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 11시 45분. 누군가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빴던 하루와 지친 일주일을 마감하는 이 시간, TV 한 귀퉁이에서 새로운 잎이 두꺼운 땅을 뚫고 올라온다. 2010년 부활된 이래 올해로 세 번째 시즌을 맞은 KBS <드라마 스페셜> 단막 시리즈(이하 드라마 스페셜)가 지난 23일 밤 스물 네 편째 작품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이번 시즌에도 너무 늦은 시간, 너무 작은 목소리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탓에 애써 눈을 비비고 찾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작은 잎 같았다. 하지만 눈 밝은 사람들은 드라마 스페셜이 힘겹게 싹틔운 작지만 곱고 묵직한 이야기에 웃고 울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시즌은 장르성이 강화되고 연출자들의 색깔이 분명해졌으며 신인 작가들의 다양한 시선이 돋보였다. 하지만 이 연약한 잎 앞에 다시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있다. 편당 8000만원의 제작비로 겨우 꾸려오던 살림살이를 더 줄이라고 요구받았던 것. 절반 수준으로 삭감될 것으로 알려졌던 예산안이 다행히 적어도 올해 수준은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들려오지만 비현실적인 수준인 것은 마찬가지다. 이번 시즌을 진두지휘한 황의경 CP와 첫 작품이었던 <습지생태보고서>와 페이크 다큐라는 새로운 시도로 눈길을 끈 <아트>를 연출한 박현석 PD를 만나 지난 제작과정과 고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스페셜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다. “독창적이면서 대중성도 담보하고 있는 건 모든 드라마의 로망인데 그걸 왜 물리적 여건이 가장 안 좋은 단막극한테만 강요하는지” 라는 토로에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어 더욱 아쉬운 시간이었다.

Q. 지난 일요일 <또 한 번의 웨딩>을 마지막으로 드라마 스페셜 단막 시리즈 세 번째 시즌을 마무리했다. 소감이 어떤가.

황의경: 내년에도 CP를 맡을지 안 맡을지 모르겠다. 해 보고 나니 두 번 다시 안 하고 싶은데. (웃음) 연출을 한 후배들과 소통하면서 도움이 되었는지도 걱정이 되고. 다만 다음에 어떤 분이 맡으시더라도 전임 CP로서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년에 특히 데뷔 연출자가 많다. 다섯 명 정도? 내년 시즌의 편성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친구들은 데뷔를 해야 하고 그 준비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Q. 내년 드라마 스페셜이 예산 삭감을 요구받았다고 들었다.

황의경: 상황이 안 좋다. 예산안이 원안대로 통과되면 제작 편수를 많이 줄여야 할 수 있다. 이번 시즌3에서 24편을 방송했는데 내년에는 절반 정도 밖에 못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어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드라마국에서 전방위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사회성 있는 드라마를 단막극에서 다뤄봤으면 하는 욕심”

와 <아트>를 연출한 박현석 PD(왼쪽)와 <드라마 스페셜>을 총괄한 황의경 CP." src="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AS106D2KqVLxKhgt2h.jpg" width="555" height="368" border="0" />



Q. 올해도 세 명의 PD가 드라마 스페셜을 통해 ‘입봉’을 했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황의경: <걱정마세요, 귀신입니다> 이은진 PD, <내가 제일 예뻤을 때>의 백상훈 PD, <칠성호> 김진우 PD, 이렇게 세 명이다. 회사 내부에서 일부는 드라마스페셜이 신인 연출자나 젊은 연출자 육성이 아니라 나이 드신 연출자들 인력 운영하는데 이용되고 있지 않느냐는 의심도 한다. 그렇지 않다. 이번 시즌에도 연출 데뷔 1년차에서 5년차 연출자 아홉 명이 참여를 했다. 참여한 연출자 수도 제일 많았다. 열다섯 명 정도? (옆의 박현석 PD에게) 현석이, 니가 지금 2년 차니, 3년 차니?

