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홍석천은 즐겁다. 새해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는 ‘민머리’ 사람들과 함께 한 MBC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이하 <라디오스타>)에 이어 “바라고 기다렸던” SBS <힐링캠프>까지 각종 방송에서 그를 찾는다. 오랜만에 공개 코미디에 도전한 tvN <코미디 빅리그>에서는 “사람들이 뿜어주는 에너지를 탁! 받”은 덕에 “온 몸에서 기분 좋은 물질이 나오”는 중이다. 스스로 “광대인 거지”라고 말하며 웃는 홍석천의 얼굴을 보니 단단하고 예쁜 돌 하나가 생각났다. 커밍아웃 이후 꿈을 접고 상처를 키우며 지내야 했던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을 덮친 야속한 강풍을 원망만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의 손을 마주 잡았다. 모진 바람 속에서 조금씩 깎이며 더욱 단단해졌다. 그리고 이젠 세파에 시달린 상처의 흔적마저 사람들을 웃게 하는 반짝이는 무늬로 만들고 있다. 여전한 감각과 기대 이상의 내공으로 유쾌한 웃음을 주는 “연기자 홍석천”이 마지막 쾌남이다.

Q. <힐링캠프> 출연 이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 같다.
홍석천: 본 방송을 못 봤다. 지인들하고 모여서 와인 한 잔 하면서 실시간 검색어랑 기사 확인 했다. 여기저기서 오는 전화랑 문자 받으면서. 방송 끝나고 기사 검색하고 나서 아, 괜찮았구나 하면서 겨우 봤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한 번 더 봤다.

Q. 다시 보니까 어떻던가?
홍석천: 전날 잠을 못 자서 얼굴이 좀 부은 거라든지 아쉬운 부분도 있고 편집에서 잘려나간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할 말은 다 했구나 싶더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여유 있게 보여준 것 같다.

“관객들이 박수 쳐주는 것만큼 큰 에너지가 없다”

오! 쾌남│③ 홍석천 “배우라는 직함이 제일 좋다”
Q. <라디오스타>에서 섭외 전화가 왔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을 텐데.
홍석천: 둘 다 굉장히 큰 프로그램이지만 다르다. 일단 <라디오스타>는 굉장히 즐겨 보면서 저들이 왜 날 안 부르지? 나도 잘 할 수 있는데 라고 생각했었다. 녹화 하면서도 재밌는 방송이 되겠다는 느낌이 있었다. MC들도 옛날부터 알던 사람들이라 편하니까 받아주던 말던 던지자 아니면 편집하면 되니까 편하게 놀자는 마음으로 했는데 대박이 난 거다. <힐링캠프> 섭외 전화를 받고는 좀 무서웠다. 힐링은 내가 진짜 필요한데 라고 생각해서 바라고 기다렸던 프로그램이다. 새해에 딱 전화가 왔는데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도중에 없었던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방송에서 이거 편집하셔도 되는데 라면서 했던 것들은 작가와도 사전에 얘기가 안 된 것들인데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녹화하면서도 그렇게 긴장한 건 처음이었다. 끝나고 기운이 쭉 빠지더라. (웃음)

Q. 방송 초반 한혜진과 악수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나 웃음 포인트를 짚어내는 걸 보면서 방송을 잘 하는 사람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홍석천: 내공이 쌓였지. 어렸을 때는 어떻게든 튀고 싶고 내가 잘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쓸데없는 경쟁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이도 먹었고 살아 온 시간과 굴곡이 있으니까 상대를 배려하고 올려줄 수도 있게 되었고 좀 너그러워진 것 같다. 물론 내가 마흔 셋이라는 게 실감은 안 나지만. (웃음) 상대의 말을 들어주면서 방송의 흐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경규 씨가 어떤 표정과 눈빛으로 사인을 보내고 있는 건지 보면서 이쯤에서 접고 다른 이야기를 던져야 하는구나 같은 걸 눈치 채는 거지. 그래서 방송이 재밌다.

