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일의 행보는 종잡을 수가 없다. 충무로의 한복판에서 제작되는 화제작()의 주연도 하지만 단역()을 맡기도 하고, 독립영화의 조연()도 선택한다.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행보 속에서 그는 늘 일상적이지 않은 예리한 단면을 드러낸다. 잡히지 않는 불안함의 극한이었던 의 현규에서 능청스럽고 불량스런 의 유림, 미스터리하고 엉뚱한 의 경호를 거쳐 초현실적인 의 ‘야구모자’까지 박해은 안정적인 평범함을 거부하는 듯 했다. 그래서, 박해일이 100억 원대의 대작 액션 시대극 (이하 )의 주인공을 맡는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면 박해일이 걸어온 행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이유에서 박해일은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역적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숨어 지내야만 했던 신궁 남이가 유일한 피붙이인 누이를 구하려고 청군의 심장부로 향하는 모습은 고독하면서도 집요하고 필사적이다. 과감함에서 신중함으로 무게를 옮겨가고 있는 박해일이 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촬영은 언제 마쳤나.
박해일: 3월에 시작해서 6월에 마쳤다. 촬영을 마치고 나니까 무더위와 장마가 오더라. 날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여름 영화들 틈에서 개봉하게 됐지만 작품 고유의 색깔이 분명해서 색다른 맛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여름에 개봉한 한국영화들이 각기 색깔들이 명확해서 다양한 차림표로 관객을 맞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좋아 보인다.

작품에 대한 자신은 있나.
박해일: 항상 어떤 작품이건 자신은 있다. 영화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이미 정리가 돼 있고 마음가짐이 돼 있기 때문이다. 계속 그렇게 해왔다. 그렇지만 관객 마음은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시대극으로서 을 한 단어로 설명하면 ‘긴박감’인 것 같다. 영화 속 요소들의 화학작용만 잘 일어나면 볼 만한 시대극 장르 영화가 나올 것 같다. 기준점이 되는 건 활이다. 활이 주는 원초적인 느낌과 속도감이 드라마와 잘 맞닿아 있다면 관객들이 우리 전통의 활도 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매번 첫 촬영이 가장 어렵다”

시대극 출연은 처음이다.
박해일: 시대극이란 장르가 배우에겐 언젠가 한 번씩은 접해보게 되는 것 같다. 나 역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한민 감독은 때 같이 해본 적도 있었고 시나리오를 읽고 난 뒤의 느낌이 한번 해볼 만하다 싶었다. 내겐 새로운 숙제가 될 것 같았다. 사실 촬영하며 접했던 모든 게 새로웠다. 정치극이었다면 조금 더 고민했을 거다. 역사를 다루는 정통 사극이었다면 다른 기운의 작품이었을 테고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을 것 같다. 양궁을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다. 액션 장르의 시대극이 많지는 않은데 내 나이가 액션 영화를 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때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첫 시대극이라 말투를 정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 같다.
박해일: 대사가 많은 편이 아니라서 초반에 정하는 게 어려웠다. 뉘앙스는 중간으로 갔다. 영화가 고루한 시대극 같은 느낌이 아니라 스피디한 영화라서 현대극과 시대극의 중간 뉘앙스로 갔다.

영화마다 첫 촬영이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그랬나.
박해일: 이번에도 첫 촬영이 가장 힘들었다. 테이크도 많이 갔다. 영화를 찍을 때는 처음 오르는 산이 중요하다. 그 산을 어떻게 올라가느냐에 따라 여정이 달라진다. 첫 촬영은 이한위, 김무열 등과 드라마를 만드는 장면이었다. 대사도 많고 캐릭터를 구축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그때 정리가 안 되면 계속 힘들게 된다. 그래서 첫 날 찍을 땐 나 혼자만 테이크를 열 몇 번씩 가기도 했다. 거의 물리적 시간의 한계인 데드라인까지 갔다. 시도해 볼 건 다 해본 것이다. 김한민 감독이 나를 아니까 배려해줬다.

김한민 감독과는 이후 두 번째다.
박해일: 처음 만나는 감독과 겪게 되는 과정은 서로 어떤 사람인가 탐색하는 일이다. 나로선 어떤 연출가인지, 감독으로선 내가 어떤 배우인지 탐색하는 것이다. 촬영을 앞두면서도 서로 알아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한 번 하고 난 감독은 그런 과정이 제외되니 훨씬 효율적이다. 서로의 장점을 좀 더 활용하거나 새로운 지점을 끌어낼 수 있어서 좋았다. 쉽게 말해 두 번 말할 걸 한 번으로 알 수 있으니 처음 출연하는 시대극에서 유리한 지점이었다.

가장 고민됐던 부분은 어떤 것인가.
박해일: 시대극의 전형성을 어디까지 갖고 갈 것인가, 시대극의 톤을 어디서 깨야할 것인가. 이런 선별작업은 테스트 과정에선 힘들다. 리허설은 리허설일 뿐이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의상과 분장을 마친 배우들이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내가 장르적으로 강한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장르적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장르 영화의 연기라고 가볍게 대할 수도 없었다. 내겐 시작이 엔딩보다 중요하다.

“을 통해 우리 고유의 활이 지닌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영웅 같은 캐릭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해일: 남이는 영웅이라기보다 외골수에 꼴통이어야 했다. 매끈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남이는 아버지가 역적으로 참수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던 트라우마가 있는 캐릭터다. 그런 게 환경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인 활을 쏘고 다니면서 숨어 지내야 하는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여동생의 행복을 바란다. 그런 기운이 나중에 여동생이 납치된 뒤에도 끝까지 이어져야 했다. 남이가 갖고 있는 한이라는 정서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또 우리가 아는 영화 속 활의 이미지가 로빈후드나 의 레골라스 정도가 전부인데 에서는 우리 고유의 활이 상징적으로 주는 이미지를 잡고 가야 했다.