박현석: 3년 차요. 얼마 안 돼요. (웃음)



Q. 박현석 PD가 연출한 <습지생태보고서>가 이번 시즌 첫 작품이었는데, 처음부터 좋은 작품이 나와서 이후에도 기대가 컸다.

황의경: 첫 주자가 제일 부담스럽지. 더군다나 파업을 하고 있는 중이어서 서로가 민구스러웠다. 대부분 젊은 연출자들이다 보니 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에서 드라마를 준비하는 것에 대해 이견이 있었다. 단막극이 정말 포기할 수 없는, 우리가 너무 너무 힘들게 부활시킨 드라마긴 하지만 미니시리즈는 미니시리즈니까 굴러가야 하고 저녁 일일 드라마는 일일이니까 멈출 수 없고 단막은 단막대로 해야 하면 결국 다 하자는 거 아니냐고. 다행히 후배들이 뜻을 모아 줘서 파업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준비를 시작했다. 특히 <습지생태보고서>는 CP의 욕심이었다. 첫 작품이니까 어떻게 문을 여느냐의 의미도 있어서. 시청률이 어떻게 나오든 어떤 피드백이 오든 단막극이 가야 할 방향인 다양성이나 신선함, 주류 드라마와의 차별성이라는 기준에서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박현석 PD가 잘 만들어서 한국 PD 연합회 이 달의 PD상을 수상했다. 노상훈 PD도 <친구 중에 범인이 있다>로 이 상을 받았고 이번 시즌의 경우 특히 수상 성적이 좋다. <스틸 사진>이 방송통신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을 수상했고, <불이문>은 사내 우수 프로그램 상을 받았다.



Q. 이번 시즌의 가장 큰 특징이 장르성의 강화였다. 스릴러나 미스터리 장르가 가장 많았고, <환향-쥐불놀이>는 사극이었다.

황의경:후배 연출자들한테 개인적인 취향을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에 좀 조심스러웠지만, 장르성에 대한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고 그런 말은 꺼낸 적은 있다. 특히 사회성 있는 드라마를 단막극에서 다뤄봤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박현석 PD에게도 노골적으로 사회적인 소재를 건드리지 않더라도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정서에 이 시대 청춘들의 아픔을 녹여보자고 했으니까. 물론 제일 중요한 건 누가 뭐라고 해도 단막극만큼은 연출자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그게 설령 신파든 복고 서사든, 신선하냐 신선하지 않냐 단막극 취지에 맞냐 안 맞냐 이 모든 것을 떠나서 연출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다만 너무 편향된 장르나 정서로만 일관되면 교통정리를 해야 하는 거지.



Q. <칠성호>가 그런 의미에서 인상적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드라마판 <황해> 같은 느낌이랄까.

황의경: <칠성호>는 어떻게 보면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포괄적이고 복잡한 이야기다.

박현석: 미술을 비롯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작품이다. 그런데 그게 다 돈이거든. (웃음) 그 예산을 CP가 안배해준 거다. 앞 뒤 작품 연출하는 선배들한테 양해를 구해서 딱 몰아주면서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보여 봐라, 나머지는 내가 해결해준다 이런 거지.

황의경: 그런 일은 어떤 CP라도 다 하는 일이다.

박현석: 사실 <칠성호> 같은 기획은 위험하다. 그런데 이번 시즌이 예전에 비해 연출자의 자유도가 컸다. 황의경 CP가 대본에 대한 이야기는 좀 세게 하시는데 결국 만들어지는 걸 보면 연출자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있다.



Q. 확실히 색깔이 분명한 작품들이 많았다.

황의경: 드라마 스페셜이 부활된 이후 첫 시즌에는 직접 연출도 했었는데 그 당시에도 소재에 대해서 CP가 제한을 하거나 특정 방향으로 유도한 적은 없었다. 나부터 자유롭게 했으니까 후배들도 자유롭게 해줘야지.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다. 다양한 색깔의 작품들이 기대했던 양보다는 좀 적다.



Q.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가 박현석 PD가 연출한 페이크 다큐 형식의 <아트>였다. 새로운 도전이었는데 어땠나.

