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요컨대,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난파당한 소년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며, 살아남은 소년의 이야기는 관객에게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리고 파이의 이야기를 믿을 것인가, 호랑이의 존재를 믿을 것인가, 신의 능력을 믿을 것인가, 이야기가 제공하는 선택지의 끝에는 결국 믿음에 대한 결정이 기다리고 있다. 여럿의 신을 섬기듯, 믿음은 결국 결정하는 사람의 몫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 이야기는 당신의 것”이라고 작가에게 이야기의 엔딩을 넘기는 파이의 말은 사실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파이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며, 그것이 이야기의 본질인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 가득한 상징들

물속에서 발광하는 해파리들, 솟구쳐 오르는 고래 등의 화면은 관객의 감각을 볼모로 잡아 판단력을 장악한다.
물속에서 발광하는 해파리들, 솟구쳐 오르는 고래 등의 화면은 관객의 감각을 볼모로 잡아 판단력을 장악한다.
전달받은 사람에게서 비로소 생존의 처분을 받는 것은 비단 이야기만의 운명은 아니다. 3D라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파이의 이야기를 현현시킨 이안 감독에게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영화에 관한 자발적인 고민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성과 신성의 구분을 반복적으로 묘사하는 이 영화는 사실상 노골적으로 선명한 코드들로 가득하다. 예컨대, ‘목마름’이라는 이름의 호랑이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육체적, 정신적, 예술적 갈등을 꾸준히 환기 시키며 이것은 메시지로 향하는 지도처럼 영화 전반에 드러난다. 이안 감독이 상징과 목소리를 숨기고 비트는 대신 선택한 것은, 그것을 덮어둘 수 있는 무엇이다. 물속에서 발광하는 해파리들, 솟구쳐 오르는 고래, 지구의 심장까지 깊게 깊게 파고 들어가는 화면은 관객의 감각을 볼모로 잡아 판단력을 장악한다. 이야기는 묵직하고 참혹할 수 있는 것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이안 감독에게 3D 기술이 제공하는 현실감이란 실제에 근접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에 힘을 부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영화는 진실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관객의 손에 설득력을 더해 준다.



호랑이를 돌보며 써내려간 파이의 노트가 날아가 버리는 것은 그래서 파이가 아닌 우리들에게 중요한 장면이다. 남은 것은 이야기뿐이며, 영화는 이것을 문장과 단어보다 정밀하고 압도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이때 영화가 선택 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가 빠트린 기록의 조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끌어들인 상상력에 스펙터클을 더해 미지의 것을 향한 관객의 욕망에 풀무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원작을 토대로 매번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어 내는 감독 자신의 태도에 대한 답변인 셈이다. 다른 신을 받아들이듯, 이안 감독에게 영화란 다른 이야기를 믿기로 결정한 순간 새롭게 지어 올릴 수 있는 신전인 것이다. 그리고 3D 기술은 신전을 완전히 새로운 양식으로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신전의 문 위에 가장 그럴 듯한 솜씨로 신의 얼굴을 새겨 넣기 위해 사용된다. 결국 사람들이 믿는 것은 전당이 아니라 그곳을 내려다보는 신의 힘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믿나요? 그렇다면 이 영화는?

영화는 관객들이 각자의 기억 속에 호랑이를 들여놓는 순간 믿음이 시작될 수 있는 최면의 설계를 완성해 낸다.
영화는 관객들이 각자의 기억 속에 호랑이를 들여놓는 순간 믿음이 시작될 수 있는 최면의 설계를 완성해 낸다.
그래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아바타>의 수혜를 받으면서도 그것의 예언을 배반하는 작품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를 통해 기술을 일종의 관문으로 해석했다.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하는 영화 속 인물들처럼 <아바타>는 3D를 통해 영화가 현실과의 경계를 허무는 체험이 될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오히려 영화의 본질과 본위에 대한 사유를 가능케 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휴고>를 통해 영화의 역사와 재현을 향한 인간의 욕구를 요약했다. 이 영화에서 3D는 새로운 장면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영화로 알려진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을 다시 목도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런가 하면 <호빗>을 만든 피터 잭슨 감독은 3D 뿐 아니라 HFR 기법을 동원해 가상의 세계를 완성하려 한다. 그에게 기술이란 ‘이곳’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의 실재함을 믿게 만드는 힘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란 이야기와 현실 사이의 어떤 지대이며, 기술은 그 영역과 현실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크린의 영역을 확고히 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프 오브 파이>는 바로 그 영역, 이야기와 현실 사이에 위치한 바다를 영화의 방식으로 채색하는 과정에 대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사실이든, 환상이든, 파이와 고락을 함께 한 호랑이는 뭍에 도달하자 파이의 곁을 떠나버렸다. 호랑이의 흔적은 파이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지만, 영화는 관객들이 각자의 기억 속에 호랑이를 들여놓는 순간 믿음이 시작될 수 있는 최면의 설계를 완성해 낸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파이의 질문이라면,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은 다시 한 번 관객의 의심을 시험하는 이안 감독의 물음이다. 호랑이가 사라진 숲의 입구에서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며 숲은 순식간에 입체적이고 생생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곧 화면은 사진처럼 고정되고 숲의 색은 바래지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당신은 이야기를 믿기로 하였나.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믿을 수 있겠는가. 극장 안의 영화는 관객들의 것이고, 결정 역시 그들의 몫이다. 그리고 이안 감독은 매혹의 힘으로 그 결정의 한계를 도발한다. 더 믿고 싶은 것이란 결국 호랑이를 믿기로 한 작가를 향한 파이의 말처럼 “신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니까 말이다.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