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의 팬이라면 2008년 연말은 ‘레전드’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때 동방신기와 비는 해외에서 돌아왔고, 국내에는 각각 ‘거짓말’과 ‘Tell me’ 이후 폭풍의 한 가운데에 있던 빅뱅과 원더걸스가 있었다. 여기에 데뷔 초였던 2PM과 샤이니까지, 그들이 모두 모인 2008년의 연말 가요 프로그램은 앞으로 이어질 아이돌의 시대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여전히 빅뱅, 동방신기와 JYJ, 2PM, 샤이니, 그리고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는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 다음이다. 이들이 모두 해외 활동을 병행하는 동안, 한국에서는 좀처럼 과거 그들만큼 시장에 영향을 끼치는 아이돌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돌은 오락 프로그램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다.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대부분의 아이돌에게 ‘춘궁기’라고 해도 좋을 이 시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 시절에 지상파와 케이블 TV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한 의 또 다른 이야기와,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MC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강명석의 100퍼센트] 아이돌, 1%의 우상과 99%의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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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우상인데, 무슨 우상이 10시에 (집에) 안 들어가면 혼나?” KBS 에서 아이돌 JB(JB)는 바뀐 법 때문에 밤 10시부터 방송 출연을 못한다. 그는 ‘짐승돌’처럼 거친 이미지를 가진 아이돌도 밤 10시에는 사라져야 하는데 무슨 매력이 있겠냐고 되묻는다. 그건 맞는 말이다. 다만 한 가지. 너희들, 우상 아니야. 소녀시대의 써니는 KBS 에서 낙지를 잡느라 갯벌에서 굴렀다. 하지만 얼마 후 CBS 에도 출연했다. 소녀시대는 예능에서는 망가지지만, 사실은 국내외 어디서든 톱스타다. ‘우상’이 된 아이돌의 매력이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소녀시대는 ‘The Boys’로 한국에서 2개월 정도 활동했다. 해외 활동이 더 바빠졌기 때문이다.

‘우상’의 빈 자리는 새로운 아이돌이 채우기 마련이다. 하지만 걸그룹들이 모인 의 시청률은 지난 주 5.1%(AGB닐슨기준)였다. 아이돌이 유기견을 돌보는 KBS 의 ‘가족의 탄생’은 4.3%다. 의 ‘불후의 명곡 2’도 처음에는 아이돌의 노래 경연을 내세웠지만, 어느새 다른 가수들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KBS , 걸그룹 버라이어티를 표방한 MBC 처럼 신생 아이돌 그룹도 출연하던 프로그램은 폐지됐다. 소녀시대와 2PM을 TV에서 쉽게 보던 시절, 예능 프로그램은 일정한 팬덤을 가진 아이돌로 관심을 모았다. 아이돌은 예능을 통해 캐릭터를 만들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반면 지금 TV에 남아있는 아이돌은 그만큼의 인기 그룹을 찾기 어렵다. 아이돌을 찾는 예능 프로그램도 점점 줄어든다. 인기 아이돌은 해외로 떠났는데, 남은 아이돌이 크게 성장할 방법은 딱히 없다.

점점 줄어드는 아이돌 시장의 규모
[강명석의 100퍼센트] 아이돌, 1%의 우상과 99%의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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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는 시장의 축소다. 얼마 전 틴탑은 KBS 1위를 했다. 틴탑은 음원 차트에서는 강세를 보이지 못했지만, 약 1만 5천장 정도의 주간 음반판매량으로 1위를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1만 5천장으로 1위를 할 수 있다. 음원이 대세인 시대에 음반 판매량 비중이 높은 의 집계기준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요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웬만한 남자 아이돌 그룹이 인기 여자 아이돌 그룹보다 수익성이 높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남성 아이돌 그룹은 팬덤 중심의 음반과 상품 구매가 강하다. 반대로 여성 그룹은 음원 중심으로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한다. 그런데, 여성 아이돌 그룹의 대중성이 그리 많지 않은 팬덤을 가진 남성 아이돌 그룹의 수익성을 능가하기 어렵다. 1만 5천장으로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 1위를 할 수 있을 만큼, 시장은 점점 ‘코어’팬들에 의해 좌우된다. 아이돌이 대중과의 접점을 찾기 어려우면서, 아이돌 팬덤 시장의 파이 역시 줄어들고 있다. 해외의 K-POP 붐과 별개로, 아이돌 산업은 불황으로 접어들고 있다. 시장을 활성화 시킬 동력을 쉽게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산업이 불황에 빠지는 것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아이돌 산업만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헤게모니를 쥘 필요도 없다. 하지만 지금의 불황은 한 산업 전체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국에서 아이돌이란 그 시대 매스미디어가 요구하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엔터테이너다. 음악산업이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 중심으로 넘어올 때 H.O.T.와 젝스키스가 탄생했다. g.o.d와 신화는 여기에 예능 프로그램이나 연기 활동을 더했다. 빅뱅은 10-20대가 따라할 수 있는 패션의 스타일까지 제시했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이후 걸그룹들은 음악, 예능, 드라마 어디서든 대중에게 부담 없이 다가설 수 있는 친근함을 갖췄다. 그러나 지난해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화두는 Mnet 와 MBC 의 ‘나는 가수다’ 같은 리얼리티쇼였다. 리얼리티 쇼는 ‘진짜’를 요구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출연자처럼 절박하든가, ‘나는 가수다’의 가수들처럼 미친듯이 열창해야 한다. 임재범의 굴곡진 인생도, 그 목소리도 아이돌의 트레이닝으로는 만들 수 없다. ‘불후의 명곡 2’가 ‘나는 가수다’처럼 성공하지 못한 이유다. 아이돌 산업은 그들의 방식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산업의 변화를 맞이한 셈이다. 그리고 SM-YG-JYP 엔터테인먼트는 SBS 의 ‘K팝 스타’에 참여했다.

