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람 “난 송화처럼 그렇게 외롭고 싶지 않다”
이자람 “난 송화처럼 그렇게 외롭고 싶지 않다”
뮤지컬 를 보고 있노라면, 예술가를 만드는 80%는 지구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시련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믿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밀고 나아가는 힘 말이다. 1시간 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자람이 가장 많이 쓴 단어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 낡은 장르라는 오래된 편견 속에서 판소리가 가진 극양식에 주목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집요하게 파헤쳐 판소리를 만들어냈다. 그가 만든 와 는 ‘판소리는 다섯 바탕만 있는 거 아니냐’고 묻는 대중들에게 판소리의 가능성을 일러줬고, 소리로 인생을 완성하는 를 통해 마음수련의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전통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소리를 아우르는 그의 현재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자람’이라 이름 지어졌을 때 이미 결정된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독감의 고열로 두 눈덩이가 벌개진 상황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그녀가 조근조근 건네준 이야기를 여기에 옮긴다.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는 극장 사이즈도 커지고, 오케스트라도 들어오면서 작품이 더욱 깊어졌더라.
이자람: 초연 때와 특별히 다르게 뭔가를 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차)지연이도, 나도 둘 다 시간이 흐르고 각자의 삶을 살다보니 그게 더 묻어나는 것 같다. 관객들 역시 이전에는 라는 걸 처음 만나느라 바빴다면, 지금은 어떤 점이 달라졌나 비교도 하고 동호도 3명이나 생겨서 어떤 합이 좋은지 얘기해주신다. 송화에 대한 배우들마다의 해석도 확연히 봐주시는 것 같고.

“내 소리가 너무 얇고 맑다고 느낄 때 늘 무력해진다”
이자람 “난 송화처럼 그렇게 외롭고 싶지 않다”
이자람 “난 송화처럼 그렇게 외롭고 싶지 않다”
초연부터 지금까지 를 여러 번 봤는데, 이자람과 차지연의 송화가 이렇게나 달랐나 싶더라. 어떤 대상에서 송화를 떠올렸나.
이자람: 한국의 엄마들. 는 예인을 다루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화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가부장 아빠 밑에서 자라며 굴곡을 지나온 한국 여성 그 자체다. 맑고, 밝고, 아빠 무섭고, 동호 좋고, 소리 좋아하는 송화가 슬픔과 분노, 증오를 알게 되면서 서서히 놓을 줄 아는 여자가 된다. 마치 나쁜남자에게 차인 것처럼. 송화라는 여자, 소리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낸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에 동호를 만났을 때는 살아서 이렇게 만난 것만으로도 참 고맙다, 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면서도 지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이어가는 송화는 인간적으로도 굉장히 튼튼한 사람 같았다.
이자람: 그래서 송화가 예인이다. 나이 찬 어른들이 가진 혜안과 현명함에 놀랄 때가 많은데, 그것들이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들을 겪었겠나. 나는 판소리를 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인간문화재 선생님들 밑에서 자랐다. 오랜시간동안 자신의 소리를 완성하려고 매일매일 연습하는 사람들은 정말 자기싸움이 심각하다. 첫 스승님이 남자분이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중환자실에서 정신이 없는 상태로 중얼중얼 ‘사랑가’를 하셨다. 내가 멋지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유가 명확했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다. 나 역시 스스로 도취되지 않고 속이지 않으려 항상 노력하지만 정말 쉬운 일은 아니다. (웃음)

