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축구를 정말 잘 한다. 똑똑하기도 하다. 심지어 잘 생겼다. 그리고 한국 축구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따게 한 감독이다. 한국 축구인 중 커리어의 왕. 실패 없는 인생. 그런데,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았다.
홍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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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흥세: 홍명보가 광희중학교를 다닐 당시 축구부 감독. 임흥세는 훈련 중 1시간 내내 볼 트래핑을 시키거나 정확한 슈팅을 연습시키는 등 기본기를 가장 중시했다. 홍명보는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축구에서 기본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절감했고, 동시에 기본기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으면서 생각하는 축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홍명보는 고교 1학년까지 키가 170cm가 넘지 않았고, 체격도 왜소해 “축구는 잘하는데 너무 조그맣고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홍명보가 이런 약점을 뛰어난 두뇌로 극복하려 했다. 실제로 그는 중학교 시절까지 운동에 전념하면서도 중위권 이상의 성적을 유지, 담임 교사에게 공부에 전념할 것을 권유받기도 했다. 축구를 피지컬 보다 멘탈로 하는 새로운 유형의 선수 등장.

남대식: 홍명보가 고려대를 다니던 당시 감독. 남대식은 3학년이던 홍명보에게 한국 축구 역사를 바꿀 지시를 내렸다. 미드필더이던 홍명보에게 최종 수비수인 스위퍼를 맡긴 것. 당시 수비수는 공격을 막고 공을 적진으로 멀리 차는 것이 주임무였다. 하지만 고교시절부터 게임을 전체적으로 보는 시야를 가졌던 홍명보는 경기 흐름에 따라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고, 공격수가 적진으로 침투할 수 있는 패스를 줬다. 그 결과 팀내 득점 2-3위를 기록하는 새로운 수비수가 탄생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키는 182cm까지 자랐다.

이회택: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감독. 당시 주전 수비수들이 부상을 당하면서 주전으로 발탁됐다. 뛰어난 선수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체격 조건 때문에 “몸은 약한데 축구는 좀 한다”는 말을 듣고, 대학 시절에는 이미 스타였던 선배들로 인해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던 그가 드디어 제대로 활약할 기회를 잡은 것. 홍명보는 막내로 참가한 첫 월드컵에서 이회택이 “지능적인 플레이”가 뛰어나다는 인상을 받을 만큼 자신의 플레이를 제대로 보여줬다. 그 후 홍명보는 국가대표 은퇴 전까지 모든 월드컵에 참여했고, 언제나 가장 믿을 수 있는 선수로 활약했다. 또한 K리그에서는 데뷔 첫해에 팀의 우승과 함께 MVP가 됐다. 이회택의 말대로 “운과 실력 모두 갖춘” 선수.

서정원: 홍명보의 대학 후배. 고등학교 시절부터 최고의 스타였고, 1994년 미국 월드컵 한국 대 스페인전에서 어마어마한 동점골을 기록했다. 당시 서정원의 골에 어시스트를 한 선수가 홍명보였고, 한국 팀의 첫 골을 넣은 것도 그였다. 또한 독일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넣은 중거리 슛은 경기의 패배와 상관없이 한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수비는 안정적으로 잘하고, 필요할 때는 공격에 나서며, 가장 중요한 순간에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한다. 1994년 월드컵을 통해 홍명보의 새로운 플레이 스타일이 대중에게 알려졌고, 그는 박지성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축구의 아이콘으로 활약한다. 먼저 나서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부각되고, 늘 듬직하고 안정적이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과감하다. 어쩌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플레이어.

차범근: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감독. 당시 한국 대표팀은 네덜란드에게 5-0으로 패했고, 이로 인해 차범근은 월드컵 도중 경질 당했다. 홍명보는 당시 경질 소식을 듣고 너무 괴로워서 한동안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또한 당시는 해외파 선수들이 많아서 선수들끼리도 가까워지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분위기를 잡아줄 마땅한 선배가 없었던 것도 문제였다. 홍명보 스스로 “최악의 월드컵”이라고 기억할 만큼 실패로 가득했던 시절. 또한 1994년 월드컵 이후 기회가 있었음에도 유럽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홍명보의 축구 인생에서 거의 유일한 한으로 남았다. 2002년으로 가기 위해 그가 통과해야했던 가장 어두운 시절.

