하라는 말에 연신 딸꾹질을 해댈 정도로 허당기도 다분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부모님을 잃고, 부인 역시 지키기 못했다는 사실이 서군을 어른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죄책감이나 무력감 같은 것들이 사람을 한도 끝도 없이 잡아 끌어내리는 것 같아요. 서군도 소위 폐인이 되어 그 안에 파묻혀 평생을 살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는 여러 사건과 남이를 계기로 그 안에서 나와 행동하는 인물이 돼요.”

온실 속 화초였던 서군이 제 발로 뚜벅 뚜벅 걸어 나와 야생의 잡초가 되었듯, 막 서른이 된 김무열의 삶과 작품에서도 어떤 변화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뮤지컬무대 위의 그는 <쓰릴 미>, <스프링 어웨이크닝> 그리고 <광화문 연가>에 이르기까지 외로움과 자신감, 그리고 호기심이 기묘하게 섞인 불안한 청춘의 초상이었다. 하지만 <최종병기 활>의 서군과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스카이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는다. 상실의 경험은 도리어 삶의 의지를 북돋았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가르침도 남겼다. 그 결과 이들은 목숨을, 재산을 걸고 전진한다. 그렇게 실수 많던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두려움을 극복하며 남자가 된다. 캐릭터와 함께 성장통을 앓아온 김무열이 “인생을 가르쳐준 영화”들을 선택한 것도 우연은 아닌 셈이다.




1. <대부> (Mario Puzo`s The Godfather)
1972년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대부>는 시간 날 때마다 보는 영화인데, 최소 서른 번은 본 것 같아요. 밤에 잠 안 올 때 영화나 볼까? 이러잖아요. 그때마다 늘 <대부>를 봤어요. 그리고 1편을 시작하면 자동적으로 2편, 3편까지 쭉 이어서 보면서 결국 밤을 새죠. (웃음) <대부>는 한 남자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에요. 먼저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 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가 된 아들의 이야기까지. 남자의 인생이 이 영화 한 편에 전부 다 녹아있는 것 같아요.”

3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21세기의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보편적인 감성을 그려낸 영화. 뒷골목의 이야기를 어둡게 그리지만, <대부>는 ‘가족’을 이야기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아버지를 부정했으나 결국 그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버린 마이클 역의 알 파치노의 연기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2. <제리 맥과이어> (Jerry Maguire)
1996년 | 카메론 크로우

““가슴이 비었다면 머리는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대사가 나와요.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 영화에요. 어릴때는 모호하게 힘든 과정을 일부러 선택한 제리 맥과이어를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이젠 알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영화도 10번 이상 본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해피엔딩을 좋아하기도 하구요. (웃음)”

이 영화에는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내용들로 가득차있다. 특히 서로의 믿음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제리, 도로시, 로드의 모습은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잘생긴 남자 그 이상의 평을 받지 못했던 톰 크루즈가 본격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작품.



3. <다우트> (Doubt)
2008년 | 존 패트릭 샌리

“우리나라에서는 연극으로 더 유명한 작품이에요. 신부와 원장수녀 사이의 의심과 둘의 마찰을 그리는데, 영화에서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이 출연했죠. 일단 그 두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인상 깊었어요.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 같았거든요. 불꽃 튀는 연기 대결 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라는 걸 느꼈죠. (웃음) 뮤지컬 <쓰릴 미>가 2인극인데, 그런 점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았구요.”

2004년 브로드웨이에서 좋은 평을 받은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 국내에서는 2006년 김혜자가 원장수녀 역을 맡아 공연되기도 했다. 가톨릭에 대한 영화이면서도 종교를 떠나 의심과 확신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4. <본 아이덴티티> (The Bourne Identity)
2002년 | 더그 라이만

“본 시리즈를 다 좋아해요. 본 시리즈를 시작으로 007이 얻어맞기 시작한 것 같아요. (웃음) 특히 본 시리즈는 스토리 라인이 좋은데, 기억을 잃은 첩보원이 자아를 찾아나서는 여정이라는 게 맘에 들었어요. 최근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을 하면서도 진짜 내가 누구인가, 그런 질문들을 계속 해왔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맞닿아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맷 데이먼 같은 배우가 되고 싶기도 하고. 똑똑해 보이는. (웃음)”

제이슨 본(맷 데이먼)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본은 “뭘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한다. <본 아이덴티티>는 액션에 철학적 사유까지 담아냄으로써 스파이 스릴러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특히 다수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작전을 시작하는 수뇌부들의 행동은 그 어떤 반전보다도 섬뜩하게 다가온다.



5. <고백> (Confessions)
2010년 | 나카시마 테츠야

“일본 영화 특유의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작품이었어요. 감독이 60세가 다 되어 간다고 하던데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나 영상 등이 굉장히 감각적이었죠. 낮고 짙게 깔리는 구름이라든지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듯한 슬로우 모션 같은 것들이요. 특히 옴니버스라고 느껴질 정도로 단락별로 구분되는 구조와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에서도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불량공주 모모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등의 영화를 통해 우울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들을 발랄한 톤으로 그려내왔다. 하지만 <고백>은 음산한 분위기의 블루톤을 유지하며 관객에게 삶과 생명에 대한 질문을 묵직하게 던진다. 내 생명은 무거워도 다른 생명은 가벼운가,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이란 있는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 수 있을까.




활을 단 한 차례도 쏘지 않지만 길거리를 지나가면 “활이다 활!”이라는 말을 듣는다는 걸 보니 김무열이 대중의 위시리스트에 들어간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동안 말로만 ‘서른이면 남자배우의 전환점’ 이랬었는데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씩 변했다는 것이 피부로 좀 와닿는 느낌이에요. 예전이 청년이었다면 이제는 베드신도 있는 (웃음) 성인남자 캐릭터가 많이 들어오거든요.” 180cm을 훌쩍 넘는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 아이처럼 짓는 미소까지 그는 훌륭한 외형적 조건을 갖췄다. 하지만 그가 더 아름다운 것은 현재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간접경험이 아닌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내가 지금 흉내내기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고.”

그런 그가 지금의 고민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영화 <개들의 전쟁>을 만났다. “딱 서른 되기 직전의 남자들 이야기라서 닿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경기도 변두리 지역에서만 살아온 할 일 없는 청춘들인데, 커다란 임팩트는 없지만 감정이 디테일하게 살아있어요. 남자들이라면 분명히 공감할 이야기에요.” 김무열은 가장 멋진 남자로 자기 삶을 살아내는 사람을 꼽았다. 스스로는 아직 한참 멀었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지금 여기 새로운 남자가 탄생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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