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현│몇 번이고 몰입해서 본 영화들
규현│몇 번이고 몰입해서 본 영화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이돌, 그것도 ‘예능 담당’이 아닌 보컬 담당, 특히 발라드가 장기인 아이돌 가수가 예능계의 정글 MBC ‘라디오 스타’(이하 ‘라스’) MC로 투입되다니. 같은 팀 멤버 희철의 후임이긴 했지만 슈퍼주니어의 막내 규현이 김구라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미처 몰랐다. 해사한 도련님 같은 얼굴에 해맑은 표정으로 독설을 날리고, 하차한 김구라 대신 그의 미니어처를 가리키며 강한 질문을 던지는 규현이 의외로 빠르게 ‘라스’에 뿌리를 내리게 될 줄.

“수요일이 ‘라스’ 녹화하는 날인데, 한동안 화요일만 되면 잠이 안 왔어요. 제가 꼭 하고 싶었던 프로그램이라 기대가 되면서도 정말 걱정이 많이 돼서, 녹화 끝나고 나면 다음 주 녹화까지 거의 ‘라스’ 생각만 했죠.” 애청자가 많은 프로그램인 만큼 부담이 컸지만 ‘라스’를 1회부터 다시 보며 특성을 연구하고 멘트를 공부하다 보니 조금씩 치고 들어갈 틈이 생겼다. 녹화 전 게스트들의 대기실마다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동병상련 후발 MC인 유세윤과 동맹을 맺고, 때로는 무리수 개그조차 불사하는 노력들 또한 “‘라스’만의 특별한 색깔을 잃지 않게 하고 싶은” 규현의 애정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동안 슈퍼주니어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멤버로, 팀 전체와 함께는 군무를 추지만 혼자 무대에 설 때는 ‘기억의 습작’이나 ‘7년간의 사랑’처럼 아련한 발라드를 풍부한 음색으로 소화할 수 있는 가수로, 뮤지컬 의 달타냥으로, ‘라스’의 막내로 차츰차츰 자기 자리를 넓혀 온 규현은 여전히 욕심보다 여유를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주어진 일을 좀 더 잘 해 내고 있다 보면 다른 기회가 올 것”이라 믿는다는 규현이 ‘몇 번이고 몰입해서 본 영화’를 추천했다.
규현│몇 번이고 몰입해서 본 영화들
규현│몇 번이고 몰입해서 본 영화들
1. (Titanic)
1998년 | 제임스 캐머런
“얼마 전 3D로 재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꼭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벽에 극장에 갔다. 원래 3D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예전 작품을 3D로 만든 거라 눈이 아프긴 했지만 다시 봐도 좋았다. 끝나고 ‘My heart will go on’이 나오는데 극장 안에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아무도 안 나가는 거다. 왜들 안 일어날까 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너무 감동적이어서 소름이 돋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여운이 길게 남아서 계속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20세기 최대 비극 가운데 하나인 타이타닉 호의 침몰, 그것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드라마틱한 배경은 로맨스를 압도해 버릴 위험이 있었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은 그 짧고도 강렬한 사랑을 스크린에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국 은 1997년 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 등 11개 부문을 휩쓸며 세계적으로 18억 4천만 달러의 입장수입을 올렸고 이는 2009년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가 개봉하기 전까지 역대 최고의 흥행실적으로 기록됐다.
규현│몇 번이고 몰입해서 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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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Big Swindle)
2004년 | 최동훈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다. 스무 번도 넘게 봐서 대사를 다 외울 수 있을 것 같다. 꽉 짜인 이야기도 재미있고 모든 캐릭터가 다 매력 있지만 그 중에서도 박신양 선배님의 연기는 정말 기가 막힌다. 멋지고 지적인 역할도 정말 잘 하시지만 에서 날티 나는 사기꾼 역할을 그렇게 완벽하게 소화하시는 걸 보고 존경스러웠다.”

서로 믿지 못하는 다섯 명의 프로 사기꾼이 모여 벌인 한국은행 50억 원 사기극, 하지만 ‘한 탕’에는 성공했어도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하고 관객 또한 촘촘한 그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1996년 실제로 발생했던 한국은행 백지수표 사기사건을 모티브 삼아 시작된 최동훈 감독의 시나리오는 초고 완성 이후에도 18번의 수정을 거치며 리얼리티와 재미를 더했다. 한편, 감독 데뷔 전 학원 강사로 일하며 영화에의 꿈을 놓지 않았던 최동훈 감독은 훗날 “내 인생은 부모님에 대한 사기의 연속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가면 방송국 PD가 되는 거라고 거짓말을 했고, 내가 스태프로 일할 때도 우리 아버지는 연봉 110만원이 아니라 월급 110만원인 줄 알았다”는 농담 어린 고백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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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e Legend Of Ip Man)
2009년 | 엽위신
“견자단이 출연한 작품 중에서 을 제일 좋아한다. 중국 액션 영화 특유의 역동적인 느낌을 잘 살린 작품이다. 살아 있는 액션과 함께 실존 인물이었던 무술가 엽문의 삶과 당시 역사적 상황이 맞아떨어지면서 통쾌한 느낌 뿐 아니라 감동까지 전해 준다. 특히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같은 견자단의 표정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고수는 싸울 때조차 흐트러짐이 없는 것 같다.”

