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좁은 계단을 오른다. 다른 남자는 계단을 내려온다. 계단을 오르던 이의 이어폰이 내려오던 다른 이의 옷깃을 스치고, 잠깐사이 눈길이 마주친다. 올라오던 남자는 미국에서 건너온 “신생 게이”이자 음악에 대한 꿈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석(송용진). 내려오는 남자는 세상의 틀에 갇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민수(김동윤). 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하 <두결한장>)은 둘의 만남을 통해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발을 내딛는다.

그동안 실팍한 눈으로 이현진과 이제훈을 ‘석’으로 출연시킨 김조광수 감독은 세 번째 석으로 뮤지션이자 뮤지컬배우인 송용진을 선택했다. 그동안 송용진이 <록키 호러쇼>, <헤드윅> 등 뮤지컬 무대에서 선보였던 캐릭터들과도, 영화 속 ‘Why not’에 출입하는 게이들과도 다르게 그의 석은 침착하고 어른스러웠고,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다. “내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가장 많이 했어요. 어쨌건 게이 캐릭터니까 언니들처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감독님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길 바라셨고, 저 역시 내추럴 하되 섬세하게 가려고 노력했어요.” 그 결과, 민수는 석을 따라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인정하고 세상 앞에 당당할 수 있었다.

최근 스크린에 등장한 새로운 얼굴들은 무대를 기반으로 한 이들이 많다. 송용진 역시 15년째 밴드 쿠바의 보컬로 활동해온 뮤지션이자, 무대에서 <록햄릿>, <헤드윅> 등의 작품으로 록과 B급 정서를 줄곧 담당해온 뮤지컬배우다. 2009년부터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뮤지컬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올해는 <칠수와 만수>로 연극무대에도 섰다. “예전에는 음악을 하기 위해 돈 벌려고 뮤지컬을 했어요. 진짜로. 그래서 음악은 와이프고 뮤지컬은 애인이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도 많이 했었는데 요즘은 그것도 넘어섰어요. 그냥 난 예술가고, 음악이며 뮤지컬이며 제작이며 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의 수단 중 하나예요.”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뚜렷한 노선이 있다. 본인이 제작하는 뮤지컬에 ‘송용진이 연출한 이상한 뮤지컬’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래서다. “보시면 바로 아실 걸요?”라며 웃으며 선택한 아래 다섯 편의 영화는 그래서 그 자체로 송용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다. 자신의 성향을 결정해준, ‘다름’의 미학이 있는 영화들이다.




1. <록키 호러 픽쳐 쇼> (The Rocky Horror Picture Show)
1998년 | 짐 셔먼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봐야 돼요. 뿌리. (웃음) B급, 컬트의 대명사. 게다가 팀 커리의 그 미친 연기! 어떻게 그것보다 연기를 더 잘 할 수 있어요! 당시 영화상영할 때 관객들이 코스프레를 하고 와서 봤었잖아요. 영화 자체도 너무 좋았지만 그런 것에서도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고, 처음 만든 뮤지컬이었던 <치어걸을 찾아서>에 드레스코드 같은 걸로 적용 해봤어요. 뮤지컬 공연을 하기도 했고, 예전엔 뮤지컬을 만든 리처드 오브라이언이랑 화상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고대 철학자를 찾아가서 도를 깨우친 제자가 된 거 같더라고요.”

성에 대한 자유분방함과 화려한 비주얼, 엉뚱한 유머코드의 <록키 호러 픽쳐쇼>는 제작된 지 40년이 가까워오지만 여전히 핫하다. 뮤지컬에서부터 시작된 이 작품은 관객이 배우와 함께 ‘타임 워프’에 맞춰 춤을 추고, 휴지와 물을 뿌리거나 코스프레를 하는 등 작품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기로 유명하다.



2. <헤드윅> (Hedwig And The Angry Inch)
2002년 | 존 캐머런 밋첼

“전 언제나 뮤지컬 <헤드윅>을 대표작이 아니라 출세작이라고 말해요. 거의 인생을 바꾼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한 번도 이벤트 같은 걸 해본 적도, 당첨된 적도 없었는데 <헤드윅> 시사회에 당첨된 적이 있었어요. 사정이 있어서 그때는 못보고 나중에 DVD로 봤거든요. <헤드윅>은 음악과 알 수 없는 치유에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가 국내에서 2002년도에 개봉했는데, 사실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았던 시기였어요. 돈이 아예 없었고, 배신도 당했었죠. 그때 <헤드윅>을 보면서 굉장히 많은 치유를 받았고 바로 헤드헤즈가 됐어요. 그렇게 영화를 보고 뮤지컬까지 하고. <헤드윅>은 저랑 진짜 인연이 있는 작품이에요. 정말 마르고 닳도록 봤던 영화에요.”