박현석: 사실 최저 시청률을 기록하고 위축되어 있는 상황인데, 고맙다. (웃음) <아트> 같은 게 이번 시즌이라서 가능했던 것 같다. 단막극이라고 해도 어쨌든 TV 드라마니까 쉽지 않거든. 만들면서 미친 짓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황의경: 드라마 스페셜 시작하면서 기자간담회 때 기대하시라고, 뭔가 하나 실험적인 작품이 있다고 했던 게 바로 <아트>였다. 처음엔 박현석 PD한테 당선작을 연출해달라고 부탁 했었는데 본인 아이템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 그래서 뭐 할 건데? 했더니 머리를 긁적긁적 하면서 이런 게 있다고. 처음에 아이디어를 냈을 때는 거의 리얼 다큐에 가까운 형식이라서 파격적인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박현석 PD가 마음을 좀 졸였는지 그래도 최소한의 내러티브는 가져가면서 조금 희석되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왕 갈 거면 아주 제대로 더 갔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잘 선택한 것 같다. 만약 정말로 확 나가서 시청률이 그렇게 나왔으면 더 묻혔을 거다.

박현석: 반응이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많이 혼났는데 그래도 CP님이 막아주셔서 생글거리면서 살고 있다. (웃음)

황의경: 드라마 스페셜의 등신불이 되었지. 자기 한 몸 태워서 최저 시청률이 나왔으니까. (웃음)



Q. 형식적으로 독특했다는 것으로 주목 받았지만 사실 이야기 자체도 흥미로웠다.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이라 울림이 컸다.

박현석: 사실 형식 속에 그런 내용을 중첩시켜 나갔는데 워낙 모큐멘터리라는 형식이 세다 보니까 다 묻혀버렸다. 주제랄까 말하고자 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반응이 별로 없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트>에 나왔던 고민들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것들과 동일하다.

“단막극이라도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건 한계가 있다”

2012 드라마 스페셜│“새로운 드라마의 맹아가 여기서 시작된다”


Q. 어떤 고민들인가.

박현석: 드라마가 담을 수 있는 폭이 굉장히 많은데 점점 좁아지는 것 같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후배들도 많고 선배들도 미니시리즈 같은 주류 드라마에서 시도는 하고 있지만. 그래도 드라마 스페셜에서는 많은 것들을 소화해서 내보내주고 있다. 사회 참여 같은 게 드라마에 잘 없는 부분 중 하난데 SBS <추적자>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나. 그 작은 맹아들이 드라마스페셜에서 시작된 거다. 좀 있으면 <칠성호> 같은 스타일의 미니시리즈도 나올 거다. <아트>는 좀 치기 어리기도 했고 드라마라서 선택을 잘못 했던 부분도 여전히 있지만 이런 실험을 드라마 스페셜이 아니면 어디서 해보겠나. 선배들 애정 덕분에 그 보호 아래에서 할 수 있었던 부분이 있다. 사실 시즌 1, 2 때도 연출을 했는데 아무래도 톤을 맞춰야 하는 게 있었다. 단막극이 겨우 살아났으니까 조심스러웠지.

황의경: 아무리 주류 드라마랑 차별되어야 한다고 해도 독립영화가 아니라 지상파 드라마니까. 특히 데스크 입장에서는 그 간극이 제일 괴롭다. 뭔가를 좀 해보려고 하면 내부에서조차 뭐 하는 거냐, 장난 하니 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으니까. <칠성호>도 내부 심의에서는 방송 불가가 떨어졌었다. 심의를 세 번 했다.



Q. 무엇이 문제였길래?

박현석: 비속어 같은 거 잘라내고 다시 심의 받고.

황의경: 그러다 보니 김진우 PD 본인이 위축되어서 좀 더 밝고 명랑한 드라마를 하려고 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물론 밝은 걸 해도 좋은데 그 쪽으로만 초점을 맞추면 선택의 폭이 좁아지니까 니가 하고 싶은 거, 마음 가는 거 하라고 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연출한 <상권이>도 좀 마이너하다.