나카다 히데토시: 일본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 중 한 명. 홍명보가 일본 J리그 팀 벨마레 히라쓰가에서 뛰던 당시 한 팀에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명보상’과 ‘히데’라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고. 유럽 진출이 좌절된 뒤, 홍명보는 1994년과 1995년 두 해 동안 국내에서 목표의식을 잃고 다소 방황했었다. 큰 일탈은 없었지만 이전보다 자주 술을 마셨다고. 그 때 진출하게 된 J리그는 그에게 새로운 동기부여가 됐다. K리그보다 경기력이 높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탄탄한 유소년 시스템부터 선수의 가족들까지도 최선의 지원을 해주는 구단의 지원까지, 전체적인 축구문화를 발전시키는 요소에 힘쓰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 특히 이제 막 19세가 된 선수도 휴식 기간 동안에는 혼자 배낭 여행을 떠나거나 공부를 하는 모습은 그에게 축구 선수의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첫 월드컵에서 축구계의 신성은 어느덧 노장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됐다. 그러나 그만큼 생각은 깊어졌다.

히딩크: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설명 끝. 히딩크가 2002년 한일 월드컵 감독을 맡을 당시 홍명보는 부상으로 한동안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했고, 일부 언론은 그를 세대교체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 때 히딩크는 박항서 코치를 통해 홍명보에게 “(주전 경쟁에 밀려) 경기에 못 나가면 참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홍명보는 “경쟁을 통해 주전을 차지할 수 있다면 합류하겠다”고 답했다. 홍명보는 체력 테스트에서 후배들을 제치고 상위권을 기록할 만큼 경쟁을 통해 주전이 됐고, 히딩크는 그에게 따로 전술에 대한 설명을 하는 등 그를 중용했다. 처음에는 포백 시스템의 4-4-2 전술을 시도했다 결국 홍명보에게 익숙한 3-5-2를 선택하기도 했다. 1998년에 구심점이 없던 것을 아쉬워하던 홍명보는 2002년에 자신이 그 역할을 했다. 선후배간에 동등한 호칭을 하라는 히딩크의 지시에 김남일이 하필 “명보, 밥 먹자”라고 한데는 이유가 있을 듯. 공정한 경쟁 위에서 선수들의 심리를 파악해 잠재력을 끌어올린 감독과 감독의 의도를 가장 잘 이해한 선수의 만남. 그리고 꿈은 이루어졌다.

황선홍: 홍명보와 4번의 월드컵을 함께 한 선수. 홍명보는 그를 가장 절친한 친구라 말하고, 황선홍은 둘도 없는 친구라고 말한다. 황선홍에 따르면 홍명보는 “간혹 화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묵한”사람이자 “수비수이면서 전체를 조율하고 게임을 보는 눈이 탁월하고 상대 공격수의 패스를 차단해 곧바로 역습하는 능력이 뛰어난 선수. 수비수 홍명보가 국가 대표가 된 뒤 큰 굴곡 없이 정상의 위치에 있었던 것과 달리 공격수 황선홍은 월드컵마다 국민의 엄청난 기대가 주는 정신적인 압박감을 견뎌야 했다. 1994년 월드컵에서는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것을 자책했고, 1998년 월드컵 전에는 부상을 당해 경기에 뛸 수 없었다. 그리고 2002년. 황선홍은 폴란드 전 골을 기록했고, 미국전의 부상투혼으로 한국인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 그 사이 홍명보는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중거리 슛으로 경기 분위기를 바꾸며 후배들을 다독였고, 월드컵에서 한국의 수비진을 이끌며 한국을 4강에 올렸다. 축구 선수가 월드컵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해피엔딩.

