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영화 이후, 장훈 감독은 차기작이 가장 기대되는 감독으로 손꼽혔고 세 번째 영화 은 개봉 전부터 예매 1순위를 달렸다. 데뷔작 부터 까지 새로운 작품을 들고 나올 때마다 몸집이 커지는 영화처럼 착실히 자신의 영역을 불려나가는 그는 여름 블록버스터들의 전쟁에 전쟁영화로 뛰어들었다. 은 그동안 물량공세로 만들어낸 스펙터클이나 아까운 목숨들을 이용한 신파로 소비되던 한국전쟁의 맨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댔고, 관객을 6.25가 아닌 휴전 협정이 한창이던 때로 불러들인다. 협정이 발효되기 전 12시간 동안 남과 북은 지도 위 1cm의 땅을 더 얻기 위해 수많은 목숨을 총알받이로 내몰았고, 그저 살아서 집에 가길 원했던 보통 사람들은 그 안에서 괴물이 되거나 정신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장훈 감독에게서 인물의 비극이나 드라마의 “배경이 아닌 전쟁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에 대해 들었다.

“실제 6.25 때 기록사진과 비슷한 게 많다”
장훈 감독 “<고지전>은 철저히 한국적인 전쟁영화가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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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블록버스터들의 전쟁에 전쟁영화로 뛰어들었다. 6.25는 민족의 비극인 만큼 즉각적인 재미를 줄 수 있는 선택은 아닌데.
장훈: 전쟁은 분명 무거운 소재이기는 하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아직 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된 것도 아니고 휴전상태니까 전쟁을 가볍게 오락으로만 만들 수는 없었다. 그 안에서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재밌는 모습과 감정들을 진정성 있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았다. 그러면 다른 영화들과는 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똑같은 기준이 아니라 전쟁영화로서의 재미를 기대했으면 한다. 아무래도 예산이 때보다 많으니까 관객 수에 대한 부담이 있다. (웃음)

매번 새 작품을 할 때마다 예산이 큰 폭으로 뛰고 있는데 110억이란 제작비를 운용하는 건 어땠나.
장훈: 작은 영화를 할 때는 시간이 ㅉㅗㅈ기는 부분이 있었다. 할 때는 스태프나 배우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해는 떨어지는데 다음 날 찍을 수가 없으니까. (웃음) 나 혼자 결정해야 할 게 많았다. 얘기를 다 주고받을 수 없기 때문에 감독이 해야 되는 게 많았다면 예산이 큰 영화는 감독보다는 스태프들이 더 잘해줘야 되는 것 같다. 은 감독 혼자 만들 수 있는 장면이 아니고 모든 파트가 집중해서 만들어내야만 하니까 특수효과든 특수분장이든 뭐든 간에 나보단 스태프들이 해야 될 일이 많았다.

안 그래도 영화의 제작기를 보니까 스태프들의 고생담이 절절하더라. 고생이 뻔히 보이는 작업인 만큼 사전에 스태프들을 설득하고 회유하는 과정이 중요했겠다. (웃음)
장훈: 준비 단계에서 작품 얘기를 많이 했다. 전쟁에 어떤 태도로 접근해서 보여줄지에 대해 서로의 의견에 동의를 하고 같은 생각을 공유했다. 류성희 미술감독이나 김우형 촬영감독 등 나보다 경험이 더 많은 분들이셨고 같이 한 곳을 바라봤다. 그것들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몸이 힘들었지만 최대한 같이 노력했다. 내가 뒤에서 막 시킨 게 아니라. (웃음)

을 통해서 출연했던 배우들이 새롭게 평가받거나 더욱 기대 받고 있는데 감독으로서도 뿌듯할 것 같다.
장훈: 배우들마다 다 너무나 좋은 장면들이 있다. 이제훈이 맡았던 신일영의 마지막 장면이 배우에게도 나에게도 부담이 많이 되는 장면이었는데 포탄을 뒤집어쓰고 있는 얼굴에서 여러가지 감정이 어우러져서 좋은 느낌이 나더라. 마지막 전투 앞두고 신일영이 살짝 웃는 장면이 있었다. 어떻게 웃느냐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다른데 뭔가를 안다는 듯한 웃음, 거기에 여러가지 감정들이 담겨있었다. 이제훈은 눈빛이 독특하고 매력이 있다.