박현석: CP가 조장하는 것 같아. (웃음) 그런데 김진우 PD는 색깔이 분명한 연출이라서 나는 되게 좋더라. 후배지만 배울 점도 있었고. 입봉작이 그 PD의 크기를 보여준다는 얘기를 종종 하는데 라이벌 수준이 아니라 넘어섰다. (웃음)



Q. 모든 드라마가 그렇지만 단막극은 특히 대본의 완성도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황의경: 단막극의 본질은 좋은 대본을 많이 축적해두는 것, 좋은 신인 작가를 많이 확보해두는 것이다. CP로서 시청률이나 대중성에 대해서는 크게 압박하지 않은 것 같은데 대본에 대한 잔소리는 좀 많이 했다. 문제는 대본 자체가 독창적이면서 대중성도 담보하고 있는 건 단막극뿐만 아니라 모든 드라마의 로망이다. 그런데 그걸 왜 물리적 여건이 가장 안 좋은 단막극한테만 강요하는지 아쉬운 거지. 결국에는 돈이다. 물리적으로 제작비를 키우지 않는 이상 아이디어로 승부를 해 보라는 건 한계가 있다. 1년에 24편의 단막극이 제작되는데 어떻게 매 번 아이디어도 좋고 돈도 안 들고 박수를 쳐 줄만한 작품을 만들 수 있나. 미니시리즈도, 수 십 억을 들이는 영화도 못 하는데. 우리 상상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더 공을 들여야 하고 충분한 시간과 돈이 필요한 거지.



Q. 작년 KBS 극본 공모 당선작 네 편도 방송되었다. PD들은 물론 신인 작가들에게도 드라마스페셜은 귀한 기회인데 공모는 어떤 과정을 통해 진행되나.

황의경: 대략 해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삼천 편정도 들어온다. 고참급 조연출 이상 PD 40여 명이 1차 심사에 투입 되어서 각자 적게는 50편, 많게는 100편 정도씩 보고 200편 정도가 2차 심사에 올라간다. 2차는 하나의 대본을 두 명의 PD가 보는 크로스 체크다. 그 중에서 24, 5편 정도가 최종 심사에 올라간다. 최종은 외부 작가 두 명을 포함한 간부들이 본다.



Q.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황의경: 최종 심사까지 와도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 다르다. 1, 2차를 뚫고 오면 벌써 세 명의 연출자가 보고 올라온 건데도 평가표를 보면 나는 10점을 줬는데 다른 분은 5점을 주니까. 5점은 떨어뜨리겠다는 거거든. 일단 내부적으로는 현재적 완성도와 성장 가능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다만 사람마다 둘의 비율이 좀 다르겠지. 그리고 평가자들 세대에 따라서 관심사가 좀 다른 것 같다. 아무래도 시니어 쪽으로 올라갈수록 키워서 바로 써 먹을 수 있는 현재 시점에서의 제작 가능성을 본다면 주니어 쪽은 좀 거칠더라도 새롭거나 기존의 질감과는 뭔가 차별화되는 이 작가만의 색깔이 있는 걸 선호한다. 물론 같은 세대에서도 연출자 마다 선호하는 장르가 다르기도 하고.



Q. <환향-쥐불놀이>도 공모 당선작 중 하나였다. 사극이라는 형식은 물론 미스터리, 스릴러의 요소와 시대 배경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황의경: 전통적으로는 가급적이면 당선 대본은 크게 안 고치는 전통이 있는데 <환향-쥐불놀이>는 수정을 많이 했다. 초고는 스릴러의 요소가 더 강했다.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 전체가 범인이었다는 게 핵심이었는데 그보다는 시대적인 배경과 인간들의 관계에 좀 더 치중했다.