아드보카트: 홍명보가 독일월드컵 코치를 맡을 당시 감독. 2002년 월드컵 이후 국제축구연맹이 “의심할 수 없는 전설적인 스타”라 언급했던 홍명보는 은퇴 후 축구 행정가와 지도자의 길 사이에서 고민했다. 이 때 아드보카트는 홍명보에게 지도자의 매력을 발견하도록 만들었다. 선수가 아닌 코치로서 아드보카트와 일하면서 팀 전체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에 대해 새롭게 눈 떴고, 감독과 선수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지도자의 역할에 대해 공부했다. 한국에서 수비수의 개념을 바꿨고, 인프라의 문제를 고민했으며,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에는 미국 프로 스포츠의 뛰어난 마케팅 기법을 국내에도 도입해야한다고 생각했던 선수. 은퇴 후에는 영어 공부와 함께 스포츠 마케팅에 관한 MBA과정을 밟고 싶었던 독특한 축구 지도자. 어쩌면 앞으로의 홍명보는 선수시절의 실력 이상으로 축구를 바라보는 비전으로 인정받게 될지도 모른다.

박종우: 홍명보가 감독이었던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의 축구 동메달이 확정된 후 이른바 ‘독도 세레머니’가 문제가 돼 시상식에서 메달을 받지 못한 선수. 이에 대해 홍명보는 기자회견을 통해 “행정적인 부분에서 더 신중했어야 한다”면서 “(박종우는) 어느 선수보다 많은 공헌과 노력을 했다. 자격이 있는 동메달리스트다”라고 옹호했다. 또한 대한체육회가 박종우를 환영 만찬에 참석 못하게 하려 하자 박종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참석하라고 권유했다. 박종우의 행동에 대한 축구협회나 대한체육회의 판단은 나름의 논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명보는 다른 무엇보다 팀원의 심리상태를 살피고, 자신이 나서서 책임을 함께 지려 했다. 박주영의 군 입대 문제가 논란이 될 때도 기자회견에서 “(박주영이 군대에 안 가면) 내가 가겠다”며 스스로 논란의 대상이 되길 자처했다. 2002년 월드컵에도 16강 진출 당시 선수들의 병역 문제를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고, 월드컵 포상금을 차별 없이 지급할 것을 요구하는 그는 감독이 돼 한 팀을 책임지는 리더십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욕은 내가 먹고, 선수는 감싸고, 공은 모두와 함께 누린다. 한국에서 참 보기 힘들었던 유형의 리더.

기성용: 공 좀 차는 트위터 이용자. 토크쇼에서 스스로 런던 올림픽 당시 호텔 보드판에 “명보야 네가 짱 먹어라”라고 썼다고 실토해 화제를 모았다. 기존의 대표팀 분위기에서는 깜짝 놀랄 일이지만 그만큼 당시 감독과 선수간의 분위기가 격의 없었음을 보여주는 예. 선수 시절 경직된 선후배 관계를 좋아하지 않고, 특히 구타에 반대하는 입장이던 홍명보는 런던 올림픽에서 보다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도 성적이 나올 수 있음을 증명했다. 또한 그는 런던 올림픽 동메달이 2002년 월드컵 3-4위전에서 패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자신의 선수 시절과 달리 포백을 사용하고, 선수들 간의 간격을 촘촘히 유지해 경기력을 극대화 시켰다. 자신과 같은 뛰어난 선수의 능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던 선수시절과 달리 조직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런던올림픽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 다양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유다. 선수시절부터 감독에 이른 지금까지, 그는 끊임없이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했다. 그리고 문제의 해법은 이전과 다른 비전으로 축구를 새롭게 보는 것이었다. 한 외신은 홍명보를 “한국의 바켄바워”라 표현했다. 선수, 감독, 행정가로 모두 최고에 오른 바켄바워에 비하면, 홍명보는 아직 가야할 길이 많다. 또한 그만큼의 업적을 달성할지도 미지수다. 그러나 홍명보는 그라운드 위에서 축구를 다르게 보고, 새롭게 하는 법을 실천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한국에서 새로운 축구가 시작되는 그 순간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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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와 같은 축구 국가대표 선수였던 이천수가 출연한 뮤직비디오 ‘투 비’의 여주인공 김지혜가 출연한 영화 의 주연 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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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명석 기자 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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