Q. 그 내공이 데뷔 18년 만에 도전하는 공개 코미디 무대에서도 도움이 되나.
홍석천: <코미디 빅리그>를 4회까지 녹화 했는데 지금까지는 연습대로 했다. 2회까지는 관객 얼굴이 안 보였다. 사실 나한테는 모험이다. 소재 자체가 굉장히 세고 케이블 채널이라고 해도 이렇게 접근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작년 여름에 리마리오가 와서 형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라고 부탁 했지만 계속 안 하려고 했다. 아직은 방송계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도 아니고 개그지만 희화화로 비칠까 봐 고민을 많이 했다. 그렇지 않아도 동성애자들한테 욕먹고 있는데 더 욕먹을 짓은 안 하고 싶었다. 사실 이성애자의 반응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혹시나 동성애자들이 너무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싶어서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Q. 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홍석천: 동료나 후배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니까. 어쨌든 난 그들보다 상황이 낫고, 지금까지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입장이 되면 설사 욕을 좀 먹더라도 진심을 갖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막상 해보니까 반응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더 센 걸 하고 싶은데 자꾸 자기 검열을 하게 되니까 좀 스트레스다. 회의 때도 아이디어는 더 많은데 무대에서 할 수 없으니 미치겠다. (웃음)

Q. 관객의 반응이 눈앞에서 보이는데 움츠러들진 않았나.
홍석천: 뮤지컬과 연극을 했었으니까 관객 앞에 서는 게 낯설지는 않다. 그래도 일부러 눈을 안 마주치려고 했다. 보는 척은 하지만 초점은 허공에 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관객이 안 보였던 2회까지는 우리가 이겼는데 뒤로는 졌다. 공개 코미디라서 관객의 반응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다보면 머리에 잡생각이 들어와 버린다. 표정이 보니 안 웃긴 것 같은데 어떡하지 싶어서 준비한 것과 다른 걸 하려고 하니까 호흡이 흐트러진다. 조금 더 익숙해지면 관객과 놀면서 애드리브도 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대본에 충실하게 준비한 것만 한다.

Q. 그런 긴장과 부담감에도 무대에 서는 것이 즐거워 보인다.
홍석천: 무대 뒤에서 기다리다가 첫 발을 뗄 때 정말 흥분된다. 관객들이 “와~” 하고 박수 쳐주는 것만큼 큰 에너지가 없다. 1년에 한 편씩은 꼭 뮤지컬을 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방송을 못 해도 연기자, 엔터테이너로서 존재감을 느껴야 하니까. 사업 하면서 느끼는 거랑 무대에 있을 때랑은 다르다. 방송과도 굉장히 다르고. 관객들이 뿜어주는 에너지를 탁! 받을 때 어우, 그건 정말 엄청난 광선을 맞은 것 같다. 온 몸에서 온갖 기분 좋은 물질이 나오니까. 그게 광대인 거지.

“엄밀히 따지면 롤모델은 의외로 아버지”
오! 쾌남│③ 홍석천 “배우라는 직함이 제일 좋다”


Q. 처음 연극영화과에 진학할 때부터 무대 연기에 관심을 가졌던 건가.
홍석천: 입학할 때는 연출 전공이었다. 그 때는 잘 생기고 예뻐야 배우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얼굴로 연기하겠다고 하는 게 죄스러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연기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그 때 최형인 교수님이 날 알아채신 거다. 수업도 안 빼먹고 구석에 앉아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면서 연기 하겠다는 말은 안 하니까 “넌 뭐 하려고 왔니?”라고 물으셨다. 연출 전공이라고 했더니 “그런데 눈빛이 왜 그래? 정말 뭐 하고 싶냐?”고 하셔서 사실은 연기 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Q. 그 분이 알아봐주셔서 인생의 경로가 바뀐 거네.
홍석천: 배우가 다 주연만 있냐고 잘 생긴 애들만 하는 거냐고 혼내셨다. 사실 우리 학교 출신들이 유오성, 설경구, 故 박광정, 권해효, 안내상, 이문식 등 얼굴이 반반하진 않다. (웃음) 그 때 좋은 교수님, 선배들 밑에서 정말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무대에 섰기 때문에 그 힘이 지금까지도 나를 지탱해주는 것 같다. 나한테 방송인이나 CEO 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난 연기가 편하고 배우라는 직함이 제일 좋다. 외국 나갈 때 직업란에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액터라고 쓴다. 외부적인 조건 때문에 연기를 못 하게 되면서 방향을 틀어야 했지만 예능을 할 때도 스스로는 연기를 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제작진과 동료들이 나에게 바라는 모습, 이 쇼가 바라는 걸 연기하는 거니까.