“KBS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걸 진지하게 고민해야”

2012 드라마 스페셜│“새로운 드라마의 맹아가 여기서 시작된다”


Q. 이번 시즌 작품들 중에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것은 무엇인가.

황의경: <습지생태보고서>는 아무래도 첫 번째 작품이기도 했고 애정이 많이 갔다. <칠성호>는 방송 보면서 눈물이 났다. 그 과정이 하도 지난해서 드디어 방송이 나가는구나 싶어서. 연출선이 남성적이고 하드보일드 한 걸 좋아해서 김진우 PD가 초고를 가지고 왔을 때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초고는 욕심이 너무 많아서 굉장히 어지러웠다. 인간성의 본질을 보여주려고 하는 건지 조선족 한 남자의 불행한 인생을 조명하려고 하는 건지 이 모든 것들이 한 그릇에 조화롭게 담기지 않았다. 인물한테 연민의 정이 안 생기더라고. 김진우 PD한테 시청자와 게임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말 니가 주장하는 감정이 이거라면 신파가 되었든 구성이 고루하든 이 감정에 ‘올인’해야 하지 않니, 왜 감정을 잘게 쪼개서 퍼즐처럼 만들어서 시청자들이 찾게 만드냐고.



Q. 그럼 가장 아쉬운 점은?

황의경: 아무래도 제작 여건이지.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고 있으니까 항상 물가에 내놓은 애기 같은 거지.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부에 철학이 좀 생겼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미니시리즈로 수익을 많이 올렸으면 그걸로 드라마 스페셜 같은 시청자들에게 서비스할 수 있는 드라마도 만들 필요가 있지 않나. 이번 시즌 편당 제작비가 8000만원이었는데 실질적으로는 그것보다 적었다. 엑스트라 단가 상승 같이 작년 대비 자연 상승분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예산 항목을 들여다보면 모든 게 최저 수준 기준이다. 스무 편 방송 된 것 중에 예산 안에서 제작이 끝난 게 <불이문> 딱 한 편이다. 출연자도 적고 엑스트라도 없고 절에 틀어박혀서 주구장창 한 장소에서 찍어야만 예산 안에 100% 들어오는 거다. 굉장히 비현실적인 거지. 기를 쓰고 버둥거리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데 정작 사내에서 드라마 스페셜이 프로그램 평가는 최하위다. 광고수입 대비 원가 개념을 적용시키니까.



Q. 그렇게 일반적인 평가 기준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황의경: 평가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거지. 하지만 기본 원칙이 그러니까. 계속 싸워나가야지. KBS가 30년이나 되었으면 드라마도 우리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걸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사회적인 의제를 과감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드라마가 엔터테인먼트로만 기능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인 소재를 전달하는데 필요한 채널이라는 걸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나. KBS의 드라마 PD들이 종종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 뭐냐면 우리가 타 방송사와 뭐가 다르냐는 거지. 어떻게 보면 SBS <추적자> 같은 작품이 우리에게서 나왔어야 하는 건데, 보면서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당시 <빅> CP도 맡고 있었는데 우리랑 안 붙었으면 타사지만 굉장히 응원하고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스타 배우에 의존하지 않고 대본과 연기의 힘만으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함께 성취할 수 있다는 사례니까.



Q. KBS 내부에서의 제약도 크지만 드라마를 둘러 싼 시청 환경의 변화도 영향을 줄 것 같다. 해외 드라마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황의경: 베스트셀러 극장이나 드라마 게임이 막 시작했을 당시에는 한 회로 끝난다는 형식 자체가 새로웠고 주류 드라마 역시 크게 성숙, 진화되지 않았을 무렵이라 내용에서 주류 드라마를 앞서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고 좋은 평가를 받지 않았나 싶다. 지금처럼 이렇게 발달된 인터넷 환경에서 온 세계 영상물을 다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시청자의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는데 단막극 제작환경은 십 년 전이나 변화가 없으니까. 다만 지난 번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MBC 이은규 선배가 하신 말씀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다. 아무리 단막극이 어렵고 힘들어도 이제 우는 소리만 할 수는 없지 않냐고 하시더라. 시장에서 어느 정도 통용될 수 있고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 거다. 늘 미운오리새끼로 머물고 수세적으로 도와달라고만 할 게 아니라 공격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는 거지.



Q. 어떤 방법이 있을까.

황의경: 개인적으로는 TV 영화가 또 하나의 진화된 단막극 형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는 있다. 제작비를 조금 더 투자한 프리미엄급 단막극도 생각하고. 조금 더 공격적이고 형식상으로 대중친화적인 포맷을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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