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석│희미하게 남아있는 추억 속의 멜로디들
억울하지는 않았을까. 근사한 자동차에 소녀를 태우고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매너 좋은 선배, 소녀의 가족들까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큰 집을 선뜻 내어주는 순정 있는 오빠. 2012년 가장 사랑받은 두 개의 멜로에서 유연석이 연기한 인물들은 사실 능력 있고 인심도 후한 남자들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건축학개론>도 <늑대소년>도 유연석을 악역이라고 설명하는 영화들이었다. 두 사람의 합일을 위해서 제 3자의 마음은 조금 왜곡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지만, 그래서 스스로는 “관객들의 미움을 샀다는 건, 그만큼 캐릭터가 잘 표현이 됐다는 결과잖아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커요”라고 흔쾌히 말하지만, 이 해사한 청년의 대표 얼굴이 만질만질하게 얄미운 모습이라는 건 아무래도 안타까운 일이다.



선과 악의 구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 <올드보이>에서 어린 우진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MBC <혼>과 <런닝, 구>, 영화 <혜화,동>을 거치는 동안 유연석은 좀처럼 닮은 인물을 연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캐릭터들을 “핸디캡을 극복해나가는, 연민이 생기는 인물들”이라고 설명하고, <늑대소년>의 지태에 대해서도 “사랑의 표현 방식이 서툴렀고, 사랑받고 싶은 절실한 마음이 못된 행동으로밖에 표현되지 않으니까 동정이 가는 인물이죠”라고 이해한다. 한 걸음씩, 차근차근 배우의 계단을 밟아 오고 있는 유연석의 가장 큰 힘은 결국 주어진 인물을 고민하고, 그의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과거를 모아 현재를 만들고,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생각할 줄 아는 남자 유연석이 추천하는 노래들이 더욱 흥미로운 건 그래서다. 자신만의 ‘기억의 습작’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는 추억 속의 멜로디들을 따라가다 보면, 바로 지금의 유연석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유연석│희미하게 남아있는 추억 속의 멜로디들
1. 엠엔제이의 <1집 순수의 시대 OST (SBS 드라마 스페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둡고 고달픈 시기로 기억되는 고3 시절이건만, 유연석은 그 시절을 상징하는 노래로 애절한 록발라드 ‘후애’를 선택했다. “2002년도에 제가 고3이었거든요. 한창 수능 준비를 할 때였는데, 잠깐 머리를 식히려고 TV를 틀었다가 드라마 <순수의 시대>에 이 노래가 나오는 걸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이 노래는 제가 노래방에 가면 꼭 부르는 애창곡이죠.” 고수와 김민희가 출연했던 SBS <순수의 시대>에 삽입되었던 ‘후애’는 한국적 록발라드의 기본에 충실한 남성적인 곡이다. 이후 이 노래를 작업한 듀오 엠엔제이는 역시 고수가 출연한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의 OST를 통해서 또 한 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유연석│희미하게 남아있는 추억 속의 멜로디들
2. Brian McKnight의 < Back At One >
“막 어른이 되었을 무렵의 애창곡이라면 브라이언 맥나잇의 노래 ‘Back At One’을 꼽을 수 있겠네요.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들었는데, 대학 동기들과 후렴구를 따라 부르다 보니 점점 익숙해진 노래죠.” 남자의 감수성에 충실한 유연석이 두 번째로 추천한 노래는 감미로운 R&B 보컬리스트로 국내에서도 큰 인지도를 가진 브라이언 맥나잇의 ‘Back At One’이다. 유능한 프로듀서이자 싱어송라이터인 그는 뛰어난 멜로디 메이커인 동시에 화려한 기교를 부드럽게 소화하는 테크니션으로 많은 뮤지션들에게 교본과 같은 존재. 하지만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세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가사가 있는데 그 부분은 항상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면서 불러야 제 맛이었어요. 다 같이 합창하면서요”라는 유연석의 추억은 달콤함보다는 유쾌함에 가깝다.