리얼리티 쇼를 제작하면서, 세 회사는 그들의 회사 자체를 ‘진짜’로 만들었다. 출연자들이 회사의 트레이닝을 통해 성장하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리얼리티를 확보한다. 심사를 맡은 3사의 심사위원들은 그들의 능력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며 ‘3강’의 성공 원인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K팝스타’를 통해 3사는 회사 자체가 캐릭터와 서사를 갖춘 존재가 됐고, 앞으로 데뷔할 소속 가수들은 자연스럽게 리얼리티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 시장의 지배자인 그들은 다시 시장을 끌고 갈 동력을 만들어낸 셈이다. 그러나 리얼리티 쇼의 제작비는 엄청나고, 시청률을 확보하려면 지상파나 대형 케이블 채널이 관여해야 한다. ‘3강’이나 그 비슷한 규모의 회사가 아니라면, 아예 이 판에 올라설 수 없다. 초창기의 아이돌은 무대에 오르기만 해도 기회가 생겼다. 그 뒤의 아이돌은 회사가 예능과 드라마에 ‘꽂아 넣을’ 능력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3강’만의 리얼리티 쇼가 만들어졌다. 또 한 가지 성장 방식인 해외진출도 그들이 가장 적극적이거나, 성공적이다. 특정 회사 중심의 시장구도는 점점 더 공고해지고, 아이돌은 회사와 팬덤의 규모에 따라 서열화된다. 일부 아이돌은 전 세계를 누비지만, 나머지는 연예계의 산업 예비군처럼 온갖 프로그램에서 ‘원샷’의 기회를 바라며 활동해야 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양극화
[강명석의 100퍼센트] 아이돌, 1%의 우상과 99%의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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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MTV , MBC 에브리원 , Mnet 의 ‘깨알 플레이어’, JTBC 등 최근 아이돌을 콘셉트로 내세운 케이블 TV 예능 프로그램은 아이돌의 서열화, 또는 양극화의 한 단면이다. 지상파에 출연하기 점점 어려운 아이돌들은 이 프로그램들에서 자신을 마음껏 홍보한다. 대신 아이돌은 자신들에 관한 모든 정보를 털어놔야 한다. 에서는 아이돌의 인기에 따라 ‘A급’과 나머지를 나누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어떤 아이돌은 과거보다 더 마니아적인 방송에 출연해 자신이 ‘A급’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 받는다. 반면 어떤 아이돌은 에서는 CG로나 볼 수 있을 만큼 높은 존재가 된다. 서열은 피라미드처럼 공고해졌고, 그 위치를 뒤집으려면 더 많은 활동과,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하다. 티아라는 지난해 ‘롤리폴리’로 음원차트에서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끊임없이 음원을 내고, 행사를 뛰고, 개인활동을 한다. 굵직한 CF를 찍거나, 해외 순회공연을 하며 큰 수익을 내기 어렵다. 시장 규모가 줄어들면서 국내 활동으로 얻어낼 수 있는 한계치는 낮아졌고, ‘레벨’을 올릴 기회는 더욱 줄어든다. ‘3강’이 아니라면, 극적인 해외 진출의 기회를 얻지 못하면, 지금 아이돌은 국내에서 할 수 있는 한계치가 명확하다. 1위를 하든 못하든, 그들은 점점 더 소수의 마니아만 남은 채 게토화 되는 시장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JYP가 제작하고 박진영이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로 나선 의 설정은 마치 ‘3강’의 수장이 본능적으로 바라본 가요계의 현재처럼 보인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기린예고를 이끈 원래의 이사장은 해외 진출에 나섰다. 그 사이 학교는 쇠퇴하고, “쓸만한 애들은 나가는” 상황이 된다. 결국 아이돌 기획사가 기린예고를 인수하고, ‘진정성’을 강조하는 유진(정진운)은 기린예고에 전학 온 아이돌과 대립한다. 아이돌은 학교로 돌아가고, ‘기본’과 ‘진정성’을 쫓던 로커는 자신의 신념을 유지한 채 아이돌의 세계로 뛰어들게 될 것이다. 시장의 지배자들은 이미 변화하는 시장의 흐름을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지 못한 아이돌과 제작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 답을 찾지 못하면, 아이돌은 영원히 우상이 될 수 없다. 성장과 역전의 드라마가 없는 아이돌이란, 그저 어린 직장인일 뿐이다. 피라미드의 가장 위에 있지 않은 그 모든 아이돌에게 악전고투의 시절이 왔다.

글. 강명석 기자 two@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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