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대 미혼 직장여성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아직 미지의 가능성을 포기할 만큼 늙지 않은 그녀들은 동시에 불확실한 모험을 감수할 만큼 어리지 않다. 여전히 마음속의 욕망은 생생한데, 이제 겨우 안정을 찾기 시작한 삶의 기반을 흔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게다가 직업적인 성취와 무관하게 주변에서는 결혼이라는 동일한 잣대로 자신의 인생을 점수 매기려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로맨스가 필요하다. 일을 포기하지 않고, 생활을 변화하지 않는 선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비일상적인 사건이 바로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판타지의 구체적 타겟 설정
[윤희성의 10 Voice] 로맨스가 아닌 고민이 필요해
[윤희성의 10 Voice] 로맨스가 아닌 고민이 필요해
2일 종영한 tvN 는 이러한 삼십대 직장 여성들을 타겟으로 한 작품이었다. 호텔 근무 8년차인 선우인영(조여정)은 오래된 친구와 오래된 직장, 오래된 남자친구가 있는 여성이다. 스스로 굳이 권태로움을 타개할 필요 없이, 인영의 오래된 일상은 스스로 변화를 시작한다. 남자친구는 다른 여자에게 한눈 판 사실을 고백하고, 그녀에게는 다른 남자의 애정공세가 시작된다. 그리고 두 남자로 인해 그녀의 회사 생활에는 이전과는 다른 긴장이 부여되고, 친구들과의 대화 역시 내용이 달라진다. 그리고 인영은 내레이션을 통해 이 과정을 쉴 새 없이 중계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피해자가 된 자신을 동정하다가,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스스로를 반성하기도 하며, 때로는 주변 사람들을 이해한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그리고 드라마는 계속해서 이것이 리얼리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는 오히려 구체적인 타겟 분석이 수반된 철저한 판타지다. 연애 문제로 고민에 빠진 듯 보이지만 인영의 남자친구인 김성수(김정훈)는 가난한 영화학도에서 순식간에 전도유망한 감독이 되었고, 그가 바람을 핀 상대는 어리고 예쁜 여배우다. 회사 동료인 인영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했던 배성현(최진혁)은 그녀보다 6살이나 어릴 뿐 아니라 사실은 그들이 근무하는 호텔의 후계자였다. 둘 중 누구를 선택해도 인영에게는 경제적, 사회적 안정이 보장된다. 게다가 두 남자는 모두 이별을 통보하는 인영에게 구차하거나 야비하게 행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끝내 순정을 표한다. 그런 까닭에 드라마에서 인영은 또래 여성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아니라 각자의 경험을 투사하는 필터로 기능한다. 시청자들은 각자의 경험에서 인영과 겹치는 부분을 발췌해 드라마에 이입시키며 그 배경이 된 판타지까지 소비하는 방식으로 드라마에 몰입하는 것이다.

희망 대신 씁쓸함을 남긴 해피엔딩
[윤희성의 10 Voice] 로맨스가 아닌 고민이 필요해
[윤희성의 10 Voice] 로맨스가 아닌 고민이 필요해
연애담을 판타지로 소비하는 것은 물론, 거의 대다수의 드라마가 선택한 방식이다. 그러나 가 염려되는 지점은 그 판타지가 귀결하는 곳에 터무니없는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영은 결국 성현의 로맨스를 거절한다. 서른셋답지 않게 이 연애가 예고하는 어려움을 그다지 고민하지 않던 그녀는 결혼을 위해 이름과 국적을 변경하자는 제안 앞에서 “나는 누구보다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앞선 모든 사건들 안에서 인영이 보여주었던 태도는 전혀 이 행동을 뒷받침해주지 못한다. 끝난 연애에서도, 새로운 연애에서도 인영은 언제나 상황에 끌려갈 뿐 주체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며 다분히 희생적인 그녀의 면모는 박서연(최여진)의 입을 통해 “남자를 사랑할 줄 아는 여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같은 직업, 같은 남자친구를 유지한 채 끝난 인영의 결론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비겁한 마무리다.

달콤한 판타지는 끝났고, 인영에게 감정을 이입했던 시청자들은 이제 다시 각자의 자리로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 바람피운 횟수를 언급하며 인영은 “아직 2:1”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에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의 주체적인 인식은 없다. 성수의 외도가 없었다면 성현과의 로맨스는 과연 가능했을지에 대한 의문만 남을 뿐이다. 그녀의 친구인 강현주(최송현)와 서연 역시 궁극적으로는 각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연애를 하거나, 하지 않는 것만으로 그들의 행복을 단정 지으려 하지만 설명이 부족하다. 완전히 일과 생활로부터 연애만을 분리해 낸 드라마는 결국 사랑이 아닌 무엇으로도 인물을 설명할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다.

오히려 여성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드라마
[윤희성의 10 Voice] 로맨스가 아닌 고민이 필요해
[윤희성의 10 Voice] 로맨스가 아닌 고민이 필요해
때로 어떤 드라마는 완성도와 별개의 지점에서 성취를 인정받기도 한다. 그리고 는 비록 미니홈피를 통해 연원을 알 수 없이 퍼져나가는 사랑에 관한 문장들처럼, 어설프고 순진한 아포리즘의 모음에 불과한 얄팍한 통찰을 보여주었을지언정 많은 여성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는 점에서 분명 주목할 지점이 있었다. 그러나 전적으로 인영의 심리에 기댄 이 이야기는 결국 보수적이고 안일한 생활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여자의 작은 일탈로서 로맨스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16회 내내 포즈로만 존재하던 드라마의 리얼리티는 결국 여성들을 오해하기 위한 액션의 덫이었다. 인영은 행복할지 모르나 드라마를 지켜 본 여성들의 행복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질 않는다. 아직 아무도 그녀들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않고 있다.

글. 윤희성 nine@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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