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석의 100퍼센트] 걸그룹, 오빠가 아닌 언니를 응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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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남규리는 논란의 대상이 됐다. 프로야구 경기 시구를 위해 입고 나온 핫팬츠가 엉덩이 일부가 보일 만큼 짧았던 탓이다. 땀에 옷이 말려 일어난 일이라는 해명을 했지만, 핫팬츠가 시구에 어울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규리의 투구 장면 대신 이른바 ‘숨 막히는 뒤태’를 집착적으로 찍은 건 언론이었고, 흥행을 위해 때론 레이싱 걸이 가슴이 파인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오르도록 한 건 구단이다. ‘하의 실종’ 정도의 옷을 입어야 화제에 오를 수 있지만, 엉덩이가 드러나면 사과부터 해야 한다. 많은 여자 연예인들은 대중에게 몸을 어필해야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동시에, ‘알아서 조신’해야 할 의무까지 짊어진다.

지난 7월 31일 SBS 에서 2NE1의 무대가 눈에 들어온 건 남규리의 일이 생각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Hate you’에서 형편없는 남자 친구에게 ‘언젠가 너도 너 같은 여잘 만나게 될 거야’라며 의자에 묶인 남자를 발로 밀어낸 그들은 ‘Ugly’에서 ‘난 예쁘지 않아 아름답지 않아’라고 노래한다. 자학일 수도 있지만, ‘쳐다 보지마 지금 이 느낌이 싫어 난 / 어디론가 숨고 싶어’라는 가사는 괴로운 것이 외모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임을 보여준다. 스스로를 ‘Ugly’로 인정하면서, 2NE1은 관점의 주체를 타인이 아닌 자신으로 바꿔 놓았다.

걸그룹이 스스로를 파는 새로운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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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gly’와 제목은 상반되지만, 2NE1의 ‘내가 제일 잘 나가’도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이 노래는 타인에게 얼마나 ‘잘 나가게’ 보이는지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옷장을 열어 가장 상큼한 옷을 걸치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꼼꼼히 살피’고 ‘도도한 걸음으로’ 나서는 여성 스스로의 만족감을 묘사한다. 타인은 ‘잘난 눈빛 속 차가운 가식’으로 나를 ‘Ugly’로 바라본다. 하지만 나에게 나는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이다. 중요한 건 나의 생각, 나의 감정이다. 노래가 타인의 시선에서 나로 옮겨지면서 2NE1의 슬로건인 ‘놀자’도 명확한 의미를 갖는다. ‘Ugly’의 무대는 다소 뮤지컬과 비슷하다. 멤버들이 각자의 파트에서 한 명씩 나와 노래하고, 후렴구에서는 댄서들과 같은 동작을 하며 뮤지컬의 하이라이트처럼 역동적인 기운을 불어넣는다. 멤버들의 춤은 무대의 일부일 뿐, 무대 바깥의 대중에게 날 봐달라는 적극적인 어필은 아니다. 완결된 무대로 무대의 주인이 된 채 관객을 끌어들인다. 2NE1 특유의 ‘잘 노는’ 무대에 여성의 내면을 드러낸 가사가 더해져 놀이의 주체가 ‘나’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내가 제일 잘 나가’와 ‘Ugly’가 대형 기획사를 통해 만들어지고, 음원시장 정상에 오르는 것은 흥미로운 변화다.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걸그룹은 가장 타인의 시선에 의해 재단되는 영역이다. ‘하의 실종’ 패션을 보여줄 때 가장 화제가 되는 것도, 동시에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었을 때 논란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살이 쪘을 때 쪘다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걸그룹이다. 걸그룹이 치어리더나 마칭 밴드로 코스튬 플레이를 한 건 최근 몇 년간 걸그룹의 셀링 포인트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걸그룹은 정해진 콘셉트를 소화하며 타인의 판타지를 실현시켜줄 때 가치가 있었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시장의 기조를 바꾼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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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11년 상반기의 2NE1은 물론, f(x)는 ‘피노키오’에서 ‘너란 미지의 대륙’을 ‘맘에 들게 널 다시 조립’할 것이라고 노래한다. 그들의 안무는 가슴이나 엉덩이 같은 신체 일부를 어필하는 포인트 춤도 없다. 대신 복잡한 동작으로 구성된 무대로 안무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끼도록 한다. 그룹명 그대로 f(x)는 일정한 콘셉트나 분위기로 설명할 수 없었다. 덕분에 데뷔 초 뚜렷한 콘셉트와 더불어 섹시, 청순, 애교 중 최소한 하나를 강조하는 다른 걸그룹과 달리 명확한 셀링 포인트가 없었다. 하지만 ‘Nu ABO’와 ‘피노키오’를 거치며 그들은 정의되지 않는 것이 곧 그들의 매력임을 납득시켰다. 무대에서 가위바위보를 하고, 알 수 없는 가사의 노래를 하지만 무엇으로도, 누구에게도 규정되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노는 그들의 모습은 다른 걸그룹과 차별화된 에너지를 담고 있었다. 무대의 콘셉트일 뿐일지라도, 2NE1과 f(x)는 자신들 스스로 즐거운 무대에 방점을 찍었다. ‘Ugly’는 멤버들이 직접 무대를 구성하기도 했다. 미스 A의 ‘Good bye baby’도 배신한 남자를 쿨하게 차버리고, ‘Bad girl good girl’처럼 섹시함을 보여주면서도 몸의 전체적인 선을 강조하며 당당한 스타일을 유지하는 안무를 보여준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해외 진출에 나선 사이 2NE1, f(x), 미스 A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시장의 기조를 바꿨다.

