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에도 100편을 훌쩍 넘는 뮤지컬이 공연되었고, 샤롯데 씨어터에 이어 블루스퀘어와 디큐브아트센터 등 1000석 규모의 뮤지컬 전용극장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해외로 진출한 창작뮤지컬의 수도 부쩍 늘었고, 장르의 장벽은 더더욱 낮아졌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질문 하나. 그 많은 뮤지컬은 대체 누가 본단 말인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로비가 관객으로 가득 차는 공연도 있지만, 관객이 3명밖에 들지 않아 당일 공연을 취소하는 작품도 여전히 적지 않다. 이제는 양적인 팽창만큼 질적인 팽창을 고민할 때다. 과거 뮤지컬 VIP 티켓만이 인생 유일한 사치였던 기자와 뮤지컬 평론가 지혜원이 올 한해를 결산하며 뮤지컬의 내일을 그려봤다.
[뮤德과의 동침] 2012년 뮤지컬, 누가누가 잘했나
드라마와 영화 없이 창작뮤지컬은 안되나요?
장경진: 올 한해 공연된 창작뮤지컬 초연작 중 80% 이상에 원안이 있었다. <커피프린스 1호점>과 <미남이시네요> 등은 드라마, <번지점프를 하다>는 영화, <심야식당>은 만화, <완득이>는 소설, <롤리폴리>나 <내 사랑 내 곁에>는 주크박스 뮤지컬이었다. 원작이 있는 것 자체를 지양할 바는 아니지만, 이 중 시원하게 뮤지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지혜원: 드라마나 영화의 뮤지컬화는 앞으로도 계속 될 거다. 특히 드라마 원작 뮤지컬은 우리나라만의 특성인데, 주로 인기를 얻는 로맨틱코미디물의 타겟층과 공연의 주 타겟층이 2030 여성들로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궁>이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해외진출이나 투자유치, 마케팅의 차원에서도 이런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대부분이 드라마에 기대어 작품을 흥행시키려다보니 드라마를 그대로 답습하며 실패한다. 창작진들에게 대체 뮤지컬을 뭐라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다. 이건 뮤지컬을 드라마의 아류나 하위 개념으로 생각하는 거 아닌가.
장경진: 명대사와 OST를 과도하게 끌어들임으로써 뮤지컬도 드라마도 아닌 이상한 장면을 구현할 때도 많다. <파리의 연인>의 “이 안에 너 있다”라는 대사는 굉장히 유명하지만 그만큼 이동건의 아우라가 강하다. 그런데 무대에서 다른 배우가 그 대사를 하는 순간, 제작진은 그 당시의 드라마를 추억하길 바라겠지만 사실 관객은 그 순간 뮤지컬에서 빠져나와 팔짱끼게 된다.
지혜원: 드라마를 원작으로 뮤지컬을 만들 생각이라면 스토리를 쳐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기존 작품에 대한 잔상이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캐릭터를 다시 잡아줘야 한다. 그리고 스토리에 들어가지 못한 부분은 음악을 통해 압축적으로 표현해줘야 한다. <레미제라블>이 2개의 곡으로 장 발장의 과거와 변화를 15분 사이 보여주는 게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원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공연장을 찾을 때는 드라마에서 접하지 않은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뮤지컬만의 메리트가 있어야 한다. <리걸리 블론드>의 ‘퍼스널 에세이’는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무대에서는 쇼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해외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도 있다.
