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 “난 일반 스타가 아니라 슈퍼스타가 되고 싶었다. 프로 2년 차 때 타율 3할9푼3리, 19홈런, 84도루를 기록하면서 ‘지금보다 더 노력하면 만화에서나 나오는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설령 목표가 빗나가고 도전이 실패한다손 쳐도 절대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야구가 실수를 줄이는 싸움이듯 인생도 마찬가지다. 거창한 것 같지만, 실수를 줄여가면서 사람이 되는 과정이 인생이고 삶이다.”
이종범, 매거진 S와의 인터뷰
이종범
이종범
김재박: 이종범 이전 한국을 대표하던 유격수. 이종범은 어린 시절 동대문 운동장에서 김재박의 활약을 보고 유격수를 하고 싶었다고. 이종범의 부모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야구를 보는 아들에게 제대로 야구를 하라고 권유했고, 축구 선수도 하고 싶었을 만큼 빠른 발에 강한 어깨까지 타고난 이종범에게는 유격수가 제격이었다. 원래 이종범은 왼손잡이인데, 유격수를 하기 위해 오른손잡이로 바꿨다고. 이종범은 고교시절 광주일고를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우승에 올려놓고, 대학에서도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내며 해태 타이거즈에 스카웃된다.

김응룡: 해태 타이거즈에서 9번 우승한 감독. 1983년과 1986~89년 4연속 우승 등 첫 번째 ‘타이거즈 왕조’는 선동렬-김성한을 축으로 한 올스타급 스타플레이어의 힘이 컸다. 반면 1990년대의 4번의 우승은 막강 투수력에 ‘우승 DNA’가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어떤 상황에서든 이기는 법을 아는 탄탄한 조직력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종범은 저력 있는 팀에 화려함을 더한 화룡점정이었다. 데뷔 시즌인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7연속 도루를 성공하며 MVP에 뽑혔고, 선동열이 떠난 1996년과 1997년에는 명실상부한 팀의 슈퍼스타였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유격수가 3할 9푼 3리의 타율에 84개의 도루(1994)를 하거나, 3할 2푼 4리에 30홈런과 64도루를 기록했다. 승부를 피해 볼넷을 주면 당연하다는 듯 2루로 뛰고, 승부하면 넘겨버린다. 4번 타자를 해도 좋을 장타력으로 1번 타자로 뛰다 보니 더블헤더에서 두 경기 연속으로 선두타자 홈런을 쳤을 정도. 김응룡 감독이 이종범이 일본으로 떠나자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라고 말한 게 이해가 된다. 이종범이라기 보다 ‘金종범’이 더 어울리던 시절.

임창용: 일본 프로야구 야구르트 스왈로스의 투수. 이종범과 해태 타이거즈에서 함께 뛰었는데, 1996년 8월 23일 팀 사정상 이종범이 3이닝동안 포수를 맡으면서 임창용의 공을 받기도 했다. 다른 포지션의 야수는 거의 소화하기 불가능한 포수를 무난하게 보며 도루저지까지 했으니 운동 능력은 정말 천재적인 수준. 유격수 수비도 엄청난 운동 능력으로 일반적으로는 안타가 될 타구까지 잡다 놓치는 경우가 많아 기록원들이 이종범의 수비를 실책으로 봐야할 지에 대해 고민했다. 이종범 이후 야수에게 실책을 주는 것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세워지기도 했다. 선수로 뛰는 동안 투수 빼고 모든 포지션을 다 소화했고, 당구가 오른손으로 300-400, 왼손으로 1000이라는 풍문, 박종환 전 국가대표 축구감독이 이종범이 축구하는 걸 보고 “1년만 훈련시키면 국가대표도 되겠다”고 말한 건 덤. 이러니 포수로 뛴 그 경기에서 9회 2사 역전 만루홈런을 친 뒤 결과를 미리 쓴 기자들에게 “기자님들, 기사 바꾸게 해서 미안하요!”라고 말하는 자신감이 있을 수밖에. 그가 일본에 가는 건 너무나 당연해 보였다.

호시노: 이종범이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뛸 당시 감독. 훗날 이종범은 자신이 일본에 진출할 줄 몰랐다고 하는 걸 보면 일본 진출은 구단 차원에서 갑작스럽게 이뤄진 일인 듯하다. 하지만 국내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종범에게는 분명한 기회였고, 진출 첫 해인 1998년 시즌 초반까지는 2할 8푼대의 타율에 도루 1위를 기록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그러나 이종범의 야구 인생을 바꿨다고 해도 좋을 데드볼을 맞아 오른쪽 팔꿈치 부상을 겪었고, 공백기 이후 복귀했지만 부상의 여파로 과거에 비해 몸 쪽 공에 약점을 갖게 됐다. 또한 한국에서는 운동능력으로 넓은 수비범위를 자랑했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기본기 부족을 지적 받는다. 결국 호시노 감독은 이종범에게 중견수를 볼 것을 지시한다. 가장 화려한 유격수였던 이종범에게 중견수를 하는 것은 “야구 인생이 바뀌는” 경험이었고, 이종범은 부진 끝에 주니치 드래곤즈를 떠난다. 화려했던 야구인생 1막이 끝나고, 파란만장한 2막이 찾아왔다. 문자 그대로 “인생공부를 많이 했”던 시절.