트렌스젠더 록커의 이야기를 다룬 <헤드윅>은 경계에 대한 영화다. 육체적, 정신적 상처로 뒤범벅된 헤드윅의 인생은 강한 록사운드 위에서 폭발하고, 눈물 대신 미소를 선택한 그녀의 강인함은 관객에게 깊은 치유의 시간을 선사한다. 1994년 드렉퀸 쇼가 펼쳐지는 록클럽에서 뮤지컬로 먼저 시작되었고, 이후 ‘헤드헤즈’라 불리는 마니아들의 호응에 영화화 되었다. 올 8월, 오만석과 박건형이 합류한 뮤지컬 <헤드윅>의 여섯 번째 시즌이 예정되어 있다.



3. <벨벳 골드마인> (Velvet Goldmine)
1999년 | 토드 헤인즈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는 굉장히 마초적이었어요. 앞에 얘기했던 영화들이 감성을 바꿔줬죠. <벨벳 골드마인>은 바뀐 저의 심금을 울린 영화라서 뺄 수가 없어요. 원래도 70-80년대 미국, 영국 음악을 많이 들었고 사이키델릭한 장르와 도어스를 제일 좋아했어요. 그 당시 또 굉장히 매력적인 장르가 글램록이었거든요. <헤드윅>을 보면서 데이빗 보위를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그쪽 음악에 빠지던 시절에 본 영화고, 음악적으로도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죠. 영화에 나온 비주얼들도 너무 좋아서 <헤드윅> 시즌3 때 참고해서 프로필 촬영을 하기도 했었어요.”

<록키 호러 픽쳐 쇼>와 <헤드윅>, <벨벳 골드마인>은 한 핏줄 영화로 이어져있다. 핏줄의 중심엔 여러가지가 있지만 자유와 반항의 록 음악은 영화를 기억하게 하는 절대적 요소다. 특히 데이빗 보위와 이기팝을 연상케 하는 <벨벳 골드마인>은 음악과 함께 관능적인 영상이 더해지며 영화는 글램록 그 자체가 된다.



4.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2005년 | 가스 제닝스

“쭉 이런 영화들을 봐오면서 키치한 거, B급을 계속 더 좋아하게 됐어요. 이 영화는 거의 보는 내내 ‘완전 천재 아니야?’라는 말을 달고 다녔어요. 웃다가 의자에서 넘어질 뻔 했다니까요. (웃음) SF도 굉장히 좋아하는데, 제가 좋아하는 B급과 SF가 다 섞여 있잖아요. 2000년대 이후 나온 B급 영화 중 정말 베스트인 것 같아요. 우울증에 걸린 로봇이라던가 이런 설정과 아이디어, 상상력이 너무 부러웠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그야말로 거대한 상상력의 집합체다. 우울증에 걸린 로봇, ‘안녕 생선은 고마웠어요’라 노래하는 돌고래 등의 설정은 독특하고, 쇼맨십 강한 대통령, 융통성 없는 우주생명체 등은 풍자와 조롱을 담당한다. 다양한 색감과 다채로운 소재 역시 이 영화를 감상할 키포인트.



5.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5년 | 미셸 공드리

“앞의 영화들이랑 사실 좀 많이 다르긴 하죠. 하지만 아이디어나 상상력이라는 부분에서는 다 비슷해요. <노팅힐> 같은 영화도 좋아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은 그런 일반적인 로맨스가 아니고 좀 다르잖아요. 로맨스 영화도 이렇게 풀 수 있구나, 싶었어요. 저랑 코드가 잘 맞아요.”

이별이 괴로운 것은 사랑했던 기억을 함께 나눌 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함께 간 장소, 함께 들은 음악, 함께 먹는 음식. 그래서 회복은 옅어지는 기억의 수와 비례한다. 짐 캐리의 멍한 눈빛으로 시작되는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과 이별, 기억과 망각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며 영화로 관객에게 묻는다. 괴로운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괜찮을까? <이터널 선샤인>의 독특한 상상력은 수많은 정답과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트로피로 돌아왔다.




“시사회 때마다 자리 없냐고 물어봤어요. (웃음) 왜냐하면 이 스크린에서 내리면 TV 모니터로 봐야 되잖아요. 극장에 걸려있는 그 모습을 머리에 좀 더 각인하고 싶었어요. 더 보고, 더 경험하고 싶어요.” 촬영에 필요한 장비는 물론이거니와 촬영순서가 뒤섞인다는 것도, 카메라 앵글에 맞춰 여러 번 연기한다는 것도 모르고 시작한 송용진의 첫 번째 영화는 그에게 또 다른 도전과제를 부여한다. “지금의 고민은 ‘어떻게 영화를 또 찍을 수 있지?’에요. 이제는 좀 알겠으니까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말 40대에는 영화감독을 해보고 싶어요. 내년이나 내후년에 아예 시간을 비우고 단편 영화부터 하나씩 시작할 건데, 그렇게 차근차근해서 우리 감독님처럼 40대에는 장편 데뷔하고 싶어요. 배우로, 뮤지션으로 사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창작하는 거 이 희열은 정말 따라올 수가 없네요. (웃음)”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찾아내어 기어이 실천하고야 마는 송용진의 삶은 결국 도전으로 지탱된다. 그의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 솔직하고 경쾌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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