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 고생해야 사는 남자
하정우는 남자다. 군대에서 총도 많이 쏴봤고, 핫바와 라면을 우적우적 먹을 줄 알고, 야구와 축구를 좋아한다. 남자들의 비율이 절대적인 인터넷 커뮤니티 엠엘비 파크에서 그가 ‘불페너’(엠엘비 파크의 게시판 ‘불펜’ 이용자를 뜻한다)라 불리는 것은 불펜 이용자라는 사실이 알려져서만은 아니다. LG트윈스를 MBC 청룡시절부터 좋아했고, ‘FC하정우’를 만들어 축구를 하고, 게임 <프로야구 매니저>를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즐겼던 남자. 영화 <비스티 보이즈>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볼튼의 경기에 대해 ‘썰’을 푸는 하정우의 모습은 지금 평범한 20-30대 남자들의 어떤 정서를 공유한다. 그는 영화 <베를린>에서 격렬한 액션 연기를 펼치면서도, 퇴근 후 프로야구를 보면서 ‘치맥’을 먹는 30대 직장인의 모습이 어울릴 것 같은 톱스타다.



마초라기엔 영화 <멋진 하루>처럼 여자의 비위를 기막히게 맞추고, 꽃미남이라기엔 영화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콧수염이 잘 어울리는 조폭이었다. 마니악한 취향을 가진, 이른바 ‘덕후’라 하기엔 영화 <577프로젝트>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국토대장정을 앞장서서 이끈다. 마초, 꽃미남, 덕후가 그리는 삼각형의 어디쯤에 있는, 솔직히 평범하다고 해도 좋을남자. 그가 출연한 영화들에서 남자의 판타지와 현실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이유다. 그는 영화 <러브픽션>에서 위트있는 직접 쓴 편지 한 통으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그 여자의 과거를 끊임없이 궁금해하는 찌질함을 가졌고, 영화 <황해>에서는 놀라운 액션을 보여주는 도망자이지만 라면 한 그릇 먹는 게 절박하다.

하정우, 남자가 숨기고 싶은 맨 얼굴

도망자이든, 폼 나는 조폭 두목이든 하정우는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야만 했다.
도망자이든, 폼 나는 조폭 두목이든 하정우는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야만 했다.
하정우의 필모그래피란 남자의 고생, 남자의 찌질함, 남자의 패배라는 삼위일체를 남다른 환경에서 겪는 수난사로 통합하는 것과 같다. 살인마로 나오는 영화 <추격자>든 쫓기는 입장의 <황해>든 하정우는 늘 혹사에 가까울 만큼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폼나는 조폭 두목으로 나온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몸과 몸이 뒤엉켜야 했다. 하지만 그가 몸부림칠수록 그는 점점 더 패배의 늪에 빠진다. 그나마 밝은 분위기의 영화 <국가대표>도 거의 마지막까지 패배에 관한 이야기였고, <러브픽션>과 <멋진 하루>같은 멜로물에서도 뭐 하나 잘 되는 것 없는 인생이었다. 찌질함은 고생과 패배가 점철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원초적인 모습이다. 핀치에 몰리면 여자 앞에서도 징징거리고, 필요하다면 비굴해지기까지 한다.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그는 중학교 동창을 신병으로 받는 말년 병장을 연기한다. 동창 앞에서 멋있는 선임이고 싶다. 하지만 군 생활은 스트레스의 연속이고, 조직의 기강은 잡아야 한다. 그는 결국 악마 같은 선임의 얼굴을 드러낸다.



시작부터 하정우는 남자가 세상과 여자 앞에서 숨기고 싶은 맨 얼굴을 드러냈고, 수난은 그의 내면을 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동시에 이해 받을 여지를 만들어준다. 여성에 대한 배려, 승자의 여유는 모두 버린다. 수난 속에서 남은 것은 “살아있네”라는 말 그대로의 생존이고, 그를 움직이는 동력은 절박함이다. <비스티 보이즈>에서 돈을 내놓으라는 동거녀의 채근 앞에서, 그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상황을 벗어나고 여자를 달래야 한다. 결코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마초처럼 영웅으로 남으려하지 않는다. 여성과 잘 소통할 수 있는 꽃미남 로맨티스트도 아니다. 대신 하정우는 현실의 남자가 가진 허세, 찌질함, 절박함 그 자체를 관객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폼을 잡지만 오그라들지는 않고, 찌질하지만 자신도 그 사실을 안다. 하정우보다 연기 잘하는 배우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정우가 아니면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어떤 남성 캐릭터가 있다. 하정우는 그 남자의 방식으로 승리했다.

가장 평범한 액션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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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빈은 <아저씨>에서 압도적인 비주얼로 쓰레기 같은 현실에서 피어난 꽃 같은 액션 히어로가 됐다. 반면 하정우는 <베를린>에서 평범한 남자의 정체성을 멋진 액션 히어로의 모습에 결합시켰다. <베를린>에서 하정우가 연기하는 북한의 인민영웅 표종성은 수많은 적들을 물리치며 살아남는다. 그의 모습에서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이 겹친다면, 그것은 액션의 유사성보다는 남북 양쪽으로부터 쫓기는 과정에서 표종성이 풍기는 고독한 액션 영웅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표종성은 제이슨 본처럼 여성에게 마저 완벽한 남자가 아니다. 그는 아내 련정희(전지현)를 때론 의심하고, 아내와의 소원한 관계를 좀처럼 풀지 못한다. 일은 잘하지만 아내와 대화하는 법은 모른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내가 원하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아내와의 관계를 풀기 위해 당황한 표정으로 애 쓰는 표종성의 모습이 나오는 순간, <베를린>은 거대한 첩보전 속에서 현실적인 느낌을 갖고, 표종성이 보여주는 한국 남자의 내면은 이 작품의 국적을 명확하게 규정한다.하정우는 <베를린>에서 남자의 현실과 판타지, 평범한 남자와 액션 히어로의 균형을 잡으며 자신의정체성을 거대한 장르물 안에서도 관철시켰다. 군대에서 후임을 ‘갈구고’, 내 곁에서 치맥을 먹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가 그 방식 그대로 블록버스터의 히어로가됐다. 하정우는, 지금 가장 독특하고 경이로운 커리어를 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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