Q. 무대에서는 주로 어떤 작품들을 했나.
홍석천: 대학 때 <한 여름 밤의 꿈>을 학생들끼리 무대에 올렸는데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서 대학로에 초대 받았다. 초대박이 나서 늘 만석이었다. 나랑 권해효 선배가 직공들로 극중극에서 커플 연기를 했다. 그 때 여장을 했는데 우리 커플의 코믹 연기가 대학로에서 엄청 화제였다. 그게 발전되어서 MBC <남자 셋 여자 셋>의 쁘아송이 된 거다. 귀여운 게이 역할을 맡았던 <심바새매>나 이병헌, 최할리 씨랑 같이 한 <코러스 라인>, 황인뢰 감독님 뮤지컬 데뷔작이었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같은 작품들을 했다. 커밍아웃 하고 나서도 <토요일 밤의 열기>를 했고.

Q. 학창 시절 공부를 잘 했던 아들이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많이 놀라셨겠다.
홍석천: 원래 시골 교회에서 성극 하고 찬양 팀에서 노래하면서 대중 앞에 서서 뭘 하는 걸 즐겼다. 연극영화과라는 건 뭔지도 모르고 대충 신문방송학과에 가면 방송 일을 할 수 있나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1988년도 <강변가요제>에 이상은 선배가 나와서 대상 받는 걸 봤는데 문화적 충격이었다. 저 사람이 갖고 있는 끼와 에너지는 뭘까 싶더라. 그 때 자막에 한양대 연영과 라고 뜨길래 알아봤더니 실기 없이 성적만 좋으면 들어갈 수 있는 거다. 그래서 학력고사만 파서 들어갔지. 집에서는 난리 났었다. 밥 먹고 살 수 있는 보장이 아무 것도 안 되는 과를 가겠다니까 시골 양반들은 웬일이냐 싶으셨지. 그래서 처음엔 딴따라 아니고 감독 하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Q. 자식은 어느 정도 부모 뒤통수를 치면서 자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게 당신처럼 성정체성일 수도 있지만 진학이나 취업, 결혼에서도 늘 부모의 기대만큼 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홍석천: 부모님 세대의 공통된 특성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비교하는 건데 그게 문제다. 학벌이 중요하고 공무원이면 최고니까. 자신들이 못 했던 걸 자식을 통해서 이뤄내는 대리 만족을 자식의 행복이라고 착각하신다. 그러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에 관심이 없다. 자식이 뭘 잘 하는지, 뭘 할 때 행복한지 모른다. 밖에 나가서 뭔 짓을 해도 성적만 좋으면 되고.

Q. 그래서 당신이 조카들을 보살피는 것을 보면서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부모가 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부모-자식 관계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홍석천: 조카들 엄마인 누나랑 나랑 입장이 다르더라. 엄마는 맨날 공부 하라고 혼내고 게임도 못 하게 하거든. 나는 “게임 몇 시간 했니? 니들도 양심이 있으면 게임을 4시간 했으면 공부도 한 시간은 해줘야지. 니들이 만약 프로그래머가 되거나 게임 산업에서 이바지할 꿈이 있다면 하루 종일 해도 돼. 그게 아니면 어느 정도 스트레스 풀 정도만 하고 그 시간에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극장도 가고 명동 다니면서 쇼핑 하는 게 더 나아. 나갔다 와” 라고 한다. 나 스스로가 어렸을 때 1등 못 하면 아빠한테 회초리로 맞으며 자랐던 공포가 있다. 그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어서 아이들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경쟁에 민감한 게 사업에도 영향을 준 것 같다.

Q. 어떤 점에서 그런가.
홍석천: 10년 전에 첫 레스토랑을 열었을 때 3년 정도 계속 적자가 나고 성적이 나빴다. 나이트클럽에서 DJ 해서 번 돈으로 직원들 월급 겨우 주고. 그러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팔지도 못 하고 혹처럼 갖고 있었다. 문 닫으면 실패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그러다가 내가 점찍은 좋은 자리를 몇 년 동안 ㅉㅗㅈ아 다녀서 결국 가게를 냈다. 거기서 마음껏 하니까 성공하게 되더라. 그리고 주위에 가게를 7~8개 씩 운영하는 누나들을 보면서 저 정도는 있어야 내가 이태원에서 뭔가 하고 있다는 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하나 둘 늘리다 보니까 지금까지 왔다. 그런 식으로 성적이 잘 나와야 동기 부여가 되는 성향이 좀 있다.

Q. 방송에서도 “잘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다.
홍석천: 요즘 나를 보면서 롤 모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더욱 그렇다.

