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반의 부정부패, 폭력과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와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모든 긍정적 이미지의 정반대에 선 천재 해커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스티그 라르손의 소설 이 낳은 최고의 캐릭터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뛰어난 재능과 노력도 스웨덴이라는 홈그라운드를 벗어나면 100% 발휘되기 힘들지도 모른다. 특히 지구 반대편의 나라 대한민국은 두 사람에게 어딘가 대단히 불친절하고 불편한 나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비록 스티그 라르손의 사망과 함께 은 막을 내렸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거대한 악과 맞서 싸우고 있기를 기대하는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고군분투를 2012년 대한민국으로 옮겨와 봤다.

P.S. 리스베트 살란데르 양, 제 노트북을 폭파하지만 말아주세요. 비밀번호는 제 생일입니다.

<밀레니엄>│번외편, 진실을 증오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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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라니, 가서 핵무기라도 찾아달라는 거야?”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의 어이없어하는 얼굴에 의 편집장 에리카 베르예르는 더욱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지구상에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라는 나라도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참고로 남한은 김정일이나 그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야. 민주주의 국가고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뽑지. 지금 대통령은 동양의 베를루스코니 같은 인물이래.” 민주주의라, 그런데 어쩌다…?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긴 미카엘을 향해 에리카가 밝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만 베를루스코니처럼 미성년 성매매 의혹이 있는 건 아니야. 다른 전과가 몇 건 있을 뿐.”

처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어. 미카엘은 한국에 온 뒤로 벌써 수천 번쯤 되뇐 문장을 또다시 곱씹었다. 의뢰는 스웨덴에서 비행기로 14시간이나 걸리는 낯선 나라의 존재만큼이나 생소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중대한 시국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연예인 스캔들 기사가 더 큰 이슈로 떠오르며 사안을 덮어 버리는 것이 모종의 음모로 여겨지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으니 그 연관성을 찾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마침 2012년 12월에는 남한의 대통령 선거가 열릴 예정이라 사태가 시급하다는 간곡한 부탁이 뒤를 이었다. “어떤 멍청이가 그런 의뢰를 한 거야?” 에리카가 답했다. “ 무슨 카페라는데 상당히 손님이 많은 곳인가 봐. 그들이 모금을 해서 의뢰비용을 대기로 했고, 한국 내 정기구독자도 100명 이상 확보해 줬어. 알다시피 지난 호 광고 적자폭이 상당했는데 마침 선입금이 된 덕분에…” “알았어. 할게. 한다구!” 지난 몇 달 간 본업을 내팽개치고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뒤만 쫓아다닌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으로 어쩔 수 없이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한 미카엘이 물었다. “그런데 그 나라엔 기자가 없대?” “응. 없대.” 순간 미카엘의 얼굴에 스치는 미묘한 우쭐함을 재빠르게 포착한 에리카가 일침을 가했다. “실은 당신보다 훨씬 나은 기자가 있긴 한데 그 사람이 지금 굉장히 바쁘대. 누끌리어 밤인지, 피부과인지, 누나인지 뭐 그런 문제로. 너무 복잡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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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때 거절했어야 했어. 갑갑한 기분에 한숨을 쉬자 흰 입김이 토해져 나왔다. 한강 위에 떠 있는 인공섬 지하에 있는 사무실은 정부의 에너지 절약을 위한 권장 난방온도 18도를 충실히 지키느라 지독히도 추웠다. “이 빌어먹을 사무실은 뭐야?” 비싼 국제 전화료를 감수하고 전화를 걸어 고함을 질렀지만 에리카는 차분했다. “한국은 임대료가 비싼 나라야. 마침 그 건물을 쓰던 NTS가 구조조정을 한 덕분에 싸게 빌린 거라구.” 점심 무렵이 되었지만 여전히 코트를 입은 채 머그에 뜨거운 물을 담아 손을 녹이려 애쓰면서도 어깨와 다리가 결려오던 그 때, 쾅- 복도 저 편 철문이 열어젖혀지며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미카엘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5. 4. 3. 2. 1-