시장의 변화는 ‘보핍보핍’에서 고양이 귀를 달고 엉덩이를 강조한 춤을 추던 티아라가 ‘롤리폴리’로 1980년대 소녀로 변신, 클럽에서 그들끼리 노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롤리폴리’에서 멤버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은 그들이 모델로 삼은 영화 가 가진 중요한 정서다. 영화에서 춤은 소녀들의 놀이이자 우정의 상징이다. 나미(심은경)는 춤을 추며 친구들과 친해졌고, 어른이 된 뒤에도 함께 춤을 추며 서로를 위로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춤이 아니라 나를 위해 즐겁게 추는 춤. 지난해 2NE1과 f(x)가 무대 위에서 즐겁게 노는 소녀들의 모습으로 시장의 변화를 예고했다면, 는 그 흐름의 상품성을 완전히 확인시켰고, 올해의 걸그룹은 보다 뚜렷한 흐름을 만들고 있다. 2NE1, f(x), 미스 A, 티아라의 신곡들이 모두 인기를 얻는 상황은 걸그룹 시장에서도 여성이 지지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진 걸그룹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걸그룹의 변화, 여자들의 변화

타인의 시선에서는 잘 나가는 연예인도 시구 한 번에 비호감이 될 수 있고, 아무리 예쁜 외모의 여자라도 틀에 벗어난 패션만으로도 입방아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다큐멘터리에서는 일정한 나이를 기준으로 ‘노처녀’를 규정해 결혼 ‘못’하는 이유를 밝혀내려 하고, 언론에서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여성들에게 결혼하고 아이 낳을 것을 권하는 듯한 기사마저 나온다. ‘나’를 위해 시간을 쏟고, ‘나’를 위해 꾸밀 기회는 없다. SBS 에서 이연재(김선아)가 아버지 없는 가정을 혼자 꾸려 가느라 마음껏 살아본 적 없다며 한탄하는 것이 남 일 같지 않아 보이는 이유다. 그 때 무대 위, 스크린 속의 소녀들은 자신들끼리 웃고 떠들고 춤춘다. 그건 평범한 그들의 또래에게나 이미 더 이상 ‘나’를 위해 살기 쉽지 않은 성인 여성들에게는 판타지일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판타지는 살면서 좀처럼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많은 여성들에게 즐거운 휴식시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걸그룹이 노래하고 춤추는 순간만큼은 나를 위해 즐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가. 나는 예쁘지 않아. 하지만 제일 잘 나가.

글. 강명석 기자 two@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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