김인식: 이종범이 주장으로 출전한 1회 WBC 감독. 해태가 아닌 기아 타이거즈의 선수로 복귀한 이종범은 과거만큼은 아니었지만 좋은 활약으로 기아 타이거즈의 10번째 우승을 위해 뛰었다. 2003년에는 20홈런 50도루로 당시 최고령 20-20을 기록했고, WBC 8강에서는 일본을 상대로 결승타를 날리면서 또 한 번 슈퍼스타의 능력을 보여준다. 당시 그의 아내가 “일본에는 지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일본에서의 아쉬움을 날릴 기회이기도 했던 듯. 또한 “말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면 동료들이 느끼고 따라온다”는 지론대로 WBC에서도 솔선수범하고, 박찬호와 이승엽 등 거물급 후배들을 융화 시키는 역할을 하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타이거즈의 팬들이 이종범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이유. 그러나 단기전인 WBC에 맞춰 타격폼을 수정한 것이 정규 시즌에는 독이 되면서 이종범은 2006년 시즌 타율이 급락하고, 급기야 2007년에는 1할대로 떨어진다. 또 한 번의 시련.

조범현: 2008년-2011년 기아 타이거즈의 감독. 이종범은 2년간의 부진으로 은퇴 기로에 섰다. 하지만 그는 5억 원이던 연봉을 2억 원으로 삼각하고서라도 선수로 뛰길 바랐고, 조범현은 부임 직후 이종범의 타격폼을 분석한 뒤, 그에게 타격폼 수정을 요구한다. 이후 이종범은 2007년을 제외하고는 2008-2011년까지 2할 7푼~8푼대의 타율을 기록했고, 연차가 아닌 실력으로 팀의 라인업에 낄 수 있었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실력은 나오지 않았지만 외야수는 물론 때로는 3루수까지 볼 만큼 팀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부응했고, “죽어도 그라운드에 쓰러져야”하고, “도루할 때는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산다는 생각으로 뛰어”야 한다는 야구에 대한 의지는 자연스레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에게 ‘타이거즈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그리고 이종범은 2009년 코리안 시리즈 1차전에서 결승타를 쳤고, “어느 구장보다 관객이 많”이 들어와 “평소 이상의 실력”을 보인다던 잠실 야구장에서 타이거즈의 V10을 이뤘다. 부상을 당해도, 2군에 내려가도, 은퇴 권유를 받아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40의 나이에 당당한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그리고 계속 야구했다.

선동열: 타이거즈, 그리고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 이종범과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을 함께 했고, 기아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2012년 시즌 개막 직전 했던 선수단 운영은 이종범의 은퇴였다. 야구 선수가 실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현역으로 뛰려는 것은 억지다. 그러나 이종범은 2011년 시즌 내내 후배들과의 경쟁을 통해 외야를 지켰고, 시범경기 동안 7경기에서 3할 3푼 3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기아 타이거즈가 아직도 외야수 자원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킨 프렌차이즈 스타를 시즌 개막 직전 “자리가 없다”며 은퇴하도록 한 것은 지나친 결정 아니었을까. 차라리 동계 훈련 전 은퇴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은퇴 위기에 트레이드라도 돼서 야구를 하고 싶어했고, “언제라도 안되겠다는 판단이 서면 유니폼을 벗겠다”던 이종범은 그 판단의 기회를 잃었다. 이제 더 이상, 이종범은 붉은 상의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무등 경기장의 배터박스에 오를 수 없다.

정정미: 이종범의 아내. 이종범이 은퇴사를 읽던 도중 눈물을 흘린 부분은 바로 아내를 언급한 순간이었다. 그의 아내는 이종범이 일본에서 힘들어하던 시절 갓 태어난 아이들을 돌보며 그에게 힘을 북돋았고, 그가 은퇴한 지금도 “2년이 지나면 (노는 것은) 절대 안 된다. 지도자로 뭔가를 할 것”이라면서 이종범이 또다시 무엇인가에 도전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가 가장 화려했던 시절에도,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그리고 자고나면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에도 계속 야구를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상황에도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종범은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야구선수가 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플레이를 우리에게 보여줬고, 참담한 실패를 겪고도 일어났으며, 그 뒤로도 이어진 위기에 악전고투하며 ‘종범神’이 됐다. 그가 인생의 모든 영욕을 겪는 사이, 타이거즈는 10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팀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팬에게 그 존재만으로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은 가장 야구를 잘하는 선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 그 많고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인생을 견뎌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를 하고 있을 때 그는 진정한 슈퍼스타가 된다. 이종범은 한국 야구사상 최고의 선수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타이거즈의 최고의 슈퍼스타다. 만화에서나 나오는.

Who is next
이종범이 출연한 MBC ‘무릎 팍 도사’에 출연한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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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명석 기자 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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