“난 이런 미친 나라에선 살 수 없어요. 살 수가 없다고요!” 리스베트는 먹은 게 다 목청으로 갈 거야. 그러니 그렇게 먹어도 거식증이란 말을 듣지. 미카엘은 애써 미소로 평정을 가장하며 물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한국에서의 첫 출근일, 리스베트는 지하철에서 자신을 성추행하던 중년 남자의 손목을 부러뜨렸고 며칠 뒤에는 숙소에 침입했던 강도를 두들겨 팬 뒤 전기충격기로 기절시켰다. 알고 보니 판사였던 성추행범은 사직서를 냈고, 여자 혼자 사는 원룸만 돌아다니며 강도와 성범죄를 저질러 온 ‘마포 을 발바리’를 현장에서 검거하도록 본의 아니게 도운 리스베트는 ‘용감한 외국인상’을 받았다. 이래서야 비밀 취재가 될 리 있나. 요즘 점점 머리숱이 줄어든다는 느낌을 받으며 아침에 본 발모제 광고를 떠올리던 미카엘의 뇌리에 리스베트의 거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당신이 시킨 대로 시청 앞에 갔는데, 어떤 늙은이들이 나한테 몰려와서 시비를 걸었어요! 분명 흡연 구역이었는데 내 담배를 빼앗아 바닥에 버리더니 계집애가 어쩌고 하면서! 어버이? 아무튼 Parent 뭐라는 영감들이었는데 나더러 에미 애비도 없는 년이라고 하더군요. 내가 그 애비를 어떻게 했는지 알면 감히 그 따위 말을 내뱉지는 못할 텐데!” 마지막 문장에서 등골이 오싹해진 미카엘은 리스베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정전기만 튀어도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은 늙은이들에게 무기를 쓰게?” 미카엘의 기우를 한껏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리스베트가 흐리듯 덧붙였다. 콩알탄을 조금 뿌려놓긴 했지만. 마침 사무실 한 쪽에 켜져 있던 TV에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처녀 간첩, 보수 노인 단체 테러로 대규모 유혈 사태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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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베트가 좋아하는 김밥 연옥에서 점심을 시켜먹은 덕분에 오후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그들이 한국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음식이었다. “미카엘! 여기서는 새벽 2시에도 전화만 하면 완벽한 닭 요리와 맥주를 내 식탁까지 가져다 줘요!” 리스베트와 알고 지낸 이후 그녀의 가장 들뜬 모습에 미카엘은 깜짝 놀랐지만 그 자신도 양념치킨, 곱창, 소주, 떡볶이, 라면의 마력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요즘 들어 바지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껴입은 내복 때문일 거라 생각하며 미카엘은 현실을 외면하려 애썼다. 오늘 저녁에는 뜨끈한 오뎅탕에 소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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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흐뭇한 상상은 길게 가지 못했다. “망할 놈의 액티브 엑스! 내가 이걸 깔아놓은 인간들을 찾아가서 머리에 총구멍을 내 놓고 말 거야!” 부정부패에 연루된 고위 공직자, 그들에게 주목하는 여론을 연예인 스캔들로 돌려놓았다는 혐의를 받는 언론사, 연예인의 마약 복용이나 사생활에 관련된 뒷조사를 전담하는 정보기관 사이에 흘러 다닌 자금의 흔적을 포착하기 위해 금융기관을 해킹하던 리스베트는 모든 사이트에서 필수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응용 프로그램 때문에 컴퓨터가 멈출 때마다 대수술 후 겨우 아물어가던 뇌혈관이 터질 듯 소리를 질러댔다. 며칠 전에는 한 은행 홈페이지에서 가짜 공인인증서를 실행시켜 비밀번호를 치면 공인인증서와 함께 비밀번호가 해킹서버로 보내지는 해킹 프로그램에 당한 것을 깨닫고 모니터를 집어 던지려는 것을 미카엘이 간신히 뜯어말리기도 했다. 파워북 이후로 리스베트가 새로 장만한 맥북 프로는 지난 주, 비 오는 날마다 젊은 여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붉은 페인트를 뿌리고 도망치던 남자를 붙잡아 난투극을 벌일 때 망가진 뒤 복구되지 않은 채였다.

