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다를 등진 한 남자가 나지막이 노래를 시작한다. Is there anybody gone to listen to my story. All about the girl who came to stay? 비틀즈의 명곡들을 뮤지컬로 엮은 영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Girl’을 부르며 짐 스터게스가 스크린에 등장했던 그 순간, 우리는 또 한명의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짐 스터게스의 팬들에게 영화 <업사이드 다운>, <원 데이>,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차례로 소개된 요 몇 달은 축제 같은 시간이 아닐까. 오직 한 여자를 위해 중력마저 거스르는 청년,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소울 메이트, 그리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반란군까지 SF와 액션, 로맨스를 넘나들며 여러 얼굴을 보여준 그가 한국을 찾았다. 통역이 말을 전해주기 전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어를 고개를 내밀고 경청하고, 귀엽다는 말에 3분의 2 지점에서 슬쩍 구부러지는 눈썹을 으쓱하며 웃던 짐 스터게스와 만났다. 짧은 대화 후 남은 것은 개구쟁이 같은 첫인상과 달리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답을 찾으려 애쓰느라 미간에 주름이 지던 성실한 표정이었다.

Q. 기자회견을 마치고 한국에서 어떤 일정을 보냈나. 소주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는데 마셨나? (웃음)

짐 스터게스: 잤다. 그게 다다. (웃음) 사실 무대 인사를 하러 멀티플렉스 극장을 방문했다. 영국에서는 하지 않는 홍보 방법이라 신기한 경험이었다. 관객들을 직접 만나 인사를 하고 영화를 소개하는 게즐거웠다. 그리고 갈비먹고 소주 마시고 쓰러져 잤다.



Q. 기자회견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턱을 괴고 경청하던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짐 스터게스: 통역을 듣고 있었다. 통역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어떻게 저걸 다 기억하고 이야기하지? 내겐 없는 스킬이라 재밌다.

“친구가 된 배두나의 고향을 방문해서 즐겁다”

짐 스터게스│짐 스터게스 “쌍꺼풀 하나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신기했다”

Q. 해외 프로모션을 통해 다양한 나라를 방문했지만 한국인 역할을 한 <클라우드 아틀라스>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더욱 특별했을 것 같다.

짐 스터게스: 초청을 받고 되게 흥분했다. 처음엔 감독님들과 배두나만 홍보하는 줄 알았는데 나도 올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 영화에서 한국인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한국에 온다는 것 자체가 되게 좋았다. 그리고 영화를 찍으면서 배두나와 좋은 친구가 되었다. 친구의 고향에 방문하는 것이라 즐겁다.



Q.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느라 배우들이 여러 분장을 했는데 특히 당신의 장혜주 분장은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당신인지 알아차리지 못 했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쌍꺼풀을 없앴는데 동양인이라는 걸 확실하게 나타내려는 의도로 봐도 될까?

짐 스터게스: 물론이다. 분장은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다만 장혜주는 아주 미래의 한국인이기 때문에 여러 인종이 섞였을것이라는 가정 하에 만들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다른 것들도 테스트 해봤다. 가짜 코, 가짜 볼, 가짜 눈 등 굉장히 많이 바꿔봤다. 결국에는 쌍꺼풀을 없애는 결론에 이르렀고 머리색도 좀 더 까만 가발을 썼다.



Q. 분장을 마친 후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짐 스터게스: 갑자기 바뀐 걸 본 게 아니라 분장을 하는 과정 내내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확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 하나를 바꾸는 것을 통해 되게 많이 바뀌는 것은 신기했다. 작은 디테일 하나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싶어서 흥미로웠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위해 준비도 많이 하고 연습도 했지만 분장을 하고 의상까지 갖추고 거울을 딱 봤을 때 내가 정말 이 역할을 할 준비가 되었구나 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연극도 아닌 영화에서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배우로서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나 뿐 아니라 노인이 된 제임스 다시나 멕시코인으로 변신한 배두나 등 다른 배우들도 모두 분장을 해서 서로 바뀐 모습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교환하면서 농담을 주고받고 웃었다. 그 덕에 더 친해질 수 있었고 촬영장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



Q. 장혜주는 다른 인종일 뿐 아니라 손미-451(배두나)을 각성시키는 중요한 임무를 띤 인물이다. 내면적으로도 많은 준비를 했을 것 같다.

짐 스터게스: 분장은 중요하지만 외형적인 변화고 내면적으로 최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다른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이 사람이 누구고,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어째서 이런 감정을 갖느냐를 열심히 고민했다. 인터넷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노예 제도에 대해서 찾아봤다. 이것이 비단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정당하지 못한 행동들이기 때문에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항거할까 혹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많이 해봤다. 그리고 장혜주라는 인물은 특정한 임무를 위해 손미-451을 만났는데, 결국 어떻게 보면 대의를 위해 희생당해야 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내가 내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하는 더 크고 강한 어떤 것이 생길 때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느끼려고 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어떤 행동과 선택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계기”

짐 스터게스│짐 스터게스 “쌍꺼풀 하나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신기했다”


Q. 짧게 등장한 스코틀랜드인 훌리건 청년 역할도 굉장히 귀여웠다.

짐 스터게스: 귀여웠다고? 아하하하. 사실 장혜주나 애덤 어윙 같은 인물들은 내가 스토리를 이끌어 가야 해서 부담이 많이 되었는데 훌리건의 경우 다른 사람의 스토리에 들어가서찍으면 되는 거라서 재밌게 찍었다. 하루만 가서 싸우고 집에 가면 되니까. (웃음)

Q. 전생이나 반복되는 운명, 환생 같은 것에 대해 원래 관심이 있었나?

짐 스터게스: 예전에 데자뷔 같은 경험은 한 적이 있다. 아, 이거 예전에 경험한적 있는 거 같은데, 여기 와 본 적 있는데 같은 느낌이 강렬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는데 영화를 찍으면서는 좀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 촬영하면서 소년 배우를 한 명 만났는데, 저렇게 조그만 소년이 어쩌면 저렇게 성숙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놀랐다. 이 아이는 전생에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렇게 성숙하고 현명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걸까 생각하게 되었다.



