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륜미│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은 로맨스 영화
만약 영화 <건축학개론>이 6년 전에 개봉했다면, 아마도 ‘한국의 첫사랑 아이콘 vs 대만의 첫사랑 아이콘’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숱하게 보도됐을 것 같다. <건축학개론>의 풋풋한 첫사랑 서연(수지)처럼, 지난 2007년에 개봉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차분한 단발머리와 수줍은 미소가 잘 어울리던 샤오위(계륜미)도 우리가 잠시 잊고 살았던 첫사랑의 존재 혹은 운명적인 사랑을 떠올리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남색대문>의 씩씩하지만 남모를 고민을 안고 사는 여고생으로 데뷔한 지 10년. 이제는 20대를 뒤로 하고 30대를 향해 가고 있지만, <여친남친>에서도 계륜미는 여전히 교복이 잘 어울리는 소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자유와 청춘을 외치던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가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는 30대 시절까지 함께 보내는 세 친구 메이바오(계륜미), 아론(봉소악), 리암(장효전)을 주인공으로 한 <여친남친>은 우정부터 이성애, 동성애, 불륜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의 종류를 껴안은 작품이다. “원래부터 사랑의 범위는 넓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런 생각을 말로 표현할 기회를 찾지 못했어요. 그러던 차에 <여친남친> 시나리오를 만나게 됐고, 그동안 제가 생각했던 바를 비슷하게 표현한 것 같아 출연하게 됐죠.”



이번 영화를 통해 “사랑에는 경계가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힘주어 말하는 계륜미의 목소리에는 어떤 순간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뚜렷한 주관이 느껴지고, 극 중 인물처럼 학창시절에 고민이 있었냐는 질문에 “고등학교 때가 가장 고민 없이 마음대로 살았던 시절인 것 같다”며 시원하게 웃는 계륜미의 표정에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여배우의 대범함이 묻어난다. “평소에 늘 생각하는 게, 배우는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제 감정을 잘 컨트롤하고 혼자 삭히는 편이에요. 딱 집어서 돌파구를 찾은 건 아니지만. 그걸 찾았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됐겠죠? 하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봐도 여전히 인상적인 계륜미의 작품들처럼, 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은 로맨스 영화 다섯 편을 추천받았다.

계륜미│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은 로맨스 영화


1.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1996년 | 리처드 링클레이터
“반드시 마지막에 함께 있지 못하더라도 사랑하는 과정 자체가 아름다운 것, 그것이 멜로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비포 선라이즈>는 사랑하는 과정이 관객들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로 전달되지 않고 상상하는 여지를 남겨줘서 좋았습니다. 두 사람이 계속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극적인 얘기가 많이 나오진 않지만 주인공의 억압된 감정, 솔직한 감정이 많이 드러나서 인상 깊었습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과의 로맨스. 누구나 한 번쯤 꿈을 꾸지만 결코 이루기 힘든 꿈. 많은 영화들이 여행길에서의 우연한 사랑을 소재로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비포 선라이즈>의 유럽 열차 안에서 만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는 이방인이라는 장벽에도 불구하고 14시간을 비엔나에서 함께 보내며 서로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14시간이란, 짧지만 다음에 만날 날을 기약할 만큼 강렬한 기억이다.

계륜미│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은 로맨스 영화


2. <비포 선셋> (Before Sunset)
2004년 | 리처드 링클레이터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면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가 여자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차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때 여자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를 참지 못하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당신이 나의 인생을 얼마나 바꿨는지 울면서 얘기하는데, 그것이 두 사람의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오거나 어떤 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진 못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억에 많이 남았던 장면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제시와 셀린느는 과연 만났을까. <비포 선셋>은 10년 전 <비포 선라이즈>가 남기고 간 물음표에 대한 영화이자 비엔나에서의 추억을 파리로 옮겨 온 작품이다. 약 10년이 흐른 후 서른이 넘어 다시 만나 제시와 셀린느는 스물셋의 풋풋한 떨림 대신 세월이 묻어나는 얼굴로 대화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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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블루 발렌타인> (Blue Valentine)
2012년 | 데릭 시엔프랜스
“사랑이 현실과 부딪혔을 때 발생하는 문제를 잘 표현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결혼과 양육이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자신들에게 직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과거 사랑했던 시절을 되돌리기 위해 서로 많이 노력하지만 그조차 힘든 과정이라고 깨닫는 부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상우(유지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말하지만, 사랑은 정말 변한다. 특히 결혼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연애 시절 달콤하게 느껴졌던 행동도 더 밉게 보이기 마련이다. 의대생 신디(미쉘 윌리엄스)와 이삿짐센터 직원 딘(라이언 고슬링)은 여느 연인들처럼 연애를 거쳐 결혼에 골인하지만, 두 사람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들은 점점 그들을 지치게 한다.

계륜미│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은 로맨스 영화


4. <네 멋대로 해라> (A Bout De Souffle)
1959년 | 장 뤽 고다르
“고전 영화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우리가 흔히 명작이라고 부르는 영화들을 보면 과거 영화들이 많거든요. 수십 년 전에 찍은 영화들이지만 지금 봐도 대사들이 촌스럽지 않고 여운이 많이 남습니다. <네 멋대로 해라>를 로맨스 영화라고 정의하긴 애매할 만큼 두 사람의 사랑이 명확하진 않지만, 그런 종류의 사랑도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남녀 주인공이 계속 말싸움을 하고, 뭔가 올 것 같은데 갑자기 떠나기도 하고, 그런 부분이 재밌습니다.”



핸드 헬드 촬영, 과감한 편집, 즉흥 연출을 시도한 <네 멋대로 해라>는 6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촌스럽지 않고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다. 철저히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남자 미셸(쟝-뽈 벨몽도)과 미국에서 유학을 온 총명하고 현실적인 여자 패트리샤(진 세버그)의 사랑은 계륜미의 설명처럼, 명확하진 않아도 충분히 흥미로운 그것이다.

계륜미│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은 로맨스 영화


5. <피아니스트> (La Pianiste)
2002년 | 미카엘 하네케
“평소에 굉장히 좋아했던 작품입니다. 특히 여자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 마음에 듭니다. 뭔가를 하고 싶어 하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속으로 억누르는데, 그 억누르는 힘을 통해 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입니다.”



음표 하나 틀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피아니스트 에리카에게 찾아 온 제자 클레메(브누아 마지멜)와의 아슬아슬하고도 위험한 사랑.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다른나라에서>에 출연하기도 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 주연작이다.

계륜미│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은 로맨스 영화


“꼭 남자 배우여야 되나요? 여자 배우는 안 되나요? (웃음)” <여친남친> 기자간담회에서 ‘혹시 함께 작업하고 싶은 한국 남자배우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계륜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배우 전도연을 선택했다. “전도연 씨 영화를 보면 영화라는 작업을 존중하고 굉장히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 역시 연기를 할 때 순간을 믿고 집중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전도연 씨도 장면 장면마다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만약 전도연 씨와 영화를 찍게 된다면 어떤 장르라도 좋을 것 같아요.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선배님이잖아요.” 질문을 비껴가는 대답, 그래서 더 흥미롭고 오래 지켜보고 싶은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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