장경진: 아예 다른 매체이기 때문에 해체했다가 목적성에 맞게 재조립을 하는 게 가장 필요하고,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는 작년 말에 공연된 <막돼먹은 영애씨>가 직장생활과 멜로라는 두 가지 이야기를 뮤지컬만의 언어로 잘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지혜원: 지금처럼 빨리 빨리 만들어서 실패하는 일이 잦아지면 오히려 드라마나 영화는 안 된다는 장르의 제한이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매체의 특성과 개별 텍스트, 수용자, 그리고 산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선택은 굉장히 신중해야 한다.
[뮤德과의 동침] 2012년 뮤지컬, 누가누가 잘했나
한국어 버전이라고 해서 다 같은 버전은 아니다
장경진: 국내에 처음 소개된 라이선스 작품 중에는 <엘리자벳>, <라카지>, <위키드>, <레미제라블>이 가장 화제였다. 그 중 <엘리자벳>과 <위키드>는 흥행적인 면에서 도드라졌고, <라카지>와 <레미제라블>은 완성도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위키드>는 내한공연이었기 때문에 같은 잣대를 댈수는 없을 것 같다.
지혜원: <레미제라블>은 레플리카 프로덕션(대본과 음악, 무대까지 모든 것을 그대로 가져온 버전)이었고, <라카지>는 대본과 음악만 가지고 한국에 맞춘 버전이었기 때문에 포인트가 다르다. <라카지>는 작품에 가장 적합한 이지나 연출에 잘하는 배우들을 붙여놨으니 처음부터 잘될 줄은 알았지만 포지셔닝(마케팅) 전략도 좋았다. 생소할 수 있는 게이 부부와 클럽 이야기를 가족과 유쾌한 쇼로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중화시키려는 노력을 많이 했고, 극장을 LG 아트센터로 잡으면서 고급화전략을 펼친 것도 중년 관객을 끌어들이는데 큰 힘이 됐다. 자코브의 비중을 높이면서 웃음코드도 놓치지 않았는데 막 내리기 전 제작진과 관객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좀 아쉽다.
장경진: 개인적으로는 독특한 일러스트로 만든 포스터가 맘에 들었다. 큰 정보가 없는 작품이었는데, 오묘한 표정의 일러스트와 ‘라카지’라는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우리나라 스태프들로만 이루어졌는데 합이 정말 좋았고, 이민호처럼 무대 경험이 없는 배우도 캐릭터에 맞춘 캐스팅을 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웃음코드가 100개면 100개를 다 살렸던 정성화는 물론이고 아이가 생긴 이후의 김다현을 캐스팅 한 것도 좋았다. 그나저나 정성화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이제는 희극과 비극이 다 너무 잘 어울린다.
지혜원: <레미제라블>처럼 손댈 수 없는 작품은 어렵지만 가능하다면 로컬라이징의 여지를 열어두고 계약을 하는 것이 더 좋다. <넥스트 투 노멀>은 아들을 잃건 아니건 우리나라 엄마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인데 우리 정서를 너무 못 담은 것 같아 아쉬웠다.
장경진: 일단 <넥스트 투 노멀>은 국내에 중년의 이야기를 다룰만한 배우가 많지 않다는 생각에 좀 씁쓸했다. 당시 박칼린이 캐스팅되기도 했고, 작년 연말부터 올 초까지 공연됐기 때문에 중년관객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나 이야기에 비해 음악이나 무대 등이 너무 세련돼서 접근에 어려운 지점들이 있었다. 정작 어른들의 이야기인데 자신들이 공감할 수 없었던 거지.
지혜원: 라이선스와 창작 뮤지컬 중간에 로컬라이즈 된 라이선스라는 영역이 생기고 있는 셈이고, 그게 우리 시장의 독특한 장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역을 잘 발전시킨다면 영상매체가 뮤지컬이 됐을 때 캐릭터를 재정립하는 것처럼, <라카지>가 자코브를 재정립해서 다른 기능을 만들 듯 우리 시장에 적합한 캐릭터나 대사를 추가할 수 있지 않을까. 해외관객과 우리나라 관객의 차이를 찾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의 엔딩" src="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AS10C3P54I4zd3qFSHyQ2MMjmFnddvgh.jpg" width="555" height="369" border="0" />