Q. 그럼 당신의 롤 모델은 누구인가.
홍석천: 생각해봤는데 정작 나는 없더라. 비슷한 처지에 비슷한 길을 걸은 사람이 없다. 엄밀히 따지면 의외로 아버지다. 내게 트라우마를 주신 분이지만 동시에 많이 닮았다. 아버지가 되게 섬세한 성격에 마음이 여리고 오지랖이 넓으시다. 젊었을 때 아무리 주위에서 말려도 전국을 다니면서 사업을 이것저것 하셨다. 재산도 많이 까먹고 사고도 많이 치고 어려운 사람도 많이 도와주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처럼은 절대로 안 살고 한 우물만 팔 거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웬걸 지금 내가 그러고 있다. (웃음)

“새해에는 그 누구한테도 돈 빌려주지 말자고 꼭 결심한다”

오! 쾌남│③ 홍석천 “배우라는 직함이 제일 좋다”


Q. 방송 활동이 늘어나면서 사업과 병행하는 게 더 힘들진 않나.
홍석천: 많이 바빠졌다. 그래도 주위에 믿고 맡길 사람들이 있어서 할 수 있는 것 같다. 새로 연 가게에서 일본 요리를 하면서 새로운 셰프를 만났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호텔 들어가서 바닥부터 시작해서 20년 경력을 쌓았는데 여자라서 일식 요리 쪽에서 차별을 많이 받고 벽에 부딪힌 상태였다. 그러다 내 트위터에서 연락이 닿아 면접 보고 요리를 먹어 봤는데 좋더라. 나는 차별 안 할 거니까 같이 한 번 해 볼래 라고 해서 인연을 맺었다.

Q.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사업가로서의 재능인데 그런 눈이 있는 것 같다.
홍석천: 인복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마음에 달린 거다. 우리 가게에는 시골에서 상경해 힘들 게 생활한 애들도 있고 동성애자여서 직장에서 차별 받다가 온 애도 있고 지방대 출신으로 방학 때 아르바이트나 할까 하고 서울에 왔다가 나를 만나서 레스토랑 비즈니스를 배우기 시작한 애들도 있다. 학창 시절에 일진이었는데 그냥저냥 나이만 먹다가 서른다섯 살에야 얼굴이 좀 잘생겼으니 연기나 할까 하고 간 학원에서 나를 만난 직원도 있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걸 하는데 잘 모르니까 출근 시간보다 세 시간씩 일찍 오더라. 그게 기특해서 달래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면서 가르쳤더니 결국 2년 만에 가게 매니저가 되었다. 그런 친구들한테 기회를 주면 더 열심히 하고 그렇게 인생이 많이 바뀌는 걸 보는 게 내 인복이고 사업이 잘 되는 비결 중에 하나일 수 있다.

Q.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마음을 나눠줄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홍석천: 그래서 미치겠다. 가게로 온갖 편지가 온다. 도와 달라, 돈 빌려 달라고.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도와주고 신경을 쓰려고 하는 건데 사실 되게 힘들기도 하다. 고맙다는 얘기를 못 들을 때도 있고 심지어 배신까지 당하면 상처가 크다. 그러면서도 구구절절한 사연 듣고 부탁을 받으면 또 고민하는 거다. 내가 재벌도 아니고 다 도와줄 수도 없는데. 그래서 차인표 선배님께 한 번 물어봤다. 선배님도 처음엔 마음이 아팠는데 자신이 전지전능한 게 아니니까 후원하는 단체를 통하거나 하는 식으로 기준을 정했다고 하시더라. 나도 이제는 기준을 정하려고 한다. 물론 마음을 정해도 미안함은 가시지 않는다.

Q. 아버지를 닮은 천성인가 보다.
홍석천: 그러게. 밤에 잠도 잘 못 잔다. 어디서 문자 오면 얘를 살려야 하니까 계속 답장 하고. 그러다 보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피곤하지. 그것까지 안 해도 되고 그만 도와줘도 된다, 넌 맨날 손해만 보냐고 걱정이시다. 새해가 되면 꼭 결심하는 게 그 누구한테도 돈 빌려주지 말자다.(웃음)

Q. 결국 자신의 인생 뿐 아니라 여럿의 삶을 어깨에 짐으로 지고 가는 건데 지칠 때는 어떻게 하나.
홍석천: 1년에 몇 번 정도 징징댈 때가 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걸로 화내고 꼬투리 잡고 악담 하고. 나도 쌓인 걸 풀어내야 하는데 그걸 보이기도 민망하니까 가까운 사람들한테 그러는 거다. 기댈만한 상대니까 그러는 거지만 당하는 사람은 뒷담화 하겠지. 그럴 때는 내 옆에 있으면 안 돼.(웃음)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