동호처럼 방황하고, 유봉처럼 재능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들도 있었나.
이자람: 판소리를 잘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 목소리야말로 정말 타고 나야 되는 건데 내 목소리의 성량이 이것밖에 되지 않을 때, 소리가 너무 얇고 맑다고 느낄 때 늘 무력해진다. 특히 판소리는 어디에 기댈 곳이 없는 장르라 ‘내 몸이 나가면 이 공연은 끝이다’라는 생각으로 임하다보니 자기 전에 배에 대고 자꾸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런다. (웃음) 판소리를 가르쳐주셨던 은희진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1년간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었나.
이자람: 당시 은희진 선생님의 스승이셨던 오정숙 선생님에게 연락이 와서 다시 시작하게 됐는데, 그때 판소리를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했다. 판소리는 혼자 싸우는 시간들이 너무 많아 다들 에고는 엄청 강한데 소통할 줄은 몰랐다. 이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연습도 더 많이 하고 더불어 다른 장르도 많이 보고 많이 해봤다. 그러면서 전통판소리에서 발견되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객관화 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 판소리가 가진 엄청난 극양식은 한국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고, 당시 오태석 선생님(주: 1967년부터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대표 연극연출가) 같은 분들은 이미 스토리텔링을 하는 한국적 서사극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내가 판소리를 배워놓은 게 엄청난 무기라는 것을 알게 됐고, 그렇게 (주: 이자람이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의 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창작판소리)를 시작하게 된 거다.

에서도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한’을 얘기하고, 판소리를 향한 대중의 인식도 그곳에 머물러있는 편인데 는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같은 시대상을 유쾌하고 시원하게 내지른 작품이었다. “판소리의 정서가 한이라는 것에 반대”한다는 발언도 했고.
이자람: 난 송화처럼 순종적인 어린이도 아니었고, 그동안 싫으면 정말 싫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남자가 가는 꼴도 못 본다. 그래서 유봉이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이후 부르는 ‘원망’에서 그렇게 생지랄을 하는 거다. (웃음) 너무 화가 나서. 나를 가르친 명창들은 다 외로웠다. 특히 여류명창은 누구의 첩이거나 바지사장이 있거나 그렇게 살았다. 자식 하나 없이 TV만 끼고 살다 가신다. 옆에서 훔쳐보던 선생님들의 삶이기 때문에 나와 송화가 더 닮아보일거다. 그건 내 복이지. 하지만 내가 늙어서도 송화 같을까? 난 그렇게 외롭고 싶지 않다.

1인 밴드 같은 장르 자체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원래도 외로움을 잘 타는 편인가.
이자람: 외로운 거 되게 싫어한다.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판소리도 그렇고 대부분의 것들의 선택과 책임을 다 자식들에게 맡기셨다. ‘oo 때문에’가 없는 거다. 다 나 때문이니까. 그래서 더 외로웠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가 큰 자극이 되겠다.
이자람: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작업을 해본적도 없고 앞으로도 별로 없을 거다. (주: 이자람이 이후 브레히트의 로 만든 판소리) 해봤자 무대에 꼴랑 4명, 는 7명이다. 그들과 나누는 끈끈한 교류도 좋지만, 이런 큰 프로덕션이 나에게 주는 것들이 많다. 난 뮤지컬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 작업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송화가 주인공이지만 다른 배우들, 스태프들, 악사들이 없으면 송화가 빛날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는 2번 공연하고 하루 쉬면서 낑낑거리지만 일주일에 9회 공연하는 앙상블들은 감기 엄청 걸렸다. 그들을 보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무대에서 더 챙기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려고 한다. 요즘은 자꾸자꾸 다치고 면역력을 길러서 아프리카 암사자처럼 강해져야겠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증이 날 때가 있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제일 잘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서가 다더라. 까짓것 칭찬 덜 받지 하면서 털어낸다. 털어내는 게 몇일 걸리긴 하지만. (웃음)

‘살다보면 살아진다’라 노래하는 송화와는 정말 다른 것 같다. (웃음)
이자람: 열 몇 살의 송화는 위로하기 위해 그 노래를 부른다. 삶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건 찬성이지만 ‘살아보면 살아진다’라는 말을 개인 이자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맡기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자세보다는 ‘살아가야 된다’는 쪽이다. 열심히. (웃음)

“먹고 살 수 있어야 장르가 보존된다”
이자람 “난 송화처럼 그렇게 외롭고 싶지 않다”
이자람 “난 송화처럼 그렇게 외롭고 싶지 않다”
많은 대중들이 소리꾼이라는 점 때문에 이자람에게서 송화를 떠올리지 않나.
이자람: 많은 분들이 이자람 대단하다, 해주신다. 초연 때는 정말 힘들었다. 나는 그대로인데 대중은 이렇게나 다르구나라는 걸 느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이제야 발견해주다니 같은 원망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덤덤하다. 그런 내 자신이 신기할 정도로.