잘 나가던 뮤지컬, 왜 굳이 바꿔야 했나요?
장경진: 지난번에도 한 번 언급했던 적이 있는데, 재공연 되는 작품들의 퀄리티가 점점 떨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특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2010년에 리바이벌 버전을 제작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는데, 올해는 미안하지만 과거부터 봤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이 작품과 이별을 선언했다. 2년 전 리바이벌 버전을 제작하면서 송창의와 박건형을 캐스팅했었다. 그들을 통해 대중을 유입하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대중이 보기에는 이 작품이 뮤지컬이라는 장르에서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충족되지 않은 작품이었을 거다. 그런 지점을 상쇄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보강했고 그러다보니 오히려 원래 작품이 가지고 있던 본질적 미덕이 사라져버렸다.
지혜원: 극장 사이즈를 키웠다는 것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오프브로드웨이에서 무리하게 브로드웨이로 온 것 같달까? 같은 공연팬이라도 소극장에서 보던 관객들이 대극장에 와서 만족스러워 할까? 그렇다고 대극장 공연을 보는 일반 대중들이 기대하는 텍스트인가? 대극장으로 오면 다른 대극장 뮤지컬과 경쟁해야하는데 그러기에는 경쟁력이 약했다는 결론이다. 변환을 할 때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더 많은 객석을 채우는 것만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
장경진: 과거 제작사에 붙어 투자를 하던 CJ가 제작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문제일수도 있지 않을까.
지혜원: CJ E&M 공연사업부문(이하 CJ)은 투자와 제작을 담당하지만 조직 안에 실질적인 프로덕션 파트를 모두 갖추고 있지는 않다. 브로드웨이에 빗대어 보자면, CJ는 프로듀서이자 제너럴 매니저로서의 역할을 하고 프로덕션 매니저, 기술감독 등은 별도 고용하는 시스템인데, 큰 기업 내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업부문이기 때문에 그 방법이나 절차가 다소 까다롭다. 예컨대, 디즈니 씨어트리컬은 대기업 계열사라는 점에서 CJ와 유사하지만 공연사업 법인을 따로 분리해서 자체 프로덕션 시스템을 운영한다. 브로드웨이 방식 즉, 공연하는 사람들의 상식적인 테두리 안에서 프로덕션 절차와 자금이 운용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디즈니는 브로드웨이의 상식 안에서 점차 자신만의 새로운 제작 여건을 만들어왔다. 아마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경우엔 대기업의 시스템과 산업화가 덜 된 공연시장의 환경이 충돌한 부분도 무시할 수 없을 거다.
[뮤德과의 동침] 2012년 뮤지컬, 누가누가 잘했나
관객과 제작진 사이의 문제 해결은 존중에서부터 시작된다
장경진: 올해는 관객과 제작진 사이의 충돌이 유난히 많았다. <쓰릴 미>와 <라카지> 모두 제작진이 트위터에 관객모독성 글을 남기면서 시작됐는데, 관객 입장에서는 제 돈 주고 욕먹는 꼴이 됐으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두 작품 모두 문제를 일으킨 스태프가 갈리고 사과문을 공지했지만 형식적이라는 의견도 많았고, 여전히 관객을 향한 이런 시선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호갱’의 기운을 느끼는 거다.
지혜원: 지금 뮤지컬 산업이 너무 작아서 모두가 옹기종기 붙어있는 형국이다. 제작진과 관객 모두 내가 아닌 다른 영역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것 같다. 뮤지컬 시장을 작품이 아닌 배우 중심으로 키워오다 보니 유명 배우나 아이돌도 들어오고 나름의 팬덤이 양산되면서 여러 문제가 생겼다. 제작진은 관객의 문제를 말하지만 시장 자체가 작품으로만 승부하고 있지 않은 것도 문제다. 미국에서도 관객들의 목소리는 높지만 작품의 뼈대가 굳건하다보니 작품에 대한 논리적인 비판이 가능해진다. 관객 평론가가 전문가 못지 않은 비평을 펼치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갑론을박이 가능한 온라인 통로도 다양하다. 이렇게 되면 제작진도 관객의 평가를 무시할 수 없다.
장경진: 사실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인 문제다. 하지만 배우를 통해 뮤지컬을 시작했더라도 요즘은 작품 자체에 눈을 돌리는 팬들도 많아지는 추세다. <레미제라블> 오픈 전에 친구들끼리 모여서 25주년 기념영상을 보기도 하더라.
지혜원: 팬들도 스스로 좋은 뮤지컬 팬이 되기 위한 자정이 필요하고, 과격하든 진솔하든 관객과 제작진이 한자리에 모여서 얘기할 수 있는 자리도 더 필요하다. 관객의 양적인 증가도 절실하지만 지금 현재 있는 관객들의 깊이를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공연시장, 작품을 둘러싼 백그라운드 지식도 함께 소통된다면,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 김호영, 홍광호." src="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AS10RfQyrdsuaAnMxnoGRxJLf.jpg" width="555" height="441" border="0" />



