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전 세계 여성이 어떤 책에 빠졌다. 미국 시애틀을 배경으로 갓 대학을 졸업한 22세의 순진한 여성 아나스타샤 스틸과 27세의 잘생긴 억만장자 크리스천 그레이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3부작 시리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엄마들의 포르노”로도 불리고 있는 이 시리즈의 돌풍은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1부 와 2부 , 3부 으로 이어지는 이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4천 만권 (전자책과 종이책 합산)이 판매됐으며, 현재 37개국에 판권이 넘어가 출판되었거나 출판을 앞두고 있다. 시리즈는 1980년대, 소녀들을 휩쓸고 지나갔던 할리퀸 로맨스를 다시 기억하게 한다. 차이가 있다면 더 노골적이고 대담해진 성관계 묘사다. 특히 결박과 훈육, 지배와 복종, 가학증과 피학증을 아우르는 ‘비디에스엠’ (BDSM)에 대해 자세히 다뤄 큰 반향과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야한 책’이라기보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하는 게 좋을 듯하다.

팬픽에서 시작된 열풍
<50가지 그림자>│채찍 맞는 신데렐라 스토리에 열광하다
│채찍 맞는 신데렐라 스토리에 열광하다" />
이 시리즈를 쓴 작가 E.L. 제임스(본명은 에리카 레너드)는 10대 아들 둘을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던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다. 한 번도 글을 써보지 않았던 그녀가 컴퓨터 앞에 앉은 이유는 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는 몇 해 전 팬픽 사이트에 라는 제목으로 올라왔던 소설이다. 주인공 이름을 에드워드와 벨라로 했던 이 시리즈는 수위 높은 묘사 때문에 더 이상 팬픽 사이트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고, 제임스는 이를 자신의 웹사이트 ‘50가지 그림자’에 올리게 됐다. 이후 작가는 캐릭터 이름을 바꿔 오리지널 작품으로 내놓았고, 2011년 5월 라이터스 커피숍이라는 호주 버추얼 출판사에 의해 전자책으로 판매되기 시작됐다. 이 출판사는 홍보 예산도 없는 작은 회사였으나, 에 대한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친구나 인터넷을 통해 소문을 들은 여성들이 전자책을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저렴하게, 그리고 남몰래 구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올해 3, 4월 영국과 미국에서 정식 발간되면서 지금과 같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다. 특히 30대 이상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아 “엄마들의 포르노”라는 별명이 생겼지만, 사실 알고 보면 사회, 경제적인 것은 물론 인종의 벽도 넘어 모든 연령층의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물론 평론가들과 동료 작가들은 작품성이 전혀 없다며 시큰둥한 반응이 대부분이지만, 장르의 특징을 인정한 일부 평론가로부터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같은 의 돌풍은 제임스에게 매주 평균 약 150만 달러를 안겨주고 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다니엘 알프레드손의 시리즈가 4년에 걸쳐 2천 만권 판매된 것에 비해, 시리즈는 4개월 만에 2500만 권(전자책과 종이책 합산)의 판매를 기록했다. 시리즈 총 7권의 합산 판매량도 가뿐히 넘어섰다. 아마존 닷컴에서 시리즈 판매량은 이 시리즈를 제외한 그 다음 순위의 소설 1,000개를 합한 숫자의 2배가량이라고 한다. 몇 해간 어려움을 겪고 있던 서점 체인 반스 앤 노블은 이 시리즈 덕분에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6%나 판매가 늘어났다. 시리즈는 미국에서만 2500만 권이 팔려나갔으며, 독일은 6번이나 재판을 찍어냈다. 영국에서는 시리즈 발매 후 섹스 토이의 판매량이 30~70%까지 증가했고, 로맨스 또는 에로틱 소설의 판매량도 130%나 증가했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19% 가량이었던 로맨스 소설의 전자책 판매량이 올해는 32%로 뛰어올랐다. 와 관련된 수많은 유튜브 동영상이 올라오고 있으며, 등 CD 발매도 기획되고 있다. 제임스는 등 유명 토크쇼와 뉴스 프로그램 인터뷰에 자주 등장하게 됐고, 스케치 코미디 쇼 역시 이 시리즈를 풍자하기에 이르렀다.

“야하지만 남들이 다 읽으니 나도 읽을 수 있는 책”
<50가지 그림자>│채찍 맞는 신데렐라 스토리에 열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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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로맨스 소설이나 일반 소설을 선호하던 평범한 여성들이 에 빠져들기 시작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부유하고 잘생긴 미혼남이 어리고 순진한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진부한 내용이지만 일단 많은 여성들이 동경하는 신데렐라 스토리고 여기에 BDSM이 더해지면서 인기가 가중되었다는 분석이다. 또한 여성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끌면서 “야하지만 남들이 다 읽으니 나도 읽을 수 있는 책”이 됐다. 더불어 식상한 부부관계를 다시 새롭게 바꾸는 역할도 해서 오랜만에 서점을 찾는 여성들도 많아졌다. 에 채찍이 더해진 소설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시리즈. 고전 소설 중 나 , 를 비롯해 프랑스 SM 소설 , 앤 라이스의 시리즈, 실베인 레이너드의 , 제이미 맥과이어의 등에서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영화에서는1986년작 가 가장 큰 영향을 준 듯하지만 이 외에도 , 등에서도 유사한 테마를 찾을 수 있다.

요즘 시리즈를 버스나 지하철에서 ‘당당하게’ 읽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 일부 미디어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이 책을 읽는 여성들에게 “좀 심한 거 아니냐”라는 논평을 쓰기도 했다. 플로리다주 브레바드 카운티의 공립도서관에서는 외설스러운 내용을 문제 삼아 도서관에 비치하지 않겠다고 발표 했으나, 시민들의 요청을 외면하는 것은 공립도서관의 자세가 아니라는 여론이 거세져 결정을 번복하기도 했다. 요즘에는 아무리 많은 수량을 구비해 놓아도 언제나 대출 중이기 때문에 정작 도서관 안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고 한다. 시리즈의 인기는 현대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일부에서는 여성들이 이 시리즈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공개적으로 성생활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 페미니즘이 성장한 것을 보여준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에서는 정치적 올바름만을 강조하는 TV나 케이블 시리즈의 강인한 여주인공들에 익숙해졌다가, 강한 남성 캐릭터에게 리드 당하는 ‘약한’ 여성 캐릭터를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준다고 분석했다. 현대 여성들의 경제적인 자립과 페미니즘의 승리는 곧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하는 고달픔과도 직결한다고 보는 시선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는 힘들고 복잡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몽상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남성 스트리퍼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가 게이 팬들의 관람은 물론 여성 팬들의 단체관람 또는 여러 차례의 재관람 덕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는 분석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글. 뉴욕=양지현 (뉴욕 통신원)
편집. 김희주 기자 fif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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