혼돈의 시간 속에서 평정심은 어떻게 찾아왔나.
이자람: 끝나고 했던 가 대박이 났었다. 갈길이 아직 먼데 벌써 이렇게 돼 버렸고, “너 대박 났다며”라고 묻는 얘기들에 좀 흔들렸었다. ‘사람들이 나보고 국보라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지?’ 이런 게 확 왔었다. ‘공연이 끝나고’라는 곡에도 나오듯 모든 연희자들에게는 그런 시간이 온다. 때 크게 왔는데 명확하게 정리가 됐다. 살던대로 살되 부자가 되려 하지 말고, 그렇다고 가난할 필요도 없기. 나는 내가 열심히 해낸 작업들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고 가야한다. 콘텐츠를 팔아서 어쩌고 그런 것들에 대한 노력이 아닌, 내가 계속 돈을 받고 갈 수 있는 가치를 꾸준히 만들어내는 것이 나에게 제일 어울리는 삶이라는 1차적 결론을 냈다.

쉽게 눈에 보이지 않아서 알아주기 힘든 가치일수도 있다. 그것들을 어떻게 지키나.
이자람: 진짜 모호하고 제일 어려운 건데 나를 믿는 것이다. 내가 상태가 좋으면 본능적으로 좋은 걸 선택한다. 그런데 내 상태가 좋지 않으면 나의 본능이 헷갈려서 엉뚱한 길로 간다. 대학 시절 돈이 궁하니까 별의별 무대에서 노래를 했었다. 그러다가 점점 내가 갈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 내가 갈 곳과 가지 않아도 될 곳, 내가 소모되는 곳과 내가 필요한 곳, 이런 것들을 정확하게 구분해야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난 그냥 그렇게 퓨전, 컨템포러리 이렇게 불리다가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거리가 있어지겠구나 싶었다.

모든 일들이 그렇지만 끊임없이 편견과 싸우는 작업인 것 같다.
이자람: 그냥 이렇게 , 작업들이 더 힘을 받았으면 좋겠고 나 말고도 판소리 공연에 유료관객이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 일단 나와 내 동료들이 행복하려면 이 장르에 대한 관심을 받는 게 맞다. 하지만 난 판소리에 대한 사명감으로 하는 게 절대 아니다. 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고, 는 내가 보고 싶은 이야기였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도리인 것 같다. 그리고 행복해지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은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거고. 상처도 엄청 잘 받고 판소리해서 노래 못한다는 얘기 듣는 것도 너무 싫고 억울하다. 하지만 내가 강해보이고 똑똑해 보인다면 그건 다 솔직해서다. 그것말고는 답이 없다.

사명감으로 하는 작업은 아니라고 했지만, 이 판에 존재하는 한 보고 싶은 그림이 있나.
이자람: 딱 정도만큼만 인정받을 수 있으면 판소리는 쭉 살 수 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벽을 깨부수기가 어렵지만 내가 사는 동안 그게 좀 깨질 거고, 그러면 100년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장르가 척박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래도 뮤지컬은 대중문화의 1/4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판소리는 딱 명함 만큼이고 거기다 국가지정문화재다. 여기서만 잘 해내면 누군가는 먹고 살겠지만 이걸 하는 다른 사람들은 먹고 살기 막막하다. 내가 바라는 건 장르의 확장이다. 먹고 살 수 있어야 장르가 보존된다. 먹고 살 수 없으면 누가 하고 왜 하겠나. 내가 즐겁게 살다 가야 뒤를 잇는 사람들이 그래도 ‘한 시대에 판소리가 부활했었다’라 얘기할거고, 그럼 왜와 어떻게를 찾아 시대에 필요한 소리를 하게 될 거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거다. 그럼 판소리의 역할도 제대로 살고 그 친구도 먹고 살 수 있고, 관객들도 좋은 거고. (웃음)

예술가라고 하면 소위 그 돈 문제에 있어서 초월적인 느낌이 있지 않나.
이자람: 그건 정말 오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도 밥 먹고 살면서 어떻게 돈을 낮게 볼 수 있나. 돈과 어떻게 화해하고 살아갈지를 고민해야 후배 예술가들도 산다.

