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신사의 품격>은 외모, 능력 뭐 하나 빠지지 않는 네 명의 신사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드라마였다. 각기 다른 매력의 남자들이 연애하고, 우정을 확인하고, 끝내는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여정에 여성 시청자들은 푹 빠졌지만 가장 뜨거운 지지를 받은 이는 따로 있었다. 신사들을 하루아침에 자신의 스트리트에서 내쫓을 수 있고, 돈이 가진 힘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청담마녀’ 박민숙. 공공의 적이 되기 쉬운 이 마녀는 오히려 여성들에게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나도 저런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철없는 남편 때문에 속 썩고, 생기지 않는 아이 때문에 마음 아파한 ‘민숙 언니’가 터득한 삶의 쓴 맛은 그대로 인생의 교훈이 되었다. “박민숙은 굉장히 든든한 캐릭터예요. 사람들이 박민숙의 명대사들에서 뭔가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왜 공부해야 하지, 세상은 불공평한데’ 그럴 때 동협(김우빈)이에게 했던 ‘방금 니가 본 게 앞으로 니가 나올 세상이구, 돈 없는 사람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야’ 이 한마디로 모든 것들이 설명되잖아요. 시원시원하고, 불의를 보면 못 참고. 돈도 어떻게 써야할지 정확히 아는 여자. 쓸데없는 말 안 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똑같이 가슴 아파하는 여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아직도 박민숙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고민 상담을 받을 정도로 김정난의 존재감은 특별했고, 박민숙은 지금 김정난을 수식하는 가장 뜨거운 이름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재발견’이라는 꼬리표는 실례다. 1998년 이후 매년 쉬지 않고 서너 편의 드라마나 영화를 작업해온 김정난을 거쳐 간 인물은 어림잡아도 50여명. ‘청담마녀’ 이전에 더 마녀 같고 더 섬뜩해서 오영숙 작가로부터 “대본을 뛰어 넘는 연기”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던 양 부인(<구미호 : 여우누이뎐>)이 있었고, 박민숙보다 더 쿨한 ‘여자 어른’이었던 <산부인과>의 민선이 있었다. 거기에 각시탈 만큼이나 정체에 대한 미스터리를 불러일으킨 <각시탈>의 화경까지. 최근으로만 한정해도 이렇게 풍부한 필모그래피를 가진 그녀에게 <신사의 품격>은 어쩌면 시작일 뿐일지 모른다. 판타지 영화를 좋아하고, 헬레나 본햄 카터처럼 독특한 캐릭터에 욕심이 나는 김정난의 취향 또한 몰랐던 것이지만 앞으로 그녀의 행보를 예상하는데 적절한 힌트가 될 것이다.




1.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Sweeney Todd: The Demon Barber Of Fleet Street)
2008년 | 팀 버튼

“제가 워낙 판타지 영화나 동화 같은 이야기를 좋아해요.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가 헬레나 본햄 카터예요. 가장 좋아하는 남자 배우는 조니 뎁이구요. 그러니까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겠죠? (웃음) 헬레나 본햄 카터는 팀 버튼 감독의 부인이다 보니까 팀 버튼 감독의 영화에 많이 출연했죠.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에서도 조니 뎁 못지않은 존재감을 보여주죠.”

동명의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조니 뎁은 실제 인물인지 가공의 인물인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강렬한 동시에 측은한 과거를 지닌 살인마 스위니 토드를 개성 넘치게 소화 했다. 이미 <가위손>의 에드워드로 슬픔이 가득 찬 눈을 선보인 바 있는 조니 뎁은 거기에 광기와 분노를 얹어 슬픈 살인마의 비극을 전달했다.



2.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 In Wonderland)
2010년 | 팀 버튼

“헬레나 본햄 카터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예요. 이 배우는 워낙 독특한 이미지라 그런 영화에만 어울릴 것 같지만 정극도 훌륭하게 소화해내요. 외모도 독특하지만, 연기 또한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배우예요. 노래도 굉장히 잘 하고요. 같은 배우인 제가 봤을 때도 헬레나 본햄 카터는 배우 생활하는 게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쉽지 않겠지만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팀 버튼을 만나 소녀의 성장담으로 재탄생했다. 물론 우스꽝스럽고 음울한 팀 버튼 특유의 색깔은 모자장수, 붉은 여왕, 하얀 여왕 등의 캐릭터를 좀 더 다채롭게 채색했다. 팀 버튼의 짝패 조니 뎁이 광인과 선인을 오가는 모자장수를 대안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창조해냈다.