몸을 많이 쓰는 영화라 힘들었겠다.
박해일: 쫓고 쫓기며 활을 쏘는 영화라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 활은 사거리가 필요하니까 엄폐가 있을수록 유리하다. 엄폐물을 찾아 급박하게 이동하다 보니 움직임이 많을 수밖에 없다. 배우가 멈추면 현장이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말을 타건 두 발로 달리건 계속 달리는 템포의 영화다. 몸이 힘든 건 감안하고 시작했다. 양궁 연습도 미리 했고 승마 연습도 미리 했다.

남이는 조선 최고의 신궁으로 설정돼 있어서 양궁이나 승마 연습을 남보다 더 많이 해야 했을 텐데.
박해일: 신궁이라니 부담스러웠다. 고구려벽화에 나오는 말 타고 활 쏘는 모습처럼 전통성이 있어야 했다. 우리나라는 기마사법이 기본이다.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게 기본자세다. 그게 양궁과 다른 점이다. 말을 타며 활을 쏘려면 두 손을 놔야 하니까 더 위험했다. 내가 말을 타다 떨어져 2~3주 이상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개봉이 100% 늦춰지는 것이어서 부담이 컸다. 예전에 오토바이 사고 후 수술 받은 적이 있어서 더 조심했다. 긴장을 갖고 찍어서인지 크게 다친 일은 없었다. 촬영 초반에는 연기의 톤 앤 매너를 잡는 데 중점을 뒀고 중반부터 계속 정신없이 달릴 땐 긴장하면서 조심하려고 했다.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는 빨리 적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활을 들고 산에서 뛰다 보니 몸이 많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6월 중순쯤 촬영 마치고 2주간 끙끙 앓다 최근에야 겨우 살아났다. 회복이 느린가보다. (웃음)

육체적으로 특히 힘든 작품이었기에 성취감이 더 클 것 같다.
박해일: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취감이라기보다는 속이 후련하다. 몸과 마음이 어딘가 갔다 온 느낌이다. 끊임없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대사보다는 몸과 얼굴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감정이 많다. 시대극 분장을 하고 그 시대에 어울리는 배경에 있는 내 모습들, 여동생을 구하러 가는 여정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남들이 기대한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액션 연기도 계획했던 대로 다 찍었고.

“내 최종병기는 살아오면서 쌓은 경험치”
그간 연기했던 캐릭터들은 주로 청년의 불안감을 안고 있는 게 많았다.
박해일: 과거엔 불안이 나의 힘이었다면 이젠 조금 다른 형국으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불필요한 불안과 자의식은 쳐내는 상황이 된 것 같다. 나이 때문일 수도 있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경험치가 쌓이는 것일 수도 있다. 예전보다는 좀 더 차분한 기분도 들고 덤덤한 기분도 든다.

은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지닌 독특하고 낯선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박해일: 지금은 내 색깔을 찾아가느라 무던히 애쓰고 있다가 ‘이 색깔인가, 한번 해볼까’ 하는 과정인 것 같다. 도 그런 작품이었다. 내가 발붙일 수 있는 색깔이 이것일 수 있겠구나 싶어 조금 더 들어간 상태로 찍었다. 연기에 대한 칭찬을 받을 때 내가 잘했는지 생각해봤는데 그런 생각은 안 들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 시나리오 속의 캐릭터와 배우의 대사 톤, 말의 느낌 등이 궁합이 맞느냐가 중요하다. 요즘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배우들마다 자연인으로서 기질적인 부분이 캐릭터와 화학작용이 잘 일어나야 극대화가 된다. 연기란 그걸 디테일하게 찾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해일이란 어떤 배우인지 연기로서 실험하는 건가
박해일: 흥미가 있긴 하지만 결과까지 평가받을 걸 생각하면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 감독까지 만나본 뒤 박해일이란 배우가 한번 던져질 수 있겠구나 하면 가는 거다. 다음 영화도 그럴 거다. 혼자 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가면서 찾아갈 수 있다. 그게 드라마와 차이다. 방송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까. 지금 하는 장르를 활용한다면 나답게 보이는 모습이 조금씩이라도 내 색채를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과감함과 신중함이 함께 가야 하는 상황이다.

만주어로 연기하는 장면이 몇 군데 나온다.
박해일: 류승룡 선배가 많고 나는 많지 않다. 국내에는 만주어를 연구하는 선생님이 몇 분 있는데 만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분들이 다다. 내가 지어서 말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만주어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중국어와도 억양부터 많이 다르다. 오히려 우리말의 어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배우들이 모두 모여서 그분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연습했다.

차기작으로 영화 출연을 확정했다고 들었다.
박해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확정된 사항이 아닌데 기사가 나가서 조금 당황스럽다. 원작을 영화로 옮기면서 어떻게 바뀔지 나도 궁금하다. 기사 나온 것처럼 내가 70세 노인 연기를 하게 될지도 확실치 않다.

박해일이라는 배우의 최종병기는 무엇인가.
박해일: 살아온 경험치로서의 직감이 아닐까? 인생은 매순간이 선택인데 그때마다 내가 갖고 있는 감이 있을 것이다. 내겐 그게 최종병기인 것 같다.

글. 고경석 기자 kave@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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