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 “영화가 나오면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요”
홍상수 감독 “영화가 나오면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요”
* 이 기사에는 영화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홍상수의 연구실은 좀처럼 불이 꺼지지 않는다. 지난 해 초여름과 가을 와 를 내놓은 그가 오는 9월 8일 공개하는 12번째 보고서 은 여전히 흥미롭고 예외 없이 꼼꼼하며, 특별히 아름다운 겨울의 기록이다.

이후 원래 부안에서 영화를 찍을 예정이셨죠?
홍상수: 예, 그랬죠. 그런데 찍을 시기가 되었는데도 전혀 뭐가 안 떠올랐어요. 그래서 프로듀서가 생각 좀 정리하라고 아는 사람을 통해 인사동에 있는 레지던스 호텔을 이틀 정도 잡아주었거든요. 거기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다가 보니 북촌이 보이길래 아, 북촌에서 뭘 하나 찍으면 어떨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신 이전 영화들이 전개되는 속에서 내가 반복점을 찾아내는 형태였다면 이건 전체가 통으로 반복되는 재료를 품고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죠. 한 남자가 같은 곳을 세 번 간다, 그러면 뭐가 나올까 보자, 그렇게 시작된 영화였죠.

혹시 ‘북촌’이라는 곳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나 인상이 있었던가요?
홍상수: 아니요. 오히려 내 마음 속에서 그곳에 대한 이미지나 생각을 말로 정리해 놓고 들어가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죠. 미리 정해 놓으면 그 방향으로 몰아가게 되잖아요. 그냥 저기 가 보자. 그저 부서진 조각들이 나를 통과해서 나오고, 그 통과된 조각들끼리 새로운 관계들을 만드는 걸 보자고.

“은 대강의 줄기란 게 아예 없었어요”
홍상수 감독 “영화가 나오면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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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연인 경진과 술집 주인 예전을 모두 배우 김보경 씨가 연기합니다. 얼굴이 닮은 여자, 그러나 태도는 많이 다른 여자를 설정해 놓은 이유는 뭘까요?
홍상수: 의도를 가지고 구상한 건 아니고 순서대로 찍어 가다보니 그렇게 만들어 진 거예요. 김보경 씨와 함께 영화를 찍기를 결정한 이후 성준(유준상)이 술 취해서 옛날 애인 집으로 찾아가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고, 그 장면을 찍고 난 이후 북촌에 새로운 여자를 만들어야겠다고 확정을 한 거죠. 이후 경진은 문자 메시지로만 등장하구요. 때 까지는 영화 전체의 전개를 대충이라도 생각했는데 부터는 아예 그런 큰 그림조차 안 그리기 시작했어요. 도 배우하고 장소만 대충 정해 놓고 촬영해가면서 신을 만들어간 형태로 만들었고요. 닮은 여자 설정도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거예요. 이후의 장면들을 위한 복선을 깔아주거나 연결점을 미리 만들어 놓는 게 정석이라면, 이건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그냥 감으로 나아가는 거거든요.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데 하여튼 아침엔 완전히 모든 방향으로 열려요. 대강의 줄기란 게 아예 없다고.

사실 아주 위험할 수도 있는 방식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실험에 스스로를 던지는 이유가 뭘까요.
홍상수: 그렇게 내 속에서 다른 걸 할 수 있도록 나를 유도하는 거죠. 데뷔부터 세 번째 영화까지는 전체 시나리오를 대사까지 다 썼어요. 그러다가 트리트먼트만 가지고 찍은 게 이었죠. 그런데 를 찍고 나서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트리트먼트 가지고 매일 생각하는 방식을 그만두고 싶다고. 다른 방식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죠. 결국 트리트먼트도 점점 줄다가 때부터는 아예 전체 전개를 생각하지 않게 된 거죠. 다른 틀에서 나를 움직이게 해보자, 그리고 뭐가 나오나 보자. 그게 궁금하더라고요.

에서 “너는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되게 약한 여자다” 식의 극과 극을 잇는 말을 해주면 대부분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지적이 흥미로웠어요. 그게 보편적인 트릭이라는 설명을 다 듣고 난 다음에도 여자들이 자기가 정말 그렇다고 고백하는 것도 재밌고요.
홍상수: 첫 촬영 끝나고 나서 맥주 한 잔하는데 배우 김의성 씨가 해준 이야기예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다 복잡하다고 생각하고 사니까요. 남들 시선에 맞춰서 자신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어서 보이는 것에 대해 억울함 같은 게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해주면 일단 자기에 대해 깊이 아는 것 같다고 착각하는 거죠.