예전부터 전쟁영화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사실 마음먹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누가 해도 힘든 프로젝트인데.
장훈: 되게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동안 익숙하게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 봐왔지만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은 사람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거기서의 사람들의 모습들을 다뤄보고 싶었다. 물론 찍고 바로 할 줄을 몰랐다. 당연히 인연이 생기더라도 한참 뒤라고 생각했다. 근데 시나리오를 읽어보니까 내가 전쟁영화를 찍는다면 나중이거나 이 시나리오가 될 것 같은데 나중에 이런 시나리오를 또 만날 수 있을지 장담을 못하겠더라. 그래서 부담이 됐지만 ‘에잇, 해버리자’하고 결정했다. (웃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가장 강렬하게 떠올랐던 장면은 중공군이 몰려오는 거였는데, 자료조사나 이미지를 구체화 해가면서는 다른 부분들이 더 강렬 다가왔다. 고지나 다른 병사들의 모습 같은 것들이.

각본을 쓴 박상연 작가도 그렇고 김우형 촬영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등 최고의 스태프들과 함께 했다. 특히 촬영에 있어선 에 이모개 감독부터 김우형 감독까지 내로라하는 촬영감독들과 함께 하고 있다.
장훈: 이모개 감독님은 말씀이 많은 편이 아닌데 김우형 감독님은 더 없다. (웃음) 촬영 스타일은 이모개 감독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방법을 찾아서 해보려고 하는 에너지가 넘치고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막 나온다. 되게 동적이다. 김우형 감독님은 촬영 자체는 동적인 것부터 모든 게 가능하지만 고민하는 스타일은 정적이다. 현장에서도 끝까지 고민하고 공부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정적인 느낌이 영화에서도 나더라. 전쟁영화인데도 정지시키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들이 전시되었다.
장훈: 영상으로 흘러가니까 관객들은 드라마를 따라가지만 멈춰놓고 보면 좋은 그림들이 많다. 촬영부터 미술, 세팅까지 실제 6.25 때 기록사진과 비슷한 게 많다.

“은 전쟁 자체가 먼저 보였으면 했다”
장훈 감독 “<고지전>은 철저히 한국적인 전쟁영화가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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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지 전투가 벌어졌던 산들의 사진과 영화 속 애록 고지의 모습이 정말 흡사하더라. 애록 고지의 사막처럼 처참한 폐허의 모습이 주는 충격도 컸다.
장훈: 그 부분이 중요했다. 고지가 또 다른 주인공이라 생각했다. 그 산이 하나의 사람처럼, 인격처럼 보였으면 했다. 산이 포탄을 맞고 점점 변해가는데 그게 사람이 다치고 상처입어서 뭉그러져 가는 것처럼 땅이 슬프게 보였으면 좋겠다. 말이 헌팅이지 배우를 캐스팅하듯이 고지도 캐스팅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쟁 때 고지를 찍었던 사진들에서 본 고지의 모습이 되게 세게 왔다. 전쟁터의 황량함과 처절함보다는 되게 슬펐다. 땅이 이렇게 슬플 수도 있구나. 그런 한국적인 땅의 색깔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이 갈 방향이었고, 같은 외국의 전쟁영화들의 미학을 따르지 않고 철저히 한국적인 전쟁영화가 되어야 했다.

촬영이 이루어진 백암산은 실제로 2009년 화제로 산이 불에 탄 상태였는데,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에게는 행운이었겠다.
장훈: 비극적인 일인데 그 산이 이 가능할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는 삼림 관리가 되게 잘 돼있어서 나무가 없는 산이 별로 없고 나무 하나 잘못 베면 큰일 난다. 한 4-5개월을 돌아다녔는데 백암산을 처음 봤을 때 뭔가가 느껴졌다. 같은 산을 봐도 어떤 산은 아무 느낌이 없다. 몇 시간을 달려가서 보고, ‘그냥 산이네, 갑시다’ 한 적도 많았다. (웃음) 근데 백암산은 여기서는 만들 수 있겠다 싶더라. 물론 처음에는 스태프랑 배우들이 고생할 걸 아니까 강하게 드러내지 않고 눈치를 봤다. (웃음) 고지도 다 사람이 손으로 만들었다. 조그만 포크레인이 큰 정리만 해줬지 나머지는 정상에 매달려서 미술팀이 다 세팅했다. 미안하고 고맙지. 영화는 만들 때 더 행복하고 살아있는 거 같다. 모든 감각이 열리는 느낌이랄까. 현장에서는 다 같이 영화를 위해 할 수 있는 걸 다 해볼 수 있으니까. 한 사람이 꿈만 꿔도 행복한데 여러 사람이 같이 꿈을 꾸면 더 행복하다. 현장에 있으면 그게 느껴진다.