3.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El Laberinto Del Fauno, Pan`s Labyrinth)
2006년 | 길예르모 델 토로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는 굉장히 쇼킹했어요. 동화 같기도 하면서 공포영화이기도 하구요. 저는 공포 영화나 스릴러 영화도 좋아해요. 사실 <신사의 품격> 같은 로맨틱 코미디가 제 장르는 아니에요. 오죽하면 <신사의 품격>도 청담마녀라서 했다고 하겠어요. (웃음) 최근에는 우리나라도 장르가 참 다양해졌지만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처럼 독특하고 개성 있는 영화를 볼 때마다 안타깝죠. 저는 이런 영화에 항상 목말라 있거든요.”

어린 소녀에게 새아버지와 낯선 환경, 아픈 엄마는 전쟁의 공포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상이다. 소녀의 유일한 도피처인 동화 속 세계가 현실을 침범하면서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무서운 악몽과 꿈같은 동화 사이 어디쯤에 놓인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는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비주얼과 상상력이 응집되어 있다.



4.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
2001년 | 라스 폰 트리에

“워낙 뮤지컬을 좋아해서 뮤지컬 영화도 좋아해요. <어둠 속의 댄서>는 슬프고 우울한 영화지만 감동이 있어요. 영화는 감동을 주면 다 되는 것 같아요. 보면서 가장 많이 울었던 영화이기도 하구요. 음악도 너무 좋았고, OST도 너무 좋았죠. 여배우로서 <어둠 속의 댄서>의 주인공 같은 역할을 맡는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오로지 아들만이 삶이 이유인 여인의 비극과 그녀의 유일한 탈출구인 화려한 뮤지컬 신은 하나의 영화로 묶이기엔 사뭇 다르다. 그러나 그 이질적인 충돌에서 이 영화의 개성이 생겨난다. 제 53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여우주연상 수상작.



5. <시카고> (Chicago)
2003년 | 롭 마샬

“<시카고>의 화려한 춤과 노래, 정말 멋지지 않나요? 뮤지컬로도 보고 영화도 참 좋아해요. 제가 어렸을 때 지금처럼 우리나라 뮤지컬이 발전했었다면 뮤지컬계로 갔을 것 같아요. 이젠 좀 늦은 것 같지만 작은 역할이라도 주어지면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노래든 춤이든 항상 준비가 돼야 하는데, 계속 촬영하다 보니까 시간이 부족해서 자신은 많이 없지만 그래도 제의가 들어온다면 거기에 맞춰서 열심히 하고 싶어요.”

화려한 무대, 사랑과 배신, 당신이 뮤지컬에 원하는 모든 것이 여기 있다. 동명의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시카고>는 벨마와 록시라는 희대의 여성 캐릭터의 매력과 혼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의 향방을 맛깔나게 버무렸다. 롭 마샬 감독은 데뷔작인 <시카고>로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저도 마사지도 받고 관리도 해요. 그래도 눈빛에서 느껴지는 나이는 속일 수가 없더라구요. 그 눈이 인생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탱탱한 얼굴을 가져도 눈빛과 말투와 몸짓에서 나이가 다 나와요. 그래서 세월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연기를 하지 않아도 어떤 여자라도 나이를 먹으면 눈빛이 깊어지죠. 사물을 볼 때 좀 더 다른 의미를 갖고 보니까요. 저 역시도 눈빛이 좀 그윽해진 것 같기도 해요. (웃음) 여배우한테는 나이를 먹는 게 절대 두려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이제는 연기다운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막극 전문 배우”라는 말을 들었던 적도 있다. “순수하게 연기가 하고 싶어” 찾은 현장에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많이 보기도 했다. 그러나 20년이 넘게 연기를 해온 배우의 자신감은 이 정도다. 세월의 흐름도, 외모의 변화도 두렵지 않은 김정난이 펼쳐 보일 “연기다운 연기”가 기다린다.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