결국 작품은 배우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라카지>와 <레미제라블>로 자신의 가능성을 맘껏 보여준 정성화는 단연 올해의 배우다. 하지만 그 외에도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있었으니, 우리에게서 통장잔고를 훔쳐간 도둑 같은 이들에게 이 상을 수상하는 바이다.

올해의 자랑스런 뮤지컬인 상: 조정석
그동안 무대를 벗어난 뮤지컬배우가 여럿 있었지만, 조정석만큼의 파급력을 가진 이는 드물었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납뜩이’는 개그프로그램의 캐릭터와 청룡영화제 신인상을, MBC <더킹 투하츠>의 은시경은 멜로주인공으로서의 가능성을 낳았다. 이어 영화 <관상>과 <은밀하게 위대하게>,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까지 촬영 중이거나 캐스팅 논의 중인 작품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으니 내년에도 무대보다 스크린에서 만날 일이 더 잦을 듯 하다.



올해의 ‘어서와 아이돌’ 상: 정은지
뮤지컬 무대에서 노래와 연기 모두 만족할만한 성과를 이루는 아이돌은 많지 않다. 2012년 <리걸리 블론드> 재공연으로 뮤지컬에 데뷔한 에이핑크 정은지는 풍부한 성량과 깔끔한 고음처리로 안정적인 노래실력을 선보였고, 리즈 위더스푼이나 제시카와는 다른 털털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정은지만의 엘 우즈를 탄생시켰다.



올해의 홍길동 상: 김다현
2011년 제대한 김다현은 3년간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듯 올 한해 드라마 하나, 연극 하나, 뮤지컬 다섯,총 일곱개의 작품에 출연했다. 하지만 작품과 작품사이 여백이 거의 없었고, 드랙퀸 엄마부터 락커, 사랑에 빠진 예민한 남자 역까지 맡음으로써 관객들은 홍길동마냥 김다현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만큼 성실했던 이도 없다.



올해의 잠실인 상: 홍광호
김다현과 다른 의미로 성실했던 한 남자. 송파구 잠실동에 위치한 뮤지컬 전용극장 샤롯데 씨어터는 짧게는 2개월부터 길게는 6개월까지 장기공연이 가능한 곳이다. 이곳에서 홍광호는 올 한해 <닥터 지바고>와 <맨 오브 라만차>를 공연하며 1년 내내 잠실에서 살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의 잠실생활이 2009년 <오페라의 유령>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이후 2011년 <지킬앤하이드>까지 포함하면 홍광호는 프랑스와 런던, 러시아와 스페인을 모두 잠실에서 여행한 유일한 1인인 셈이다.



올해의 ‘나 가거든’ 상: 김호영
국내 뮤지컬배우 중 여자솔로곡을 원키로 부를 줄 아는 몇 안 되는 배우. 언제나 당당하고 독특한 패션에 위트 있는 언변으로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라카지>의 집사 자코브로 본인의 특기인 미성과 통통 튀는 연기를 정점으로 선보이고 입대했는데, 입대 전 한 공연에서 조수미의 ‘나 가거든’을 부르기도 했다고. 그러나 12월 27일 신병교육수료식을 치렀다고 하니 앞으로 제대까지는 약 600일이…



올해의 만석꾼 상: <캐치 미 이프 유 캔>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3월 초연과 12월 재공연에서 모두 각각 다섯 명과 여섯 명의 프랭크, 세 명의 브랜다를 캐스팅했다. 특히 슈퍼주니어의 규현과 샤이니의 키, 소녀시대의 써니, 비스트의 손동운 등이 캐스팅되면서 그들을 응원하는 쌀 화환이 총 16톤에 달한다고 한다. 캐스트별 경우의 수가 실제 공연되는 횟수보다 많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이쯤 되면 만석꾼이 부럽지 않은데.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