스스로도 복잡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홍상수: 나를 포함해서 사람 자체가 복잡하죠. 그런데 항상 단순화해서 이야기하는 걸 강요받잖아요. 그런데 언어를 통해 남을 표현한다는 게 한계가 있단 말이죠.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고 하는 이유 역시 그런 거죠. 말을 통한 지나친 단순화에서 벗어나서 원래 있는 그대로, 그나마 비슷한 지점에서 다가가 체험하고 싶어서.

술집 주인 예전(김보경)의 입에서 “오빠”라는 말이 터져 나왔을 때 객석에서 그야말로 팡-하고 웃음이 터졌어요.
홍상수: 예전인 동시에 경진이 그 몸 속에 들어와 있는, 둘이 섞여 있는 느낌이 들면 좋겠는데 무슨 말을 써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오빠’ 가 좋은 것 같더라고요. 그 전엔 ‘선생님’이라고 불렀거든요.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그 ‘오빠’라는 부름 한 번에 두 사람 사이의 경계가 확 하고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홍상수: 우리나라 사람에게 호칭은 별 게 아닌 게 아니죠. 호칭 하나 못 바꿔서 평생 끙끙대는 사람도 있는데.

“유준상은 뭘 해도 거슬리지가 않아요”
홍상수 감독 “영화가 나오면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요”
홍상수 감독 “영화가 나오면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요”
, , 에 이어 촬영을 마친 까지 함께하게 된 배우 유준상은 어떤 자극 혹은 어떤 기운을 주는 사람인가요?
홍상수: 그냥… 좋아요. 되게 좋아요. 적극성이 안 거슬리는 사람이에요. 솔직함도 안 거슬리고 에너지도 좋고. 에너지의 색도 깨끗하고. 같이 작업하면서 저한테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옆에서 말을 많이 해도 하나도 거슬리지가 않아요. 귀엽잖아요. (미소)

뭔가 소스라치게 놀란 듯한 성준(유준상)의 얼굴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꽤 오래 잔영으로 남게 됩니다.
홍상수: 제가 그런 이야기를 잘 안 하는 편인데 그 클로즈업은 중요하게 말을 따로 했던 것 같아요. 사실 라스트 신을 따로 생각하고 찍긴 했는데 엔딩으로는 그게 좋겠더라고. 눈도 좋고.

유준상의 눈요?
홍상수: 그 눈도 좋고 하늘의 눈도 좋고요. (웃음)

에 이어 에서 두 번째로 흑백을 선택하셨는데요. 당시 인터뷰에서 “컬러의 많은 정보량이 자칫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선을 무디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 하신 걸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이유일까요?
홍상수: 그때는 그냥 관념적으로 그렇게 대답했겠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은 컬러로 촬영되었고 편집 끝날 때 흑백이 어떨까 바꿔서 보니까 더 어울리고 좋더라고요. 다행히 운이 좋았죠. 흑백 영화는 조명을 비롯해 좀 다르게 찍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실내 장면의 조명 구조 덕에 콘트라스트가 강하게 촬영 되었고 의상들, 특히 김보경 씨가 입은 하얀 블라우스 같은 것들도 흑백으로 보기가 좋았어요. 개인적인 취향인데 서울의 겨울이 흑백이랑 맞는다고 생각한 게 있나 봐요. 도 서울이고 겨울이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 종종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긴 합니다. 특히 남자 주인공은 외형적으로도 홍상수 감독을 많이 닮아있고 직업들도 영화감독 혹은 영화과 교수 등 관계자들입니다. 굳이 이렇게 오해하기 쉬울 길을 선택하는 이유가 뭘까요?
홍상수: 캐릭터적으로 빌려오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을 통으로 가져오는 일은 절대로 안 해요. 그건 제 자신이건, 지인이건 똑같고요. 나 역시 그냥 영화의 재료일 뿐이에요. 작업을 하면서 가장 풍요롭게 재료를 얻는 곳인 거죠. 하지만 아무리 가깝게 그리려고 해도 가까울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똑같이 옮겨 놓아도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일단 배우가 그 중심의 재료로 들어가고 콘텍스트가 다르니까요. 제가 초기에 생각한 인물과 배우를 만난 이후 환기되는 인물이 서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인력이 생기고, 그 긴장 관계 속에서 어떤 새로운 인물이 완성되는 식이에요. 그러니까 누군가 실존인물을 떠올린다고 해도 저는 전혀 부담이 없어요. 오히려 불편할 정도로 가까운 건 못하죠. 대신 너무 멀면 재료 자체가 가진 힘이 없어지고 너무 가까우면 자폭하니까 그렇게 계속 겨루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의 기준이라면 모델이 되었던 그 사람이 영화 보고 나와서 기분만 안 나쁘면 돼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항의하신 분들은 없으셨나 보군요. (웃음)
홍상수: 딱 한 번 있었어요. 예전에 을 보고 교수 한 분이 약간 농담처럼 가시 돋친 말로 자기들 교수 모임 하는 걸 영화가 똑같이 따라했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나는 그걸 쓰면서 한 번도 그 모임을 생각한 적도 없었거든요. 그냥 그 모임의 형태가 너무 전형적이었나 보죠. (웃음)

