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혁│감성적인 색깔을 가진 음악들


훤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많은 남자 배우들이 냉철함을 앞세운 캐릭터로 주목받듯 이종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강렬한 눈빛으로 시선을 제압하는 선도부장이었고, 연극 <레인맨>에서는 교만한 주식 트레이더였으며, KBS <추노>에서는 자존심 강한 장수였다. 그러던 이종혁은 KBS <결혼해주세요>에서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찬 ‘제2의 장진구’ 김태호 역을 맡으며 다른 얼굴을 끄집어냈고, 새로 발견한 가능성은 지난해 SBS <신사의 품격>을 만나 만개했다. 끊임없이 낯선 여자를 철없이 반기는 유부남 ‘정록 오빠’는 꾸준히 핀잔의 아이콘이었지만, 이종혁은 명확한 캐릭터 덕분에 네 명의 신사 중 가장 빛날 수 있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청담 마녀’가 각종 예능프로그램을 섭렵할 때 이종혁은 오히려 무대로 돌아왔다. “대학 졸업 후 바로 뮤지컬 <서푼짜리 오페라>로 데뷔했어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린 것은 영화였기 때문에 제가 연극, 뮤지컬을 많이 했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1년에 한 작품씩 꾸준히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 온 그가 선택한 작품은 소심한 말단 공무원이 어느 날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발견한 후 가난한 자를 돕고 권력자를 심판하는 거리의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의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 “<벽을 뚫는 남자>의 듀티율은 이정록이라는 철부지 바람둥이 캐릭터와는 정반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남자예요. 그런 소박한 남자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면서 다정다감한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하죠. 새로운 이종혁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소심과 이종혁이라니. 쉽게 연상되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무대 위의 그는 자신의 큰 키를 3분의 2로 접으며 예상 밖의 순수함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시작할 때는 찌질하고 소심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 저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인간관계에서도 워낙 보이는 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편이라 듀티율의 순수하고 따뜻한 면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관객들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잘 전달하고 싶어요.” 이종혁이 아날로그 정서로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녹이는 <벽을 뚫는 남자>처럼 감성적인 색깔을 가진 다섯 곡의 음악을 추천했다.

이종혁│감성적인 색깔을 가진 음악들


1. Francis Lai의 < Un Homme Et Une Femme (A Man And A Woman) >
“‘Un Homme Et Une Femme – Chant’는 아코디언 연주가 프랑시스 레이가 작곡한 영화 <남과 여>의 메인 테마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벽을 뚫는 남자>의 배경이 프랑스 몽마르트인데, <남과 여>는 프랑스의 해안이 배경이라 들었어요. 프랑스 음악들은 언어 자체가 주는 특유의 어감 덕분인지 아름다운 서정시 같아요. ‘우리의 목소리가 가만히 낮게 노래할 때 두 사람의 마음을 발견했지요, 어떤 기회와 같은 희망과 같은 것을’이라는 가사가 참 좋아요. 영화는 컬러와 흑백을 오가는데 음악만으로도 그 영화의 감성을 느낄 수 있어요.” 우리에게 이 곡은 영화 <남과 여> 외에도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두 남녀가 눈을 깜빡거리는 장면으로도 익숙하다.



이종혁│감성적인 색깔을 가진 음악들
2.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 난 알아요>
“응답하라 나의 1992년. (웃음) 당시 서태지 신드롬은 굉장했잖아요. 서태지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색깔을 모두 음악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 같아요. 특히 역동적이고 파격적인 가사와 랩이 담긴 1집 앨범은 지금 들어도 모든 노래가 너무 좋아요. ‘클래식’이에요. ‘난 알아요’를 추천하는 것은 과거의 나를 추억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때의 나도 촌스럽지 않은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에요.” ‘랩’이라 불리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와 가격표를 떼지 않고 입은 의상 등 20년 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그 자체로 혁명이었다.



이종혁│감성적인 색깔을 가진 음악들
3. Olivia의 < A Girl Meets Bossanova >
“‘In Other Words’라는 곡을 1962년에 피아니스트 조 하넬이 보사노바로 편곡한 후 제목을 ‘Fly Me To The Moon’이라 고치고 대히트를 쳤죠. Nat King Cole, Lisa Ono, Marvin Gaye, Julie London 등 이 곡을 부른 가수는 많지만, 특별히 제가 좋아하는 건 감미로운 목소리의 보사노바 재즈 요정 올리비아가 부른 버전이에요. 은은한 솔바람이 느껴지는 이국적인 정취와 감성이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 그 외에 < A Girl Meets Bossanova 2 >의 ‘Make it mutual’과 < Olivia >의 ‘You and Me’도 굳뜨!” 2005년, 열아홉의 올리비아는 대중에게 익숙한 음악을 모아 < A Girl Meets Bossanova >로 데뷔했고 이후 다양한 레퍼토리의 음악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종혁│감성적인 색깔을 가진 음악들
4. 김건모의 <7집 Kim Gunmo #007 Another Days>
“‘미안해요’는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고마움과 진심이 느껴지는 너무 슬픈 발라드곡이잖아요. 누구든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가 있다면 와 닿는 노래이지 않을까요. 저도 평소 장난스럽고 철부지 같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마음의 등대 같은 아내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껴요. 도입부의 피아노 반주가 너무 좋은데, 이 곡은 듣고 있으면 슬픈 노래에 울적해지기보다는 메마른 마음이 촉촉해지고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핑계’나 ‘잘못된 만남’ 같은 경쾌한 곡이 김건모를 대표하지만, 피아노 선율에 의지한 김건모 표 발라드는 미소 뒤에 감춘 한숨처럼 쓸쓸하게 청자의 귀를 파고든다. ‘아름다운 이별’과 ‘미안해요’는 그 정점.

이종혁│감성적인 색깔을 가진 음악들


5. 부활의 <8집 새벽>
“가끔 노래방에 가면 부르는 곡이에요.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는 말처럼 ‘Never Ending Story’는 추억을 부르는 음악인 것 같아요. <벽을 뚫는 남자>의 듀티율도 사랑을 얻고 영웅으로서의 삶을 살지만 결국에는 벽에 갇히면서 최후를 맞게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삶에서 서로 사랑하며 아름다운 인생을 살자는 찬가를 부르거든요. 이 곡도 그런 느낌이 들어요. 슬픈 사랑도 결국 사랑이란 말도 있잖아요.” 탈퇴한지 13년 만인 2002년에 이승철과 부활이 재결합해 발표한 곡으로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로 서로에게 빛이 되었고, 이후 후배 가수들의 리메이크로 현재까지 꾸준히 불리고 있다.

이종혁│감성적인 색깔을 가진 음악들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관객들과 한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고, 모든 게 현장에서 바로 전달된다는 점이 부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무대를 포기할 수 없어요. 특히 박수와 함성을 받으며 느끼는 커튼콜의 카타르시스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때때로 무대는 마약과도 같다. 그래서 감초로 등장했던 뮤지컬 <싱글즈>, <미녀는 괴로워>와 달리, 120분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책임지는 <벽을 뚫는 남자>는 그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음악이 굉장히 좋은 작품인데 이번이 아니면 언제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욕심을 냈죠. 앞으로도 저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관객들도 설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인생은 YOLO (You Only Live Once). 한 번 살다가는 인생, 이종혁답게 유쾌하고 재밌게 즐길 수 있다면 언제든지 시작이에요.” 스스로 즐기는 이에게서는 믿음이 반짝인다. 이종혁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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