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성의 10 Voice] <케빈에 대하여>, 엄마의 자격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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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는 요컨대, 고장 난 선물에 대한 시나리오다. 아기는 순수하고, 연약하고, 무지해야 하는 본연의 성질을 갖지 못했고, 결국 그 아이는 엄마를, 가족을, 사회를 불행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법체계는 아이를 단죄하고, 세상은 엄마를 비난하지만 두 사람은 선물을 내려준 하늘을 쉽사리 원망하지 못한다. 대신 영화는 고통스럽게 케빈에 대해 고민하는 에바를 고민한다. 분명 어딘가에 문제의 씨앗은 뿌려졌고 그 자국을 더듬어 가는 것은 복잡한 미로 속을 헤매는 것과 같다. 누구의 도움도, 격려도 없이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면서도 에바는 도망치거나 되돌아 가려하지 않는다. 영화의 홍보 문구인 ‘너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무수한 어려움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아이의 상태와 존재를 떠나서 불멸하는 엄마라는 이름이다. 너의 엄마가 된 이상, 여자는 다른 이름으로 그것을 덮어버리거나 지울 수 없다. 엄마는 아이가 세상에 나타난 것에 대한 증인이며, 아이와 세상이 불화하는 과정을 목격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모성을 향한 이중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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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화는 에바를 통해서 케빈을 해석하고, 케빈을 이용해 에바를 이해한다. 아기란 하늘의 선물이며, 그 포장을 벗겨낸 이상 엄마란 불만과 고통을 감수하고 선물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존재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강제성은 역설적이게도 손쉽게 원망의 구조를 만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원작 소설에는 영화에 생략된 케빈의 재판과정이 쓰여 있는데, 이 과정에서 법률과 세상은 끊임없이 에바에게 엄마로서의 직무유기에 대해 확인하고자 한다. 아기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거나, 올바른 방법으로 사랑하지 않았거나, 혹은 사랑하지 않았던 엄마는 죄악의 근원이자 불행의 원흉이 된다. 임신을 통해 ‘사회의 소유물’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에바의 불쾌감은 결국 현실의 문제로 드러나지만, 그녀가 겪었던 불안과 공포는 오직 에바와 관객만이 아는 비밀로 은폐된다. 모성이 숭고한 이유는 그것이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 조각의 불신, 한 순간의 외면이 수많은 희생을 배반하더라도 감내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모성은 여전히 가장 건재한 오해의 산물이다. KBS 의 엄청해와 가족들은 귀남을 낳았고,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기대에 부응할 것을 요구한다. 엄마이기에, 그녀의 사랑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며 이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귀남은 원망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가족들은 며느리인 윤희에게 같은 기쁨과 만족감을 느낄 것을 강요하며 그녀가 생각하는 가치들이 출산과 등가물이 되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못한다. 귀남이 성장하는 동안 그를 책임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윤희가 고민하는 책임의 무게를 무시하는 것은 폭력적이고 맹목적인 모성의 신화를 그대로 반영하는 풍경이다. 윤희와 유사하게 가정적인 남편과 풍족한 자본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에바는 양육에 실패했다. 그녀의 아이는 그녀의 계획에 순응하지 않았으며 에바가 얻은 것은 아이에 관해서는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는 비관적인 깨달음뿐이다. 모성이란 미확정으로 가득한 선택을 결정한 엄마들이 두려움을 견디기 위해 필요한 자기 최면의 감정에 차라리 가깝다.

엄마가 된다는 것의 의미
[윤희성의 10 Voice] <케빈에 대하여>, 엄마의 자격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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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에 출연한 안철수 교수가 밝힌 “출생률이 사회의 미래”라는 분석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지점이다. 그의 문장이 인상적인 것은 젊은이들의 형편을 이해하는 마음이나 복지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출생률을 조율해야 할 계기판으로 바라보지 않는 그의 인식 때문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젊은이들은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책임을 나눠 가질 수 없는 사회를 조심스럽게 불신하는 것이다. 그런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에바들과, 이런 세상에 나오고 싶지 않았던 케빈들에게 출산을 거부하는 것은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모성이라는 본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피하는 본능에 충실한 이들은 사실 책임감이 없는 집단이 아니라 책임의 실체에 대해 요연하게 이해하고 있는 세대인 것이다.

결국 ‘케빈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가 손에 쥐게 되는 단어는 책임이다. 방지하지 못한 불행, 발생해 버린 비극은 책임자가 나타나고서야 마무리되는 법이다. 에바는 케빈에 대한 선택을 상기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킨다. 지옥에는 구원이 없고, 세상에는 기적이 없으며, 그녀가 붙들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명징한 선택의 감각뿐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거슬러 왔지만, 가 물어 오는 것은 새삼 단순하고 확실하다. 육아 지침서가 말하는 현명한 엄마, 광고들이 떠드는 세련된 엄마, 세상의 잣대가 가르치는 세련된 엄마가 아니라 진짜 엄마가 될 준비가 되었는가. 벅차오르는 감격, 넘쳐흐르는 사랑,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모험을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아프리카를 탐험한 위대한 여행가 에바 캇차두리안조차 힘겨워 한 여정에 뛰어 들 수 있겠는가. 누구도 감히 물음표를 찍을 수 없었던 질문이지만, 누구라도 고민해야 할 질문이 도착했다.

글. 윤희성 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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