주윤발, 성룡, 이연걸 이후 중국 무술영화계를 대표하는 ‘형님’이라면 역시 견자단이 아닐까. 특히 ‘이소룡의 스승’으로 유명하며 중일전쟁 당시 영춘권의 대가로 중국 무술의 자존심을 지켰던 실존 인물 엽문의 활약상은 물론 그의 품위 있고 겸손한 성품까지 그려내는 데 있어 견자단 외의 캐스팅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꼭 들어맞는다. 국내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은 은 이후 3편까지 제작되었으며 정석원, 성준, 이정진 등 많은 한국 남자 배우들도 견자단의 팬임을 밝힌 바 있다.
규현│몇 번이고 몰입해서 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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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e Scent Of Love)
2003년 | 이정욱
“여주인공을 맡았던 故 장진영 씨를 좋아해서 보는 내내 설?던 작품이다. 박해일 씨가 정말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남자를 연기했는데, 조금은 비현실적일 수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첫사랑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낭만적인 영화다. 요즘도 가끔 다시 보곤 하는데 볼 때마다 참 아름답다고 느끼고, 또 그래서 슬퍼진다.”

대학 신입생 시절 국화꽃 향기가 나는 여인 희재(장진영)에게 첫눈에 반한 인하(박해일)는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루지 못하고, 훗날 먼 길을 돌아서야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행복을 거머쥐었다고 느끼는 순간 다시 빼앗기고 만다. 어쩌면 뻔한 신파인지도 모를 이야기는 故 장진영의 깊은 눈망울과 박해일의 순수함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어본 사람이라면, 혹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의 기쁨에 이은 상실과 절망을 경험했거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작품.
규현│몇 번이고 몰입해서 본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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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e Greatest Game Ever Played)
2005년 | 빌 팩스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좋아한다. 도 미국의 어느 아마추어 골프 선수가 우여곡절 끝에 큰 대회에 출전하고 우승하는 이야기인데, 왠지 내 얘기와 비슷한 면이 있어서 공감을 많이 했다. 아버지가 학원을 하시다 보니 처음 내가 가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는 “네가 가수 한다고 공부 안 하고 대학 떨어지면 남들이 ‘당신 아들이나 잘 가르쳐라’ 하지 않겠냐”면서 정말 많이 혼내고 반대하셨다. 하지만 요즘은 내가 출연하는 뮤지컬이나 해외 공연을 다 보러 오신다.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골프하는 걸 반대하던 아버지가 마지막에 아들이 우승하는 걸 보고 사람들과 함께 환호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모습을 보다가 예전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울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골프가 부유층만이 즐기는 귀족 스포츠로 인식되었던 20세기 초 미국, 평범한 노동자의 아들로 캐디 일을 하다가 아마추어 골퍼가 된 프란시스 위멧(샤이아 라보프)이 US 오픈에 출전해 당대 최고의 프로 골퍼들을 제치고 드라마틱한 우승을 하기까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 골프를 잘 모르는 관객이라 해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구성과 골프 특유의 심리전을 살린 연출, 역경을 딛고 성공한 주인공의 드라마 등이 좋은 조화를 이룬다. 극 중 위멧은 친구의 어린 동생을 캐디로 데리고 나오지만, 실제 위멧은 열 살 난 아들을 캐디로 동반해 참석했다는 흥미로운 뒷이야기도 있다.
규현│몇 번이고 몰입해서 본 영화들
규현│몇 번이고 몰입해서 본 영화들
열아홉 살에 데뷔해 스물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 나이에 비해서도 팀의 막내라는 위치에 비해서도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심지어 ‘라스’에서는 애어른 같기도 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규현이 가장 순수하게 기쁨을 드러내는 순간은 노력한 만큼 스스로 성장한 결과를 확인할 때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때 달리던 악플들이 ‘괜찮다’는 평가로 바뀌어가는 걸 보면 정말 날아갈 것 같아요. 모니터를 해서 잘못된 점을 고쳐 나가면 사람들이 그걸 알아주거든요. 다른 선배님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되지만, ‘그래도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는 반응을 볼 때 너무 행복해요.” ‘라스’의 어린 독설가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 역시 미처 몰랐다.

글. 최지은 five@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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