유연석│희미하게 남아있는 추억 속의 멜로디들
3. 고한우의 <1집 암연>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치고도 유연석의 취향은 생각 외로 고풍스러운 면이 있다. 1997년 발표되어 언더그라운드 가수였던 고한우에게 큰 명성을 안겨 준 ‘암연’은 특히 그런 유연석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노래다. “20대 초반에 이별을 맞이했을 때 특히 많이 들었던 곡입니다. 혼자 추억에 젖어서 듣고, 부르고, 또 듣고 그랬었죠.” 발표 당시 투병 중인 친구를 위해 삭발을 하는 소녀가 등장하는 초코과자의 광고 삽입곡으로도 큰 관심을 모았던 ‘암연’은 1997년 당시 SBS 드라마 <여자>에도 삽입되는 등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 중 하나로 기억되는 곡이다.



유연석│희미하게 남아있는 추억 속의 멜로디들
4. 김연우의 <3집 사랑을 놓치다>
유연석의 리스트에 드라마 삽입곡이 많은 것은 아무래도 음악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노래가 전해주는 풍경과 느낌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영화 <사랑을 놓치다>의 삽입곡인 김연우의 ‘사랑한다는 흔한 말’은 그래서 유연석에서는 아픔인 동시에 상비약 같은 노래. “군대 있을 때 2년 동안 만났던 여자친구와 헤어졌어요. 세상 모든 이별노래가 다 내 노래인 것 같았던 그때, 제일 많이 들었던 노래가 바로 이 곡이죠. 나중에는 이별하는 연기를 해야 할 때 이 노래를 들으면 감정 조절에 도움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물론, 영화 <사랑을 놓치다>도 굉장히 재미있게 본 작품이고요.”



유연석│희미하게 남아있는 추억 속의 멜로디들
5. 허각의 < LIKE 1st MINI ALBUM ‘First Story’ >
음악과 감정의 사이가 밀착된 만큼 노래를 들으며 우는 날도 많을 것 같지만, 사실 유연석에게 그런 경험을 준 목소리를 손에 꼽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허각의 노래들은 유연석의 눈물샘에서 아킬레스건을 찾아내는 버튼과 같다. “허각 씨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너무나 좋아해요. 그래서 그런지 ‘hello’는 들을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더라고요. 다른 노래보다 훨씬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뭔가가 있어요.” 온 힘을 다해 음표 사이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수의 진심을 읽어주는 건, 장면 사이에 묻혀버린 이야기를 붙들기 위해 애쓰는 배우의 감수성인 것이다.

유연석│희미하게 남아있는 추억 속의 멜로디들


작은 영화의 주인공부터, 흥행 영화의 인상적인 캐릭터까지 유연석은 성큼 큰 걸음을 내딛는 대신 촘촘하고 성실하게 기본기를 닦으며 20대를 보냈다. “가장 명심해야 할 건, 조바심을 갖지 않는 일 같아요. 제가 천천히 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게 정석이잖아요. 좋은 작품에 참여하고, 공들인 만큼 좋은 결과를 맞아서 저는 만족하고 있어요”라고 느긋하게 지난 작업을 중간 결산하는 그는 미래에도 큰 욕심을 걸어두지 않는다. “서른을 맞아서 <올드보이>를 찍던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신중하고 진정성 있는 배우가 되기 위해서 새롭게 시작하는 거죠.” 하지만 이 남자가 여유를 부리는 것은 시간일 뿐, 연기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의심의 여지없이 단단하니 응원하는 쪽에서도 조바심 낼 필요는 없겠다. “<늑대소년> 확장판 보셨나요? 제가 전달하고 싶었던 지태의 진심과 이유를 좀 더 설명할 수 있어서 저는 참 좋았거든요. 지태가 궁금하다면, 또 보세요! 하하하.”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