가치를 지키면서 돈도 버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이자람: 답은 경쟁력이다. 전통판소리 한 소절을 하더라도 ABCDE의 한 소절이 달라야하는데 지금은 모두가 A의 판소리를 하고 있다. 누가 해도 상관없는 소리들. 늘 후배들에게도 “너만의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해내야 너의 전통판소리 하나라도 팔려간다”고 말한다. 똑같은 오페라 아리아라고 해도 누구의 것이 더 감동을 주느냐와 같은 거다.

“우래옥 냉면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이자람 “난 송화처럼 그렇게 외롭고 싶지 않다”
이자람 “난 송화처럼 그렇게 외롭고 싶지 않다”
전통판소리도, 창작판소리도, 뮤지컬도, 아마도이자람밴드도 한다. 또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
이자람: 임순례 감독 같은 사람이 판소리 영화를 만들면 하고 싶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임순례 감독 ‘같은’이다. 나는 판소리에서 연습과 이야기의 힘, 동시대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임순례 감독은 자신이 다룰 콘텐츠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 구조의 문제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감독이 있다면 판소리 얘기를 같이 쓰고 배우도 해보고 싶다.

아마도이자람밴드의 앨범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자람: 밴드는 판소리가 아닌 다른 노래를 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고, 시작한 이상 우리 멤버들하고 같이 놀 수 있으려면 그 장르에 맞는 노래를 써내야한다. 앨범은 올해 안에 나오긴 할 건데 총선이랑 대선이 있어서 앨범내기 힘들다고도 하더라. 비즈니스는 잘 모르지만 곰사장이 우리 밴드에 투자를 하니까 우리도 벌어야지. 장기하가 번 돈 우리가 다 쓰는 것 같다. 으흐흐. 기하를 위해서라도 앨범을 내야지! (웃음)

세상의 모든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 끊임없이 왕성한 사람 같다. (웃음)
이자람: 책 사는 걸 너무 좋아해서 보진 않는데 그렇게 막 산다. (웃음) 펼쳤을 때 계속 나를 잡아가는 책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좀 짱인 거 같다. 그런 책을 보면 나도 이렇게 예술해야 되는데! 라는 생각이 들고. 다양한 곳에서 자극을 받는 편인 것 같다. 얼마 전에는 감기 때문에 천혜향을 먹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과일은 처음 먹어봤다. 남자친구는 먹자마자 이런 예술을 해야 돼! 라고 하더라. 우리 커플은 좀 못말리는 것 같다. 후후. 우리가 맛있어하고,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결국 만들어내고 싶은 거다.

판소리를 주로 하지만, 결국 이자람은 그냥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궁극적으로 어떤 것을 만들어내고 싶나.
이자람: 남자친구는 천혜향 같은, 우래옥 냉면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근데 나도 거기에 동의하는 게 자꾸자꾸 찾게 되는 맛이기 때문이다. 아후, 우래옥 냉면 같은 건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웃음) 하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찾아서 먹었을 때 해소되는 시원함 같은 게 있다. 그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끝나지 않을까.

그렇다면 같은 여자이자 예인으로, 지금의 이자람은 송화의 어느 시절을 거치고 있을까.
이자람: 같은 나이일 것 같다. 송화도 지 나이로 살았을 거고 나도 내 나이를 산다. 서른넷. 나보다 어린 친구가 현명하고 지혜로운 경우도 있다. 모든 권력은 젊음이 두려워서 갖는 거라고 한다. 나도 나이 먹는 것을 이겨내려 했고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없진 않지만, 더불어 내 나이를 인정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이보다 어려보인다거나 나이에 맞지 않는 철없는 선택들은 그저 옵션이다. 어떤 부분은 더 젊어질 수도 오히려 더 나이들 수도 있다. 시간이 두렵다면 시간이 아닌 것들에 공을 쏟고 노력하는 게 낫다.

글. 장경진 three@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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