Q.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등장인물도 많고 장르도 굉장히 다양하고 시공간을 복잡하게 오간다. 새로운 도전을 한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표현하는 작품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짐 스터게스: 글쎄, 이 작품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뭔가를 지시해서 이거다 라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는 영화다. 아주 많은 깊고 독특한 아이디어들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물론 6개의 스토리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사랑 이야기지만 그 외에도 종교나 과학 이야기도 있고 회사가 어떻게 잘못 운영되는지도 나온다. 그 중에서도 내가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배두나가 연기한 손미-451의 존재였다.



Q. 이유가 무엇인가?

짐 스터게스: 손미-451은 과학을 통해서 태어난 존재인데 미래 세계에서 일종의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이 된다.과학과 종교가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인상 깊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현세에 살면서 내가 하는 어떤 행동들이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래서 제대로 행동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애덤 어윙의 작은 친절 하나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지금 이 시간을 살면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그것의 의미를 한 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랄까 기 같은 게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순환되고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Q. 며칠 전에 개봉한 영화 <원 데이>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의 모습과굉장히 다르다. 덱스터는 특히 당신의 외모에서 비롯되는 첫인상과 닮아서 더욱 흥미로웠다. 개구쟁이 같다고 할까. 나쁜 짓을 해도 도통 미워할 수 없는 느낌이 잘 어울렸다.

짐 스터게스: 덱스터는 하는 행동들은 분명히 나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이 역할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는 굉장히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데는 항상 이유가 있는 건데, 잘난 체 하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약함이 있어서 그걸 숨기기 위해서 오히려 강한 척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텍스터를 연기하면서 강한 척 하지만 유약한 내면을 동시에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원 데이>의 러브 스토리 자체도 흥미롭지 않나? 관객들이 볼 때 저 둘은 분명 서로 사랑하는데 왜 저러고 있지 라고 생각할 정도로. 둘이 그냥 사랑했다, 잘 산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굉장히 복잡한 것을 겪는 여정이기 때문에 재미있었다.

“뮤지션으로 성공하기 위해 맨체스터로 이사 했었다”

짐 스터게스│짐 스터게스 “쌍꺼풀 하나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신기했다”


Q. <원 데이>에서 각시절을 설명해주는 음악이 흐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당신은 연기 뿐 아니라 음악 활동도 하고 있는데, 영화 속에 흘렀던 곡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음악은?

짐 스터게스: 해피 먼데이즈(Happy Mondays)의 ‘step on’을 가장 좋아한다. <원 데이>를 찍으면서 앤 해서웨이와 각자 편집 음반을 만들어서 메이크업 받을 때마다 들었다. 오늘은 몇 년도의 촬영을 한다고 하면 그 때의 음악들을 틀어놓고 감정을 만들어 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 오아시스나 블러 같은 밴드들이 되게 인기가 많았고,특히 나는 맨체스터 출신 밴드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굉장히 좋았다.



Q. 실제로 맨체스터 신의 음악을 좋아해 대학에 입학하면서 맨체스터로 이사를 갔다고.

짐 스터게스: 밴드 생활을 하던 중에 다른 멤버들이 다들 대학에 가는 바람에 혼자 남게 되었다. 나는 우리가 대단한 밴드가 될 줄 알았는데 다들 아니라고, 학교에 가야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어쩌지 하다가 맨체스터 신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뮤지션으로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맨체스터에 있는 대학에 등록했다. 하지만 정작 거기서는 음악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영화나 연극을 하는 사람들과 친해졌다. 그러다가 연극 대본을 하나 써서 연기를 했는데 그걸 본 어떤 사람이 런던에 있는 에이전트를 소개해 줘서 배우가 되기 위해 다시 런던으로 갔다. 그런데 또 런던에서는 밴드 활동도 했다. (웃음) 음악을 하려고 갔다가 배우가 되고 배우가 되려고 간 런던에서 또 음악을 하고 했던 경험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Q.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뛰어난 노래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는데, 당신에게 음악 활동을 하는 것은 연기를 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경험인가?

짐 스터게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도 감독이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는 젊은 영국 남자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을 할 수 있었다. 연기와 음악의 출발점은 비슷한 것 같다. 둘 다 퍼포먼스가 있다는 점에서. 다만 음악은 좀 더 개인적인 영역이랄까.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경우도 데이빗 미첼이라는 작가가 쓴 책을 세 감독이 각색한 것을 내가 연기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지만, 음악은 내가 느끼는 것, 내 안에서 만들어진 무엇인가를 나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혼자 연주하거나 노래를 해도 만족하고 좋을 수 있지만 연기는 침실에서 혼자 한다고 해서 자기만족이 되지는 않으니까.



Q. 그럼 두 가지를 융합한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나. 만약 기회가 온다면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은가.

짐 스터게스: 글쎄, 나는 음악과 연기를 분리해두고 싶다. 예전에도 영화 <하트리스>나 <크로싱 오버> 같이 출연한 작품을 위해 작곡을 한 적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분리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뮤지션이나 밴드 멤버로서 영화에 나와 달라는 요청은 항상 거절한다. 어쨌든 내게는 창의적인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둘 다 중요하다. 연기를 하지 않을 때 나의 창의력을 분출하는 출구로서 음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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