한국전쟁은 민족이나 이념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은 인물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장훈: 관객들은 인물을 따라가면서 보니까 사람을 통해서 표현돼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또 한 사람이 모든 전쟁을 겪을 수는 없다. 누구나 그 전쟁의 일부를 경험하는 거고 한 곳에 있긴 하지만 각각 다른 인물이니까 전쟁에 대해서 다르게 느꼈을 테니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다만 기존의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들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드라마나 인물들의 배경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전쟁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전쟁 안에 있는 인물들이 매력적인 매개가 됐으면 했다. 같은 경우는 형제의 이야기가 중요한 감동이었고 드라마를 끌고 갔는데 은 전쟁 자체가 먼저 보였으면 했다.

전쟁 자체?
장훈: 전쟁 자체로 전쟁을 얘기해보는 것도 중요하고, 그런 시도도 필요할 수 있다고 봤다. 한국전쟁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다른 요인들이 아니라 전쟁에 포커스를 맞춰서 보여주는 부분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전쟁의 앞 부분을 다루는 영화는 많았지만 마지막 시기를 보여주는 영화는 없었고. 또 고지 전투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한국에 있었던 특수한 전투였는데 이 전투가 어떻게 벌어졌는지도 보여주고 싶었다. 외국영화에서 전투 장면을 따오는 게 아니라 한국적인 전투의 형태였던 고지전에는 우리만의 전쟁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특별함이 있었다. 뭔가를 모방하고 흉내 내는 게 아니라.

“머리에 남기보다 마음에 남으면 좋겠다”
장훈 감독 “<고지전>은 철저히 한국적인 전쟁영화가 되어야 했다”
은 철저히 한국적인 전쟁영화가 되어야 했다”" /> 데뷔작이었던 에서부터 , 까지 아까 말했듯 어떤 특수한 상황에 놓인 남자들의 관계나 감정이 변해가는 이야기를 일관되게 해왔다.
장훈: 의식적인 부분이 아닌 것 같다. 난 이런 영화를 만들 거야, 난 이런 이야기에 끌리는 거 같아가 아니라 그냥 무의식중에 그게 더 재밌는 거 같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랬던 거 같다. 여성적인 이야기나 멜로 영화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거랑 만들 수 있는 건 또 차이가 있고. 나중에 여자를 좀 더 알게 되거나 (웃음) 결혼하고 나면 해보고 싶다. 동반자가 있으면 여자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지 않을까. 일부러 그렇게 선택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남자영화가 편하다고 느끼는 건 있다.

남성식, 김수혁 등의 캐릭터의 이름이나 고지에서 음식이나 물건 등으로 남과 북 병사들이 소통하는 건 박상연 작가의 전작 가 떠오르기도 했다.
장훈: 비슷한 코드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 같다. 같은 작가의 이야기니까 충분히 그렇게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작가가 쓴 걸 존중하고 싶었다. 그걸 인정하고 자체의 색깔로 보일 수 있는 걸 고민했다. 그런 얘길 들으면 어떡하지 보다는 어차피 그런 얘기들이 나올 거고 한 작가가 쓴 거니까 그 부분은 인정을 하고 적극적으로 우리 영화에 맞게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 부분에 있어 쿨한 거 같다. (웃음) 우리나라에서는 감독이 각본도 쓰고 연출도 해야 진정한 작가로 인정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있는데.
장훈: 그래서 초기에 인터뷰할 때는 은연중에 자기가 쓴 것도 아닌 걸 연출하냐는 느낌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 작품 째 하다보니까 내가 쓴 시나리오로 작품을 만들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꼭 내가 쓴 작품으로 해야 해’ 하는 강박이 아니라 내가 쓴 게 좋으면 그걸로 하고 더 좋은 작품이 온다면 그걸로 하고, 그런 게 좋은 거 같다. 연출자는 연출하는 사람이지 않나. 그런 부분에서 좀 편해졌으면 좋겠다. 시나리오를 직접 쓰시는 선배 감독님들은 워낙 훌륭한 영화를 많이 만드셨고 존경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환경이 변해가니까 프로듀서가 시나리오를 개발할 수도 있는 거고 작가가 쓸 수도 있다. 또 그걸 만들어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래야 작품이 다양하게 기획될 수 있는 거고. 내가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드는 건 억지로 하려고 하기 보단 자연스럽게 가고 싶다. 물론 내가 못 가진 부러운 재능을 가진 감독님들 너무 많지만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로 해보는 편이다. 억지로 남의 걸 흉내 내선 잘 되지 않더라.

다만 지금 이시기에 이 영화를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하다고 했는데 역으로 왜 지금 이 시기에 을 관객들에게 선보이게 됐나.
장훈: 어찌됐든 부인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게 우리나라는 여전히 휴전상태란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지만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요즘 어린 관객들은 한국전쟁이 언제 끝났는지는 커녕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어린 친구들이 보고 과거에 있었던 비극에 대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런 것들이 영화에 스며들어서 머리에 남기보다 마음에 남으면 좋겠다.

글. 이지혜 seven@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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