조금만 있으면 이 짓도 끝날 거야. 미카엘은 이를 악물고 그동안 자신이 주목해 온 한국 연예인들의 리스트를 다시 한 번 체크했다. 중요한 정치적 현안이 불거졌을 때 개인적인 스캔들로 여론을 장악할 만한 영향력을 지닌 스타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가 사건이 발생하면 연관관계를 확인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류스타 J군이 취미로 ‘폭풍 트윗’을 하던 시절이 미카엘로서는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1분이 멀다 하고 올라오는 트윗을 번역기로 읽어내고 의미를 파악한 보고서가 A4 용지로 80장에 달했다. ‘오늘은 특별한 게 없군. 이 여자는 또 셀카야? 이 친구는 또 자기 자랑에, 이 친구도 자기 자랑 리트윗에, 이 여자아이는… 뭐, 예쁘긴 하군.’ 어디까지나 자료수집 차원에서 파일을 저장한 미카엘은 1분 전에 올라온 아이돌 B군의 트윗에 눈길을 멈췄다. “I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 U”라는 뜻 모를 숫자가 미카엘의 마음 깊은 곳 어딘가의 위험신호를 자극했다. 계좌 번호인가? 처음과 끝의 영어는 뭐지? 전화번호? 한국의 지역번호는 0으로 시작하지. 0을 뺀 거라면 031, 경기도 번호라면 그냥 119에 걸어서 이름만 대면 될 텐데 이 많은 숫자는… 하리에트 방예르 실종사건 때처럼 성경 구절인가? 아니야. 뭔가 이상해. 어쩔 수 없군… “리스베트! 여기 뭔가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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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바보예요? 고등학교도 안 나왔나요?” 5초가량 모니터를 들여다보더니 1분 째 자신을 경멸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리스베트의 표정에 울화통이 터졌지만 미카엘은 태연한 척 대답했다. “역시 뭔가를 발견했군.” “이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암호에요.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 즉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는 원주율, 소수점 아래 어느 자리에서도 끝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며 반복되지 않는 수죠. 시작은 나(I), 끝은 너(U=YOU), 그 사이에 ‘영원’이 있다는 건 뭐겠어요? 당신은 스무 살짜리 남자애만도 못하군요.” 말을 마친 리스베트가 퇴근하겠다며 훌쩍 나가버리기도 전에 미카엘은 에리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열애설이 터질 것 같아. 무슨 사건과 엮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뭐라구요? KWAVE의 B가?” 새벽녘이었지만 잠에서 완전히 깬 목소리로 에리카가 다급히 말했다. “미카엘, 잘 들어요.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당장 카메라를 들고 KWAVE의 숙소 근처에 가서 잠복해요. 상대가 누군지 알아내야 해요. 그리고 모레는 KWAVE가 월드 투어를 떠나는 날이니까 공항 사진을 찍어 와요. 다음 주 목요일에 스톡홀름에서 공연이 있는데 그 사진을 이번 호 표지에 실을 거예요. 요즘 스웨덴에선 한국 아이돌의 열성 팬들이 엄청나게-” “에리카, 에리카!”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는 등줄기로 서늘한 무언가가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최악의 예감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설마…이러려고 날 한국으로 보낸 건 아니지?” 지구 반대편, 수화기 너머에선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으로 돌아온 편집장, 에리카 베르예르는 조용히 말했다.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글. 최지은 five@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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