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이토록 아름다운 실패
* 영화 <레미제라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로 <레미제라블>의 원작은 1862년에 발표됐습니다.

동명의 뮤지컬을 원작으로한 영화 <레미제라블>의 장 발장은 시대와 싸우는 초인이다.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는 세습이 아닌 선출된 왕이 통치하지만 “그 놈이 그 놈”이고, 시민들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젊은이들이 일으킨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시민들은 청년들이 죽은 뒤에야 그들을 기리며 다음을 기약한다. 그러나 장 발장은 한 개인으로서는 방향을 돌려놓을 수 없는 그 시대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을 구하려 한다.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된 후에도 판틴(앤 해서웨이)의 딸 코제트(아만다 사이프리드)를 딸처럼 키우고, 그녀가 사랑하는 마리우스(에디 레드메인)를 살리기 위해 혁명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정부가 젊은이는 물론 아이에게까지 총구를 겨누는 시대에, 장 발장은 유일하게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인가 하는 어른이다.

<레미제라블>, 개인으로 시대를 말하다

은 뮤지컬의 노래들로 원작처럼 수많은 인간군상들을 다룬다." src="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AS10fwDUYjv7ijGd9LJogn1UHhcZecn75B.jpg" width="555" height="185" border="0" />

거시적인 시대의 흐름에 미시적으로 저항하는 개인. <레미제라블>은 방대한 원작소설에서 디테일은 쳐내면서 혁명이 생성에서 소멸로 이르는 거대한 흐름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장 발장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놓치지 않는다. 대부분 클로즈업과 바스트샷으로 촬영한 배우들의 노래는 뮤지컬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웠던 인물들의 표정과 내면을 보여준다. 반면 합창을 하거나 신이 바뀌는 순간, 카메라는 뒤로 빠져 당시 프랑스의 풍경을 스펙터클하게 보여준다. 카메라가 바짝 다가서서 관찰한 사람들은 판틴처럼 ‘I dreamed a dream’을 부르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장 발장처럼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속죄와 희생을 노래한다. 그 개인들이 모두 모여 한 목소리를 낼 때 시대를 바꿀 거대한 합창이, 거대한 도시보다 더 거대하게 모인 군중들의 그림이 완성된다. 시대적 흐름에 맞선 개인의 숭고함, 기어이 시대를 이겨내려 하는 군중들이 전하는 카타르시스. <레미제라블>은 뮤지컬의 노래들로 원작처럼 수많은 인간군상들을 다룬다. 그러나, 그 노래들을 영화적으로 보여주면서 원작처럼 시대를 말한다.



<레미제라블>은 뮤지컬과 소설 양쪽을 모두 품되, 영화의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이 과감한 선택은 <레미제라블>을 봐야할 이유인 동시에 명확한 한계이기도 하다. 배우와 배경을 분리한 것 같은 촬영과 편집은 가끔씩 영화의 흐름을 거칠게 만든다. 거대한 세트 안에서 노래와 노래가 이어지는 뮤지컬이 보여주는 일관된 힘이 좋았던 사람이라면 <레미제라블>이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못할 것이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뮤지컬의 형식과 소설의 정신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원작 소설의 방대한 분량과 송스루(거의 대사 없이 노래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뮤지컬의 한 형식)로 진행되는 영화의 특성상, 원작의 이야기는 최대한 축소된다. 장 발장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베르(러셀 크로우)를 구하는 과정이나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최대한 짧게 정리된다. 소설의 이야기가 가진 이성적인 고찰은 줄어들고, 뮤지컬의 노래가 주는 감성적인 힘이 그 자리를 채운다.

바리게이트 너머의 세상과 화합할 때 혁명은 완성된다

영화는 소설 속 계급과 혁명에 대한 태도는 유보하지만, 그 결과가 화합이라는 사실을 영화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소설 속 계급과 혁명에 대한 태도는 유보하지만, 그 결과가 화합이라는 사실을 영화적으로 보여준다.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은 시대적으로 볼 때 빈민 계층의 딸과 부르주아의 아들의 결합이다. <레미제라블>은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행복한 결합을 통해 사랑이 시민과 부르주아, 또는 특권층 사이를 넘을 수 있는 힘이라 노래한다. 그러나,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하나가 될지언정 혁명군의 세계와 부르주아의 세계 사이에는 여전히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다. 마리우스가 반한 여성은 판틴의 딸 코제트가 아니라 자수성가한 장 발장이 귀하게 키운 코제트였고, 혁명군에 가담했던 마리우스는 코제트와의 결혼과 함께 부유한 집으로 돌아간다.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던 에포닌(사만다 뱅크스)은 결코 마리우스의 세계로 가지 못한다. <레미제라블>은 장 발장의 늙고 지친 얼굴을 잡아내는 클로즈업과 감동적인 노래들을 통해 두 연인의 사랑을 혁명의 동력으로 확대한다. 그러나, 장 발장 개인의 이야기와 프랑스 혁명의 본질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레미제라블>은 이에 대한 명확한 태도를 유보하고 영화적인 연출과 뮤지컬의 노래로 두 세계를 매끈하게 봉합한다. 그 점이 <레미제라블>을 안타깝게도 최고의 뮤지컬 영화에 도달하는 바로 그 앞에서 멈추게 한다.



그러나,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장 발장과 함께 마리우스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카메라는 마리우스 뒤편의 계단에서 내려오는 그의 할아버지를 비춘다. 인물이 노래할 때면 배경을 아예 없애거나 흐릿하게 하는 이 영화에서 노래하는 사람의 뒤에 있는 인물이 뚜렷하게 잡히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이 신을 통해 가난한 판틴의 딸이자 자수성가한 장 발장의 정신적인 딸 코제트, 부르주아의 아들 마리우스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주는 정서적 울림은 보다 확실해진다. <레미제라블>의 연출자 톰 후퍼는 계급과 혁명에 대한 태도는 유보하되, 혁명의 결과가 화합이라는 사실을 영화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이 소설이자 뮤지컬이며 영화가 끌어낼 수 있는 최선이자,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이 ‘사랑의 전사’가 되는 이유다. 장 발장 같은 초인이 되지 않는 한 시민들과 부르주아적 사이의 바리케이드는 넘기 불가능하다. 바리케이드를 없애기 위한 혁명은 끊임없이 실패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행복해지려면 언젠가 바리케이드 너머의 세상에 있는 절반의 사람들과 화합해야 한다. 그것은 정말로 이상이지만, 20년이 아닌 200년이 지난 프랑스 혁명은 역사가 결국 그 이상에 한 없이 가까이 다가서는 과정이었음을 증명했다.



혁명을 경험했고, 성공했다 믿는 사람들에게 <레미제라블>은 혁명의 조건에 대한 오래된 교과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혁명이 시작되지도 않았고, 세상은 바리케이드를 경계로 나뉘어졌다 믿는다. 그들에게 <레미제라블>은 바로 지금의 행동을 요구한다. 바리케이드는 견고하다. 젊은이들은 절망한다. 바리케이드 저 너머 세계의 사람들과 화합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당신은 마지막까지 젊은이들을 구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바리케이드를 가장 먼저 넘어서는 사랑의 전사가 되겠는가. 장 발장처럼.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