“의 이자벨 위페르는 완전 열심히 했어요”
홍상수 감독 “영화가 나오면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요”
홍상수 감독 “영화가 나오면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요”
유준상 씨가 영화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너희들 왜 자꾸 나 따라다녀!”라던 장면을 보면서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한때 대한민국 영화과 학생들이 모두 홍상수 영화 흉내를 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홍상수: 그런 생각하고 쓴 건 전혀 아니에요. 그런데 듣고 보니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네요. 뭐 제가 할 일이 없어서 영화에 대고 그런 미친 소리를 하겠어요. (웃음) 그 학생들은 그저 남자가 술김에 옛 여자의 집으로 그 동네까지 가기 위한 핑계였는데 이제 필요가 없어지니까 빨리 떨쳐내고 싶었던 거죠. 보통 사람 같으면 자연스럽게 핑계를 댈 테지만 그런 사고가 안 되는 남자니까 그냥 헛소리하는 거예요. 따라오지 마, 따라하지 마, 하고.

이후 촬영을 마친 는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출연으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는데요. 어떻게 함께하시게 된 건가요?
홍상수: 이자벨 위페르는 다른 프랑스 여배우들과는 다른 느낌이었죠. 다른 이들이 아름답지만 어쩐지 좀 거리가 느껴졌다면 이분은 참 가깝게 느껴졌거든요. 예전에 파리에서 한 번 본 적도 있고, 최근 파리 시네마테크 회고전을 하던 때 저녁 식사 자리에 왔었어요. 서로 감독으로 배우로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하고 혹시 기회되면 같이 영화 한 번 합시다 했었죠. 그러다가 이분이 이번 5월에 한국에서 사진전을 했어요. 그때 연락이 와서 고갈비 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오는 7월에 영화를 찍는데 혹시 나와 줄 수 있나 물었죠. 사실 정식 프러포즈였다기보다는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그냥 물어본 거거든요. 그런데 바로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게 운명인가 생각했죠. (웃음)

감독님 특유의 작업 스타일에는 잘 적응을 하던가요? 사실 워낙 까다롭기로 유명한 배우로 알려져서요.
홍상수: 전혀 까다롭지 않았어요. 나중에 이자벨 위페르 직접 만나보세요. 좋아요. 너무 열심히 하고. 사람도 귀엽고. 물론 자기가 연기를 위해 보호 받아야 하는 점에 있어서는 철저하죠. 하지만 괜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완-전 열심이었어요. 완-전!

의 예고편과 본 영화 모두 제목과 크레딧이 손 글씨로 되어 있습니다. 친필이신가요? 등의 전작들을 돌이켜 보면 명확한 고딕체가 강조되어 쓰였던 적도 많았던 것 같은데요.
홍상수: 예전엔 내가 직접 쓰는 게 뭔가 꺼려졌어요. 그래서 딴 사람 글씨체를 쓴 적도 있고, 기존 활자체를 이용하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 순간 만들어진 활자체가 안 어울리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내가 직접 써봤는데 옆에서 괜찮다고 해서 그냥 썼어요.

기억하기로는 도 도 직접 손 글씨로 타이틀을 쓰셨는데, 그 때 즈음부터 영화의 톤도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합니다. 영화 속 인물과 감독과의 관계 역시 조금씩 좁아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홍상수: 음.. .그렇기도 하죠. 제 나름의 순서고 예의라고 생각하는데요. 청소년 때부터 쌓였던 마음 속의 어두운 것들, 빚진 마음 같은 것이 순서대로 영화를 통해 나오고 있는 것 같고, 그것들이 하나 하나 햇빛 아래 드러나 보이면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현재의 제 모습하고 조금 더 가까운 걸 그릴 수 있게 되었고.

최근 홍상수의 영화가 조금 더 재미있어지고 조금 더 편해진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기도 해요.
홍상수: 그런가요. 그렇게 봐주시면 저야 좋죠. 허허.

글. 백은하 기자 one@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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